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진출한 지가 어느덧 십 년을 훌쩍 넘겼습니다. 텅 빈 사무실에 두 사람이 동그마니 앉아있던 조직은 북적대기 시작했고 이제는 베트남의 개발사들이 먼저 연락을 줄 정도의 지명도도 갖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 본사의 대표이사는 세 번 얼굴을 바꾸었고 조직도 해외사업본부를 거쳐 자회사로서의 위치를 갖게 되었으니 변화가 많았던 셈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이루어진 해외법인의 평가와 연말의 이사회는 그동안 우리가 무엇을 이루었고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였으며 어떤 점들을 보완해야 하는가를 정리해 본 기회였습니다. 동시에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를 미리 가늠해 본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 쉽지 않은 질문입니다. 지나온 길은 정리하고 평가하면 될 일이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라는 것은 그렇지 못합니다. 휑하니 텅 비어 바람만 부는 길 없는 들판에 서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디로 이어진 지 모르는 처음 가 본 말이 통하지 않는 도시의 길을 걷는 것과 같기도 합니다. 막막하다는, 마치 처음 베트남법인으로 발령되었을 때의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그런데 저만 그런 것은 아닌 듯합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많은 분들이 이 길에 대하여 고민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냥 정해진 수량을 생산하는 일만 생각한다면, 단지 목표한 수주와 매출실적을 달성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면 숫자와 그래프 외에 더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미래의 방향에 대해 우려하고 여기에 응하는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고민하는 분들에게 길 없는 길을 가는 이런 느낌은 낯설지 않습니다. 이런 고민을 깊어 가게 하는 데는 두 가지 배경이 작용합니다. 하나는 세월이 더해 갈수록 현지에 대한 이해가 높아져 간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여기에 반비례하여 본사와의 이해 교감이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가면 갈수록 현지에서의 가능성에 눈뜨게 되고 동시에 발전의 가장 큰 장애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오너가 직접 베트남사업을 진두지휘하는 회사가 아니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 느껴보았을 상황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시장의 특성 때문입니다. 베트남과 같은 시장은 여전히 분석 보다는 ‘감(感)’이 보다 우선되는 시장이어서 그렇습니다. 지표와 통계들이 제공되기는 하지만 그 분석이 예측의 명백한 근거가 되기 어렵습니다. 그런 현황보다 다른 요소들의 개입이 더 큰 변화를 일으킬 개연성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치는 최소한의 실패를 커버할 기준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이곳입니다.
‘시간’은 이러한 사업의 성패를 좌우지하는 중요한 결정요인입니다. 시간이 누구의 편이냐에 따라 사업의 성패가 달라지는 경우는 부지기수입니다. 베트남 사업가들이 한국의 사업가들보다 덜 세련되었고 덜 기민하지만 그들이 더욱 많은 승리를 거머쥐는 것은 시간이 그들의 편이기에 그렇습니다. 시간을 쥐고 있는 싱가포르나 대만의 기업들이 질적으로 우수한 내용의 프로젝트를 개발하는 것을 보면 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요인들을 극복하려면 신중한 고려도 중요하지만 단호한 결정이 더욱 중요합니다. 그런데 많은 한국 기업들이 좋은 기회 앞에서 고려에 고려를 더하느라 결정의 타이밍을 놓치는 것을 봅니다. 프로젝트의 절차에 담긴 벌어지지 않은 리스크를 대응할 수십페이지의 보고서를 만드는 동안 우리의 파트너는 다른 계약서에 서명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베트남에서 일을 하려면 오너십이 발휘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굳게 합니다. 한국에서도 결정의 오너십이 있어야 하지만 현지의 일하는 이에게도 그러한 권한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고용인과 같이 일한다면 시간을 제 편으로 할 가능성은 영원히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트남의 사업이 지속성을 갖게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여기에는 다른 하나가 요구되는데 그것이 현지화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현지화의 정체가 무엇일까요? 베트남 직원들의 수가 주재원의 수 배에 이르면 현지화일까요? 한국인 파견직원들이 베트남에서 모든 종류의 급여와 수당을 받으면 될까요? 저는 현지화의 목표를 다음 몇가지로 봅니다.
그 중 첫째는 현지인이 현지법인의 대표가 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현지법인의 대표가 인사와 조직정책을 결정하고 수주전략을 수립할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입니다. 셋째는 현지에서 벌어들인 회사의 이익을 현지에서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주장에는 여러 반대가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그럼 한국의 본사에는 어떤 이익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회사도 그런 문제로 수 년을 허비했습니다. 허비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건강한 토론으로 발전하여 정책이 되지 못하고 뒷전에서 비난하고 근거 없는 의심을 하는데 소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은 현지화의 길에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일을 손에서 놓아야 할 때가 가깝습니다. 그러니 지난 세월이 허비라고 말할 만큼 아까울 수 밖에요.
제가 아는 한 분이 이런 내용의 메시지를 한국으로부터 전해왔습니다. 그 분은 은퇴 후 한국의 모든 산을 돌아보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세웠는데 그 가운데 제주 올레길도 포함되었다고 합니다.
“제주 올레길 11개 구간 168km를 걸었습니다. 무념의 상태로 걷다가 배고프면 식당에 들어가고 날이 저물면 잠자리를 찾았습니다. 눈 덮인 한라산도 올랐으니 더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남은 15구간 올레길은 마음이 허기질 때 다시 찾을 생각입니다. 가야 할 길은 늘 까마득했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마다 놀랐습니다. 한걸음 한걸음은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가야 할 길은 까마득한데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놀랍다는 그 분의 표현을 저는 이렇게 바꿔보고 싶습니다.
“가야 할 길은 보이지 않는데 뒤돌아보니 걸어온 자취가 길이 되었습니다.”
방향을 정리했다고 하지만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길의 앞은 여전히 뚜렷해 보이지 않습니다. 현지화라는 모호한 개념을 구체화하고, 경험하고 배워온 것들이 축적된 역량이 되도록 하고 싶지만 시장 역시 진화하고 변모합니다. 그러므로 여전히 미래는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 저는 이 길의 여행을 마칠 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와 함께 일해 온 이 곳의 동료들은 여행을 계속해야 합니다. 그들이 제가 허비한 세월과 같이 시간을 소비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비록 걸어보지 못한 길을 가더라도 그들이 걸어간 그 자취가 길이 되는 기적을 보기를 바랍니다. /夢先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