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시절 방학만 되면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그 해 여름방학에는 친구 K와 설악산 일주를 한답시고 10박 11일 배낭 여행을 떠났다. 한 쪽 배낭에는 식량을 넣고 다른 한 쪽은 텐트며 야영장비를 넣고 분리를 한 후 잔머리를 굴리며 좀 가벼운 배낭을 메고 출발을 했다. 그런데 이런, 가벼워서 집어 든 배낭은 장비를 넣어둔 터라 날이 갈수록 힘이 부치고 더욱 무거워지기만 하는데 무거운 식량이 든 친구의 배낭은 날이 갈수록 식량이 사라지면서 자연히 가벼워진다. 그런 당연한 이치를 외면하고 친구에게 무거운 배낭을 넘겨준 죄에 대한 대가는 여행이 거의 끝날 때 즈음에서야 끝났다. 식량이 거의 바닥이 나니 빈 배낭만 들고 갈 수는 없는지 그제서야 장비를 받아주었다.
항상 K와 함께하면, 처음에는 내가 이익을 보는 것 같다가도 나중에는 결국 내가 손해를 본다.
그 여행도 다 끝나고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에어컨은커녕 그저 바퀴가 빠지지만 않고 달려주는 것도 고마운, 낡은 시외버스가 잠시 시골 정류장에 멈추고 숨을 고른다. 찌는 듯한 더위에 먼지 풀풀 날리는 시골길을 창문을 열고 달려온 우리의 몰골은 낡은 버스와 절묘하게 궁합이 맞았다. 더위에 목이 타는데 물은 떨어지고, 마침 차창 밖에 작은 구멍가게에 당시 한창 유행을 타던 쭈쭈바라는 얼음과자를 판다는 안내문이 있는 것을 보고 수중에 남아있는 동전을 털어 K에게 넘기며 나가서 쭈쭈바를 사오라고 했다. 내가 창 쪽에 앉아있는 터라 K가 돈을 들고 나갔다.
아, 조금만 있으면 시원한 얼음을 씹는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 있는데 K가 손에 들고 온 물건은 쭈쭈바가 아니라 삶은 옥수수였다. 아니 이 더운 날씨에 무슨 옥수수를 사오냐고 난리를 쳤지만 워낙 옥수수를 좋아하던 K라 내 타는 갈증도 외면하고 열심히 옥수수를 돌려대며 먹어댄다.
이런, 너나 실컷 먹어라. 그 후로 나는 옥수수를 안 먹는다.
이렇게 먹성도 좋고 잡기에 능해 농구를 비롯하여 탁구, 당구, 바둑 등 모든 잡기에서 우리 친구들 중에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는 K가 2년여 전에 후두암 판정을 받고 최근 수술을 받았다.
항상 한국에 갈 때마다 한 두 번씩 모여서 여전히 짓궂은 장난을 치며 친구의 관계를 확인하는 친구 4명 중에 하나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 때도 우리는 만났다. 요즘은 암으로 죽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수술만 잘되면 너는 우리보다 오래 살 거야 하며 짐짓 불안을 감춘 농담도 여유롭게 받아주던 K의 모습이 진짜 반쪽으로 변해있다. 수술은 무사히 마쳤는데 전이가 되었단다. K는 이제는 방사선 치료마저 효과가 없다며 치료를 그만두고 강릉에 있는 처가 근처에 펜션을 하나 짓고 지내면서 정리나 해야겠다며 마른 웃음을 흘린다.
거부할 수 없는 엄정한 운명이 얼굴을 불쑥 들이댄다. 너무 초라한 인간의 힘, 대책 없는 무력감이 밀려든다. 나머지 친구 셋은 서로 얼굴을 보며 할 말을 찾아보지만 어떤 얘기가 K에게 위로가 되겠는가? 말이 자꾸 적어진다. 하늘은 뻔뻔하게 뜨거운 햇살을 쏟아놓는다.
