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에 가고 싶습니다. 뜨거운 땅. 모래와 적막이 머무르는 곳. 열기를 담은 바람이 땀을 메마르게 하는, 하루를 다해 걸어도 자신의 자취 외에는 찾아볼 수 없는 곳. 지나온 기억 마저도 바람이 지우는 곳. 사막에 가고 싶습니다.
남극에 가고 싶습니다. 차가운 땅. 얼음과 눈보라가 불어오는 곳. 냉기를 담은 바람이 칼이 되어 살을 찌르는, 하루를 다해 걸어도 자신의 지난 자취를 찾아볼 수 없는 곳. 지나온 기억 마저도 눈보라에 묻히는 곳. 남극에 가고 싶습니다.
바이러스에 꽁꽁 묶여 있던 세상이 조금씩 열리고 있습니다. 항공편마다 만석이 되고 여행지마다 사람들이 넘쳐납니다. 갇혔던 심장들이 펄떡이며 숨 쉴 곳을 찾아 다닙니다. 사막을, 남극을, 그 어디라도 다시 꿈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비행기가 좋습니다. 활주로를 박차고 오를 때, 몸이 뒤로 기울고 고도가 높아질수록 고막을 누르는 공기의 압력을 즐깁니다. 지구가 당기는 힘의 가장자리까지 도달할 때 일상의 통제를 벗어난 두근거리는 자유를 느낍니다. 그것은 불안정하므로 오히려 은밀해지는 자유입니다.
휴대전화의 전원은 꺼졌습니다. 하늘에 머무르는 동안 누군가가 불쑥 전화를 거는 일은 없습니다. 내 삶에 대한 통제권이 손 안에 다시 쥐어집니다. 이제 전원을 켜지 않는 한 아무도 나를 방해하지 못할 겁니다. 완벽하게, 알아왔던 세계로부터 멀어지는 순간입니다. 익숙했던 일상은 저기 구름 아래의 일입니다. 이제 낯선 세상으로 갑니다. 나를 모르는 곳, 여행은 그래서 감각의 밑바닥에 깔린 아드레날린을 용솟음치게 합니다.
그런데 진짜는 지금부터입니다. 여행에 대한 기대가 흥분이 되어 소용돌이 치는 것은 하늘 위에서가 아닙니다. 구름의 두꺼운 겹겹의 층을 거치는 비행기의 불안정한 흔들림을 겪으며 구름 아래 중력의 강력한 통제 안에 다시 들어올 때, 제트엔진의 광음이 흥분의 목소리를 집어 삼키기 시작하는 그 때, 나는 침묵하게 되고 내 삶이 온전히 나만의 것일까 하는 의문이 꼬리를 물면서 아래로, 다시 아래로 하강하는 바로 그때입니다.
여행은 ‘탈출’을 모색하는 일입니다. 내 삶의 괘를 크게 흐트러트리지 않으면서 일탈을 꿈꿀 수 있는 일입니다. 그 속에 불안정이라는 포텐셜을 가진 입자들이 서로 부딪치며 가늠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일상은 ‘안정’의 상징입니다. 일상은 우리를 머물게 하고 편안하게 합니다. 그러나 일상이 주는 반복의 단조로운 리듬은 때때로 우리를 무료하게 하고 지치게 하며 가라앉게 합니다. 그때 우리를 꺼내 주는 것, 리듬을 깨고 살아있는 정도로만 폴짝거리는 뇌파를 일깨워 주는 것, 그래서 일상의 바닥에 가라앉은 몸을 풍랑이 치는 해수면으로 끌어올려주는 것이 여행입니다. 그러기에 여행은 탈출이며 탈출이 되어야 합니다.
나는 호텔이 좋습니다. 호텔은 불안정한 여정의 베이스캠프입니다. 모든 일이 여기서 시작해서 이곳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므로 호텔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낯선 도시에서 머무는 날의 수만큼 호텔 찾기에 공을 들여야 합니다.
