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3,Saturday

한주필 칼럼-눈물

지난주 금요일 밤은 선물 같았습니다. 

한국이 포르투갈을 이기고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룬 밤이었습니다. 한국의 월드컵 운명은 늘 그랬듯이 위태위태합니다. 한 번도 널널하게 이겨, 여유롭게 16강에 올라간 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이번 한국의 16강 진출은 단순히 우리만 이긴다고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게임만이 아니라 남의 나라 게임마저 통제해야 하는 마법을 부려야 했습니다. 

금요일 밤, 베트남 시각으로 밤 10시에 치러진 마지막 조별 게임에서 한국의 마법이 일어났습니다. 누구의 구상인지는 몰라도 참 심술 궂은 마법사였습니다. 이겨야만 하는 절대 절명의 숙제를 지닌 한국에게 게임 시작 5분 만에 더 무거운 짐을 얹혀줍니다. 마법사로 등장한 운명의 신은 게임 초반에 포르투갈에게 골을 하나 선물하며 한국을 더욱 깊은 구덩이로 빠뜨리고 야릇한 미소를 날립니다. 과연 이런 난국을 한국은 어찌 해결한 것인가 두고 보자는 의도인 듯합니다. 한국인은 난국 극복 유전자를 지니고 태어난 것을 잊지 않은 듯합니다. 이왕 극복할 난국이라면 더욱 극적인 상황을 만들고 싶은 마법사의 심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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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대 1, 승리가 아니면 패배와 같은 운명, 절망의 그림자가 점점 짙게 그라운드를 덮어가며, 간절히 손을 모아 기도하는 한국 응원단의 모습을 배경으로, 남은 운명의 시간이 고작 6분이라는 것을 알리는 판넬이 도하의 에듀케이션 시티 스타디움 한편에 조용히 떠오릅니다. 이미 기력은 다 소진되어 한걸음 옮기기조차 어려운 상황, 여전히 신은 시험을 멈추지 않습니다. 포르투갈의 코너킥, 또다시 맞은 위기의 순간, 그러나 위기는 기회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상대가 코너킥에서 올린 공이 수비수를 거쳐 텅 빈 공간을 한 아름 안고 손흥민 앞에 떨어집니다. 신이 짐짓 외면하는 듯 던져준 마지막 기회입니다. 바로 손흥민이 가장 잘하는 상황을 최후의 카드로 내밀었습니다. 한달음에 포르투갈 골문 앞까지 달려온 손흥민, 그러나 그의 앞에는 이미 3명의 상대 수비수가 진을 펼치고 있습니다. 뒤쪽에는 4명의 상대 선수가 퇴로마저 막고 있는 진퇴양난의 순간입니다. 그 순간 손흥민의 눈이 빛납니다. 그리고 황희찬의 논스톱 슈팅! 마술사로 분장한 신의 야릇한 미소가 도하의 하늘에 피어납니다. 그리고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우루과이와 가나의 게임을 2대0으로 만들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은 완벽한 16강의 길을 대한민국에게 열어줍니다.  

오 필승 코리아! 한국의 함성이 사막의 나라 카타르 도하에서 울려 퍼집니다. 

모두 눈물을 훔칩니다. 울보 손흥민은 마스크도 집어 던진 채 아예 그라운드에 무릎을 꿇고 오열합니다. 그는 늘 웁니다. 우리는 이번에도 그가 울 것을 알았습니다. 져도, 이겨도 손흥민은 울 것입니다. 그것처럼 쉬운 예언은 없습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인은 참 눈물이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아마도 한국인이 감성적 유전자를 지닌 탓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한국인에게만 있는 단어, ‘한’이라는 감정이 눈물과 연결이 되는 듯도 합니다. ‘한’이란 억눌린 감정의 침전물입니다. 주변의 시야에 초연할 수 없는, 좁은 지역에 몰려 살아야 하는 한국인은 감정 표현이 직설적일 수 없습니다. 표현하고 싶지만 참아야 하는 감정이 쌓여 생각만 해도 눈물이 흐르는 ‘한’이라는 한국인 특유 감성이 생겨난 듯합니다. 

또 다른 이유를 막연히 추론하자면, 한국의 굴곡진 역사가 원인일 수도 있지만 더 근원적 이유를 들자면, 아마도 오랜 세월 공동체 사회를 살아온 한국인들은 타인의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것이 이웃이 해야 할 책무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지내왔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공감 의식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이 눈물입니다. 이웃이 슬픔에 빠질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립니다. 타인과 감정을 공유하고 공감하는 표현으로 흘리는 눈물입니다. 오랫동안 함께 지내는 많은 이웃을 가진 좁은 한반도의 국민은 그렇게 늘 눈물을 흘리며 삽니다. 

이런 현상을 서구인들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드러납니다. 서구인들은 유럽이라는 좁은 지역에서 쉴 새 없이 서로 싸우고 다투며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긴 역사를 살아왔습니다. 오늘의 아군이 언제 적군이 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고, 따라서 타인의 감정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런 탓으로 개인주의가 발달하고, 타인의 사정에 공감하는 표현으로 눈물을 사용할 기회가 별로 없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눈물은 모든 감정의 끝이라고 하지요. 끝을 볼 만큼 깊은 감정에 빠졌을 때 나오는 것이 눈물입니다. 감정이 폭이 다양하고 깊을수록 눈물이 많습니다. 그리고 실컷 눈물을 흘리고 나면 감정이 가라앉습니다. 눈물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입니다.

손흥민은 그날 16강이 확정되는 순간 목놓아 울었습니다. 바닥을 기며 오열하는 그의 모습에는 승리하고 뜻을 이루었다는 기쁨보다 그동안 그의 작은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과 책임 그리고 한없이 무거운 인고의 시간에서 해방되는 카타르시스가 담겨있었습니다.  

아마도 그의 눈물은 스포츠맨이 흘린 가장 뜨거운 눈물 중의 하나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눈물을 털고 감정을 추스르고, 세계 최고의 팀과 당당히 맞서는 진정한 게임을 즐길 시간입니다. 

즐길 줄 아는 자는 승부에서 져도, 이겨도 늘 승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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