친구라는 말이 영어로는 Friend다. 이 Friend의 어원을 찾아보면 고대영어 freon이라는 단어에서 나왔는데, freon이라는 단어는 Free, 자유롭게 하다는 뜻과 to love, 사랑한다는 의미를 함께 갖고 있는 단어다. 영어의 friend는 자유와 사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사랑하지만 상대를 자유롭게 하는 관계, 그것이 바로 서양인들의 친구다. 서양 애들은 처음 만나고서도 조금만 마음이 통하는 것 같으면 friend가 되는데 망설이지 않는다. 사귄 시간에 관계없이 한눈에 꽂히기만 하면 사랑한다고 떠들어대는 것과 같이, 어느 정도 맘에 들면 바로 친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사용하는 친구(親舊)라는 단어는 친할 친(親)자와 옛 구(舊)를 쓴다. 가까운 관계로 오랫동안 사귄 상태를 의미한다. 우리는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해도 옛 구(舊)를 쓸 만큼 오랜 시간을 가까이 한 관계가 아니라면 친구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며 교분을 나눈 사람만이 우리에겐 친구다. 우리문화가 가져다 준 친구의 무게는 어느 다른 문화권보다 훨씬 무겁다.
내 친구 K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 길었다. 그리고 같이 겪은 경험도 그 누구보다 많았다.군복무를 마치고 늦은 나이에 대학입시를 함께 준비하던 늦깎이 인생이었다. 그래도 할 일은 하고, 하고픈 것도 많이 했다. 함께 외국 여행도 참 많이 다녔구먼, 베트남이나 태국은 물론이고 멀리 유럽과 아프리카까지 함께 다니던 친구였다. 아프리카에서 사파리를 떠났을 때, 맹수들이 우글거리니 차 밖으로 절대 나가지 말라던.. 정글 한 가운데서 자동차 냉각벨트가 끊어져 난감해하던 일.. 그 정글에서 코끼리에게 쫓기던 일.. 또,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려 우리가 탄 차를 가로막고 서있던, 건방지게 잘빠진 레오파드의 모습은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는다. 태국 바닷가 한 복판에서 모터보트 운전대 끈이 끊어져 오도가도 못하던 일은 어떻고? 이제는 다시 그런 기회가 오기 힘들겠지. 모두 소중하게 기억하고 간직해야 할 순간이었구나.
나에게 옥수수를 식품 명단에서 지워버리게 만든 K, 내 친구다. K는 그 누구보다 나의 진짜 모습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에 하나다. 그런 그가 서울을 떠나 강릉에서 정리할 시간이나 갖겠다며 풀어놓은 자조 섞인 넋두리가 자꾸 귓전을 맴돌며 콧등을 누른다.모든 것이 헛되고 공허하구나, 불자의 뜻 모르던 소리가 마음에서 절로 새어 나온다.
그래도 행복한 시간이 많았잖아.
네가 건강을 회복하거나 그러지 못하거나 지금까지 우리에게 좋은 시간을 함께 가지게 한 신에게 감사하자. 어차피 다 가질 수도, 누릴 수도 없는 세상에서 누구 못지않게 수많은 경험을 함께하며 환갑이 넘도록 살게 해주셨으니 감사할 일이지. 그리곤 돌아가는 시간과 순서는 신에게 맡기자.
이번 여름방학에는 내가 쭈쭈바를 사서 들고, 강릉 바닷가 근처 바닷바람이 잘 들어오는 송림아래서 널 부러져 있을 것이 분명한 너를 찾으마. 설악산까지는 못 가더라도 어디 적당한 그늘이 있는 정자를 찾아서 강원도 옥수수와 쭈쭈바를 풀어놓고 어느 것이 맛있는지 묵은 숙제를 풀어보자.
너는 여전히 두 개 다 잘 먹을 꺼야.
그래, 잘 먹으면, 정말 좋겠다.
그럼 나도…
옥수수를 먹어볼까?
작성자 : 한 영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