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바람의 화원’ 이라는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화가 김홍도(박신양 분)와 화가 신윤복(문근영 분)의 삶과 그들이 그림 그리는 과정 그리고 그들의 대표적인 유명한 그림들이 화면에 잘 소개 된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신윤복을 남장여자로 설정해서 드라마를 특이하게 이끌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드라마 소개를 갑자기 한 이유는 ‘바람의 화원’ 2화에 나온 한 장면이 생각나서입니다.
김홍도가 화공들에게 “그린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화공들 중 누구도 김홍도를 흡족하게 한 대답을 내놓지 못합니다. 이에 김홍도는 “그림을 그리는 자들이 그리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너희들이 도대체 뭣 때문에 도화서에 들어와 앉아있느냐”고 역정을 낸 뒤 신윤복을 지목해서 다시 한번 묻습니다. “네가 한 번 대답해 보거라.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 이에 신윤복은 골똘히 생각하다가 “그린다는 것은… 그린다는 것은… 그리움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요?” 라고 조심스럽게 대답을 합니다.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떠올라, 그를 그리게 되니… 그리움은 그림이 되고… 또한… 그 사람을 그린 그림을 보면, 잊고 있다가도 그 사람이 그리워지지 않습니까? 그러니 그림이 그리움이 되지요… 그러니, 그린다는 것은 그리움이 되지요…
드라마 속 대사처럼 ‘그린다는 것은 그리움이다’를 그림에 옮긴 오늘의 주인공, 화가 ‘클로드 모네’를 소개합니다. 이름만 들어도 잘 아시는 화가죠? ‘인상주의의 아버지, 인상주의의 거장’으로 불리우며 이 분을 빼놓고는 인상주의를 얘기할 수 없다는 그 유명한 ‘클로드 모네’가 맞습니다.
이번 칼럼을 쓰기 전까지 ‘모네’하면 인상주의를 있게 한 유명한 작품 ‘인상, 해돋이’ 가 먼저 생각났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칼럼에서는 ‘모네의 인상주의 특징을 잘 부각시키는 그런 그림들을 소개해야지’, ‘찰랑찰랑 수면에 빛이 비치는 생동
감 넘치는 풍경화를 소개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모네의 다른 그림들을 보는 순간 칼럼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 그림들에는 모네의 ‘그리움’이 절절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보면 볼수록 마음 한 쪽이 시려오면서 콕콕 쑤셔오기도 합니다.
이런 절절한 모네의 그림을 빠른 시일 내에 직접 볼 기회가 생기길 바라면서 모네의 그리움으로 가득 찬 그림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모네가 부인인 카미유(카미유 모네, 처녀적 이름 카미유 동시외)가 죽고 7년이 지난 1886년, 눈부신 태양 아래 바람에 날리는 하얀 스커트 차림의 초록색 양산을 쓴 여인을 그렸습니다. 이 그림은 두 번째 부인 알리스의 딸 수잔을 모델로 그렸지만 카미유 생전에 그린 ‘산책’과 비슷합니다. ‘산책’에는 또렷이 그려진 얼굴이 ‘양산을 쓴 여인’에서는 그림자만 어렴풋이 그려져 있습니다. 세월이 흘러 모네 기억 속 카미유의 얼굴이 희미해져 가지만 그리움은 더 커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혹시 카미유의 모습이 남아있어 카
미유가 살아있었다면 그 자리에 그렇게 서서 이렇게 지켜보는 것처럼 상상하면서 그렸을 것 같기도 합니다. 마치 누군가를 그리워
하다 길에서 비슷한 머리모양이나 옷차림을 한 사람을 보면 따라가는 마음처럼요.
카미유는 모네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사랑했던 여인입니다. 화가와 모델로 만난 두 사람은 바로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나 모델의 낮은 사회적 지위 때문에 모네 집안은 둘의 사이를 반대하고 결국 재정적 지원을 끊어 생활이 어려워집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가난
과 세상의 비난 속에도 그에게 용기와 영감을 불어넣어주며 모네가 창작에 매진할 수 있게 도와줍니다. 그녀를 모델로 50점 넘게 그
림을 그렸다고 하니, 그녀만 보면 모네는 창작열에 불타올랐던 것 같습니다. 조금씩 모네 그림이 인기를 얻게 되어 둘에게 봄날이 오는가 했더니 현실은 역시나 혹독합니다. 안타깝게도 카미유가 32세의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 그림을 본 순간 그림 속 카미유가 또렷하지 않고 어렴풋한 형태만 보이는데도 사진보다도 더 뚜렷해 보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아마도 이 그림을 그렸던 화가의 감정이 느껴져서 그런 것 같습니다. 감정이 그림에서 이렇게 큰 역할을 합니다.
지나치게 기술에만 치우친 그림은 잘 그렸어도 “음~ 그림이 메마르네.” “잘 그리기만 했네” 라는 느낌이 들곤 하거든요. 이 그림을 보면 마치 제가 그 앞에 서서 카미유 임종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카미유 임종을 바라보는 모네의 모습도 보일 것 같습니다.
모네가 이렇게 썼다고 전해집니다.
어느 날 무척 사랑했던 사람이 죽어갑니다. 점점 창백해지는 그녀의 얼굴, 그 얼굴에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 얼굴을 관찰하고 있는 나 자신을 깨닫고는 나도 놀랐습니다. 내가 그토록 아꼈던 그녀의 모습을 붙잡으려는 생각이 들기도 전에 기질적으로 변화하는 그녀의 얼굴빛들에 대한 전율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모네는 인상주의자답게 부인의 임종 자리에서도 그 순간의 빛을 찾고 있네요. 그 순간을 화폭 속에 영원히 옮겨 놓기 위해서 그랬겠죠? 그림 속에 죽음을 앞둔 모습이 무섭고 두렵다기보단 참 편안하고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아마도 모네에게 카미유가 편안한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고된 삶을 살았던 카미유에게 그 순간이 편안했을 수도 있구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모네의 모델이 되어준 카미유 동시외(Camille Doncieux)는 그림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이번 주는 우리도 모네처럼 기억하고 싶고 영원히 남기고 싶은 소중한 순간과 사람들을 그림에 그려보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