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감사 인사를 하거나 작별 인사를 할 때 보통 제가 직접 그린 그 분의 초상화를 선물로 드리곤 합니다. 마음 편한 자화상과 달리 다른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에는 신경 써야 될 부분이 많습니다. 처음에는 사진에 있는 그대로 사실적으로 그려서 선물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을 몇 번 겪고 나서 부터는 그다지 마음에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수정해서 그리곤 합니다. 턱도 좀 깎고, 눈도 살짝 크게 그리고, 주름들은 생략하고 나면 사진보다 조금 더 예쁜 사람이 그림 속에 완성됩니다. 사진처럼 포토샵 보정 같은 그런 작업이 필요하더군요. 이렇게 그린 그림은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아주 좋은 선물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까다롭고 어려운 남의 얼굴을 과감히 못생기게 그린 한 화가를 소개하려 합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예쁘지 않은 여인을 예쁘게 그린 적이 없고, 나이 든 여인을 젊어 보이게 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분은 자신 있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미술이란 누군가의 마음에 들 목적으로 그려져서는 안 된다” 오늘의 주인공, 여성혐오증이 있었지만 여성을 많이 그린 화가 ‘에드가 드가’ 입니다.
어떤 사람이 드가의 그림을 본 후 그에게 이렇게 물었답니다. “당신 그림 속의 여자들은 왜 그렇게 다들 못생겼습니까?” 그러자 드가는 “원래 대부분의 여자가 못생겼다오. 그것도 몰랐소?”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참 정직한 건지, 용감한 건지 대답 한번 냉정하게 하네요.
드가에게는 풍경화 속의 나무, 정물화 속의 사과처럼 그림 속의 여인도 역시 그냥 그려야 될 흥미로운 대상일 뿐 이였나 봅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누드화를 그리던 날이 생각이 나네요. 남학생, 여학생이 한 교실에 섞여 있어서 엄청 어색할 것을 예상했으나 막상 시작하니 예상과 전혀 달랐습니다. 시간에 쫓기고 채점에 압박 받으니 정신이 없이서 모델이 옷을 입고 있던지 벗고 있던지 그건 중요한 점이 아니었고 그저 그려야 될 대상일 될 뿐 이더군요
드가가 가까운 친구였던 마네와 마네 부인에게 마네가 부인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는 장면을 그려 선물한 일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친구의 아내를 좀 예쁘게 그려줬어도 좋으련만 냉정하고 눈치 없는 드가답게 본인 스타일대로 그려서 선물했었나 봅니다. 마네는 그 그림을 보고 너무 마음에 안 들어서 부인의 모습을 칼로 잘라 내버렸다고 합니다. 나중에 드가가 이 사실을 안 후 마네와의 우정에 금이 갈 뻔하지만 서로의 작품 색깔을 워낙 좋아해서 잘 풀었다고 전해집니다. 마네에게 드가의 다른 작품은 괜찮아도 부인에 대한 그림은 참을 수 없었나 봅니다.
또 다른 일화는 미국의 화가 메리 커셋이 드가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 카드를 든 채 의자에 쭈그리고 앉은 모습의 초상화에 대해 “나를 그렇게 혐오스러운 모습으로 그려놓은 사실을 견딜 수 없다. 내 가족이 그 초상을 보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무희의 화가’라고 불릴 정도로 ‘드가’하면 발레 하는 소녀들 그림이 딱 떠오르시죠? 이에 대해 드가는 “내가 발레 하는 무희들을 많이 그리는 이유는 발레가 좋아서도 아니고 여인들에게 어떤 연민의 정을 느껴서도 아니야. 단지 그들의 움직임과 광선, 시각의 변화가 눈길을 끌기 때문이야.” 라고 냉담히 말했다고 합니다. 배경 지식 없이 그림들만 봤을 때에는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구성들도 새로워서 사실 드가가 여성을 혐오했었는지, 여인이 모두 못생겼다 말했는지, 여인의 얼굴을 못생기게 그렸는지 몰랐습니다. 그 얘기를 읽은 후 보니 정말 어떤 얼굴들은 뭉개져 있기도 하고, 대충 그린 것 같아 보이기도 하구요. 이미 인상주의와 그 이후 그림들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그리 심하게 못생겨 보이지는 않겠지만 고전 기법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주로 그렸던 그 시대에서는 충격 이였겠죠?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 중에서 드가가 그린 못생긴 얼굴만 언급했더니 드가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드는군요. 그래서 드가 그림의 다른 특징들도 언급해 보려고 합니다.
드가는 ‘무희의 화가’답게 무희들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린 무희들은 참 인간적입니다. 이전의 화가들의 그림 속 무희들은 무대 위에서 완벽하고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드가의 무희들은 연습실 의자에 앉아서 신발 끈을 메고 있거나 옷을 고쳐 입고 있습니다.
때론 하품을 하기도 하구요. 무대 위를 그린 그림은 1/5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한 드가는 그림 속에 새롭고 특이한 구도를 시도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 같은 불완전한 각도, 그림 속의 배경이나 마차, 심지어 사람이 화면 밖으로 나간 것처럼 잘려있거나 비스듬하거나 기울어진 각도로 서 있어서 찰나의 순간을 찍은 사진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런 구도를 시도하였습니다.
또 드가는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작품들을 거의 다 모사(模寫)했다고 합니다. 이런 면을 보면 드가는 재능만 믿고 게으르기보단 성실하고 기본기도 튼튼한 화가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캔버스에 그릴 때 단번에 그려내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완성된 작품은 자연스럽고 완벽해 보이지만 그림을 그리는 과정 중에는 그려야 할 대상들을 여러 번 드로잉 한 후에 조합하여 재구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의 드로잉 그림들은 작품을 만들어야 하는 포트폴리오 수업을 할 때 제가 꼭 보여주는 단골 그림들이기도 합니다. 미술 대학을 지망하면서도 생각하는 대로 표현이 안되어 그림을 못 그린다고 생각해서 주눅들어 있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그림에 서툰 학생들에게 드가의 드로잉과 작품들을 보여주면 그 필요성을 이해하고 스스로 드로잉과 연습을 열심히 합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점점 그림 실력이 발전하는 것을 느껴 기뻐하고 재미있어 하더군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미술만이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드가. 이번 주는 드가처럼 자신만의 색깔로 다른 사람의 얼굴을 그려보는 건 어떨까요? 잘 그릴수도 있고 못 그릴수도 있지만 중요한 건 그리는 사람의 마음이겠죠. 아니면 마음 편히 자화상을 그려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