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된 이후 아시아 국가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교세를 확장하는 한국 가톨릭 종단의 성공사례를 대표적으로 칭송하며 타국의 선례로 삼고자 함이 아닌가 싶다. 그만큼, 비 유럽 국가이면서도 남다른 성장을 보인 한국의 가톨릭 종단은 실제로 한국에서 많은 역할을 하며 시민들의 존경과 사랑 속에 그 교세를 확장했다. 한때 민주화가 일부 인사들에게 유일한 삶의 목적일 당시, 한국 가톨릭의 성지, 명동 성당은 그런 인사들을 포용하고 거두어주는 구조자의 역할을 자임하며 한국 민주화를 앞당기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대통령을 대놓고 비난해도 별다른 제재가 없어진 요즘에도 여전히 예전의 향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부 사제들이 상식을 넘어선 행동으로 사회적 역 반응을 일으키곤 하지만 아무튼 한국 사회가 민주화를 이루는데 있어서 가톨릭 종단이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일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기존의 다른 교황들과는 다른 파격적인 행보로 그의 존재가치를 높이고 또한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교황청의 역할을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 5월 중동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로 모든 논란과 갈등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책을 추구할 수 있음을 언급했다. 또한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슬람 최고의 지도자인 모하메드 후세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며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그의 믿음을 본받아 우리 앞에 놓인 공동의 도전에 직면할 수 있는 새 힘을 드리겠다고 발언했다. 교황청에서 정적인 메시지 전파에 주력하던 전임 교황들과는 달리 적극적인 행보로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스스로 높이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행보가 타 종교인의 눈에는 일종의 정치적 행보로받아들여지며 그를 비난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가 추구하는 평화와 사랑이라는 두 단어는 종교를 떠나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인류 전체에게 주어진 사명이자 숙제다.
세계사를 움직인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인 종교,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 그리스도교의 교황의 존재가 가장 극명하게 빛을 발한 시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여 카노사의 굴욕을 맛보게 한, 1077년 그레고리우스 7세가 교황을 맡고 있던 때였다. 그는 자신이 금지한 황제의 주교직 서임을 단행한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자, 하인리히 4세는 카노사 성에 머무는 교황을 찾아가 그 성 앞에서 1월의 매서운 눈발 속에서 맨발로 3일을 보내며 사면을 요청하며 간신히 파문을 풀어냈다. 당시에 파문이란 파문 당한 자와 관계를 지속하면 그 사람도 파문을 당해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그 당시 황제라는 지위는 각 지방의 봉건제후들의 지지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는데 파문을 당하자 일부 봉건 제후들이 황제의 편에서 등을 돌리는 사태가 일어나 하인리히 4세는 어쩔 수 없이 굴욕적인 용서를 빈 것이다.
그러나 빛이 가장 밝을 때 어둠도 그 못지 않게 짙은 법이다.
굴욕을 맛본 젊은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는 그 후 교황에게는 없으나 자신에게는 있는 군사력을 이용하여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를 8년 동안 궁지에 밀어 넣어 교황의 거처였던 라테라노 궁전에 자기 지지세력을 심어 교황을 거주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그레고리우스 7세를 로마가 아니라 살레르노라는 도피처에서 죽음을 맞게 만든다. 그 후에도 지속적으로 교황을 로마에 머물지 못하도록 군사력을 이용하여 교황에게 압박을 가했다.
그 후에 교황이 된 온유한 성격의 빅토르 3세는 황제와의 관계를 개선하지 못하고 2년 만에 죽고 그 후임으로, 2000년 3월 교황청이 정식으로 잘못이라고 선언한, 최악의 종교 전쟁인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우르바누스 2세가 등장한다.
여전히 교황이 로마에 머무는 것 조차 용납하지 않은 시기였다. 우르바누스 2세는 취임 후 7년 동안 로마에 발을 디디지도 못한 체 이탈리아 각지를 전전하며 누추한 생활을 했지만 각지의 사제들과 고해신부들, 수도원들로부터 다양한 정보를 접하며 영토확장에만 관심이 있던 당시의 황제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취합하며 종합적인 글로벌 정책을 구상할 수 있었다.
마침 이슬람 교도에게 점령당했던 시칠리 섬이 노르만 부족에 의해 해방되자, 이를 계기로 이슬람 교도의 침략을 막자는 명분을 내세워 1095년 프랑스의 클레르몽에서 개최된 공의회에서 우르바누스 2세는 이슬람 교도를 비난하며 전 그리스도인들은 서로 영토확장을 위한 싸움을 그만두고 지중해까지 세력을 확대하며 우리 형제를 죽이고 납치하고 노예로 삼는 이슬람 교도의 침략에 맞서야 할 때라고 강조하며 전 유럽이 힘을 합쳐 이교도를 응징하자고 열변을 토한다.
그리고 그는 “이는 내가 명하는 것이 아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가 명하는 것이다.” 라고 군사력을 가진 황제는 할 수 없는 신의 메신저 역할을 내세운다.
당시 공의회에서 교황은 지금의 사가들이 말하는 십자군 전쟁의 명분인 예루살렘의 해방이라는 언급을 한 기록이 없다고 한다. 단지 황제에 맞서 교황의 권위를 되찾기 위한 방안과 그리스도 교인들끼리의 영토 전쟁을 막고 그 전열을 이교도에게 돌리고자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그리고 신으로부터 부여 받은 권한으로 이에 참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 동안 저지른 죄에 대한 면죄를 약속한다. 이에 감동받은 전 유럽의 시민들은 여자와 아이들까지 포함하여 가산을 정리하며 경비를 마련하고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십자군 원정에 나선다. 종교를 명분으로 인류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긴 200년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역사는 아이러니 하게도 이 전쟁을 통해 이슬람의 선진 문명이 유럽으로 유입되면서 르네상스가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하고, 그로 인한 과학의 발달로 사람들이 오만해지며 종교의 세가 수그러드는 역설적인 상황을 전개시킨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로 인한 무차별적인 자연의 파괴로 인간들이 점차 위기의식을 느끼며 현대에 들어서는 다시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믿음, 즉 종교가 힘을 얻고 있는 실정이다. 중세시대의 맹목적인 형태와는 달리 인본주의적인 형태로 다시 등장을 한 것이다.
이렇게 현대에 들어서 힘을 다시 얻은 종교는 같은 뿌리를 근거로 발생된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고 기독교가 단지 메시아(구세주)의 인정에 대한 교리차이로 서로를 이교도로 칭하며 싸우고 있다. 유대교에서는 아직 메시아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고,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구세주라고 하고, 이슬람에서는 예수를 그저 예언자의 하나로 보고 무하마드를 마지막 메시아로 보고 있는 것이 이들 교리의 근본적인 차이다. 단지 서로 다름을 다름으로 인정하지 않고 선악으로 구분한 이분법에 함몰된 탓에 이미 한 뿌리의 형제로써의 의미를 상실한 것이다.
오늘날처럼 유일신의 삼형제가 서로 반목과 갈등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는 것을 보면 종교가 인류에게 던지는 덕목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면에서 다른 종교 지도자들과의 면담과 회합에도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행보는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원수마저 사랑하라는 사랑의 종교, 기독교, 이제 그 기독교가 세계 평화를 위해 모범을 보일 순서라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아닌가? 설마 그 원수마저 기독교인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그런데 진짜 궁금한 것이 있다.
세상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평화일까?
<2014년 평화의 메시지>에서
작성자 : 한 영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