근래 들어 자주 병치레를 합니다.
지난달 코로나에 걸려 한 일주일 앓고 났는데 그 후유증이 한 달 이상 가는 것을 보며 신체 회복력이 많이 떨어졌음을 감지합니다. 그리고 코로나가 물러가자 이번에는 위경련이 일어났습니다. 그 탓에 이런저런 연말 모임을 다 사양하고 집에서 칩거하다시피 했지만 잘 낫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아무래도 회복력이 약화되는 듯합니다.
가만히 스스로를 들여다보니 나이가 들면서 회복력도 약화되었지만, 병치레하는 태도도 달라졌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조금만 아파도 엄청 아픈 양 포장을 하며 엄살을 피우며 병치레했는데 요즘은 그런 엄살이 사라졌습니다.
어려서부터 엄살이 좀 심하긴 했지요. 아마 아래 동생과 터울이 많은지라 어린 시절을 막내처럼 자라서 그런가 보다 하며 제 변명을 해봅니다. 그래서 제 주위에서는 제가 좀 아프다고 하면 별로 개의치 않습니다. 원래 엄살이 심한 인간이니 그런가 보다 하며 염려를 놓습니다. 엄살을 피울 기운이 있는 걸 보니 견딜 만한 모양이구나 하고 넘기는 것이죠.
저 역시 주변에 안심을 주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비록 엄살을 피우지만, 그리 아프지는 않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엄살을 피우는 것은 일종의 사교 행위입니다. 서로 관심을 두고 살자는 의사 표시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엄살이 꼭 육체적인 병환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정신적으로 힘들 때 역시 엄살이 나올 수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누군가의 위로가 필요하다는 손짓일 수 있지요. 그럴 때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됩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엄살은 여러 가지 긍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엄살의 가장 큰 효과는 에너지를 부른다는 것입니다. 엄살을 부리는 데에도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냥 축 늘어져 앓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몸이 녹초가 되고 기력이 하나도 없을 때에도 엄살을 부리려면 새로운 에너지를 불러와야 합니다. 자신에게 에너지를 부어주니 병을 이기는 윤활유 역할도 하고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저런 에너지가 있는 걸 보니 살만한 모양이구나 하며 안심을 주게 됩니다. 우는 아이에게 젖 준다는 한국의 정서는 타당한 초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는 데에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울면서 에너지 소모를 많이 하니 배가 더욱 고플테니 젖을 줘야 합니다. 그래서 우는 아이는 건강하다고 하지요.
엄살을 피우기 위하여는 조건이 따릅니다. 그런 엄살을 받아 줄 사람이 있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엄격한 아버지 앞에서는 눈물이 없던 아이가 자신을 배려하고 인정해 줄 엄마 앞에서는 쉽게 눈물을 흘리며 어리광을 부립니다. 즉 엄살은 그것을 받아 줄 사랑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엄살이 통하는 사회는 정이 흐르는 따뜻한 사회입니다. 서로를 감싸주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정이 있는 곳이죠. 아무도 받아 주지 않는다면 엄살을 부리지 못하죠. 나와 가까운 사람, 나를 걱정해주는 사람, 나를 지켜봐 줄 수 있는 백그라운드가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약육강식의 비정한 논리만 통하는, 짐승들이 우글대는 밀림의 세계에서는 엄살이 통할 리 없습니다. 엄살은 서로를 믿는 구석이 있을 때만 통합니다. 사랑하는 남자친구와 함께 있을 때 바퀴벌레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엄부럭을 피울 수 있지만, 숲에서 늑대를 마주하는 엄중한 상황에서는 그럴 수는 없는 일인 것처럼 말입니다.
엄살이 통할 여지가 없거나 아예 사라질 때는 무겁고 엄중한 상황이 벌어짐을 의미합니다. 진짜 죽을 듯이 아플 때, 모든 희망이 사라져 절망의 늪에 빠질 때는 엄살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엄살이 존재하는 곳은 아직 여전히 정이 통하고 사랑이 바탕을 이루는 곳이라고 봐도 됩니다.
그러고 보면 엄살을 부릴 수 있는 환경에 살고 있다는 것은 행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니 엄살이 사라집니다. 이제 나를 돌봐 줄 사람보다 내가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 더 많아진 탓인가 봅니다. 그리고 고희가 넘어서 부리는 엄살은 어쩌면 주변 사람들에게 협박으로 비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른의 엄살은 ‘나 이제 이런 병으로 갈 수도 있으니 알아서 해라’하는 협박으로 오인될 수 있으니 함부로 부려서는 안될 일입니다.
고희가 넘어 남은 세월이 그리 길지 않은 상황에서는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는 김춘수 님의 꽃에 나오는 시구처럼 우리는 이미 무엇이 되어 있습니다. 아비로, 가장으로, 회사의 대표로, 학교 선배로, 그리고 나라에서도 인정하는 지공도사 어르신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권위있는 이름과 엄살은 어울리 것 같지 않지요. 그래서 어른이 되면 그 앙살맞은 엄살도 남의 일이 되나 봅니다.
이번에 한바탕 앓고 난 후 예전처럼 엄살을 부리지도 못하고, 아닌 척 견뎌온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하고,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나이만 많은 아이의 어른 노릇은 늘 이렇게 힘들기만 합니다.
씬짜오베트남 독자 여러분, 연말에는 엄살을 고민 할 필요 없는 건강한 몸과 정신으로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