불안정의 모든 낯섦을 사랑하는 거처가 그 곳이니까요. 그렇게 찾아낸 호텔의 예약 버튼을 클릭했을 때, 당신의 예약이 승인되었습니다 하는 문구가 주는 안도감은 우리의 낯선 모험에 대한 초대장입니다. 마치 아주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이 그래, 어서 와 하고 말하는 것을 듣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호텔에 들어섰을 때, 주어진 키로 문을 열고, 내 모든 기대가 포개어져서 담긴 여행가방을 한 켠에 세워 둔 채 침대로 몸을 던질 때, 우리는 비로소 완벽한 자유가 무엇인가를 알게 됩니다. 진짜 일탈이 무엇인지 찌릿하게 느낍니다. 그 행위에는 의무도 없고 책임도 없습니다. 다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만이 하얀 시트 위에 떠다니고 있습니다.
이 안에서는 이부자락을 들추고 들어가도 되고 그저 이불 위에 널브러져 있어도 됩니다. 주름 하나 잡히지 않은 커버를 마구 구겨도 책망하는 이가 없습니다. 침대에서 똑바로 자도, 킹사이즈 베드를 대각선으로 누워 자도, 아예 거꾸로 뒤집어 다리를 베개 위에 올려 놓고 있어도 아무도 무어라 핀잔하지 않습니다. 바닥에 이불을 떨어뜨려도 됩니다. 다음 날 새로운 불안정을 찾아 헤매고 돌아와 보면 어느새 마법처럼 모든 것이 정돈되어 있을 터이니까요.
그러니 호텔 문을 열었을 때는 기대감으로 충만합니다. 손을 댄 적도 없는데 목욕가운은 제자리에, 아무렇게 벗어 놓고 간 슬리퍼도 처음처럼, 그리고 이부자리는 아무도 다녀간 적이 없는 침대처럼 깨끗한 채로 나의 법석을 받아 줄 준비를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요, 그것은 마법입니다. 나의 자취를 잊게 해 주는 마법입니다. 내가 남긴 후회할 만한 모든 시간은 사라지고 마치 처음처럼 시작됩니다. 일그러졌던 모든 것들이 다시 돌아가 제자리를 찾습니다. 내가 바라던 것처럼.
젊었을 적에는 빨리 나이가 들고 싶었습니다. 삼십대의 불안정이 싫었습니다. 일상의 편안함을 얻기 위하여 일상으로 포장된 삶의 줄 위에서 위태로운 발 딛기를 해야 하는 모순된 일상이 싫었습니다. 오십이 넘으면, 육십이 가까우면 그런 것들이 달라질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리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여전히 안정을 추구하며 불안정을 겁내고 불안정의 상태를 기웃거리며 안정을 희구합니다.
삶의 안정감이란 낯선 곳에서 거부당하지 않고 받아들여질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것이라고 어느 작가의 글에서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승기류를 타고 오르며 가슴으로 모든 압력을 견디어 내고, 마침내 활주로에 닿을 듯 말 듯 하는 순간의 아슬아슬함이라는 통과의식을 거쳐서 마법이 숨 쉬는 호텔에 들어서며 우리가 얻는 것이 그것 아닐까요? 우리가 탈출하였던 일상의 안정감보다 더욱 생생한 삶의 안정감. 사막에 가서도 남극에 가서도 언제나 안전하게 일상으로 귀환할 수 있다는 믿음이 가져오는 신앙 같은 안정감.
그러므로 끊임없이 안정을 찾고자 떠나는 여행 속의 불안정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불안정을 희구함은 내가 깨어 있다는 증거구나. 머물지 못함은 살아있음의 증거구나. 마음 깊은 곳에서 완벽한 안정을 찾아 떠났던 연어의 불안한 회귀와 같은 것이구나.
박지훈
건축가(Ph.D),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정림건축 동남아사업단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