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3,Saturday

고전에서 길어 올린 ‘깊은 인생’- 문 워크 인문학 문 워크에 숨겨진 ‘인간미’

 

 

문 워크를 혼자 마스터했다. 걸음을 역행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 중심을 잃고 몇 번을 자빠지면서도 즐겁게 따라 해본다. 잗다란 유행보다 40여 년 전 음악과 율동에 마음을 빼앗기는 내가, 비로소 먹어대는 나이를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모양이다. 춤에 매료되는 건 어쩔 수 없다손 치더라도 아이들의 놀림을 받으며 방구석에 구부러지면서도 연습을 해대는 건 또 뭔가 싶다. 덕분에 빌리 진(Billie Jean) 가사와 노래의 유래를 알게 된 건 덤이었다. 마이클 잭슨은 참 아까운 뮤지션이다. 느닷없이 그 춤에 꽂혀 밤새 연습했다. 멋진 춤이다.

문 워크를 배우면 시도 때도 없이, 어디서나 문 워크를 구사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마트에서 카트를 밀며 매대 옆으로 숨어 보이지 않게 소심한 문 워크로 후퇴 한다든지, 회사 복도에서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흐릿한 벽면 반사 통해 모션 중에 뒷다리가 자연스럽게 밀리는지를 확인한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낭패를 보게 되는데 베트남 현지 직원에게 두어 번 걸린 적이 있다. 땅을 파고 숨고 싶은 중에도 덜 부끄럽기 위해선 천연덕스럽게 물어야 한다. “보기에 스무스한가?” 그들은 손뼉을 치며 뒤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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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어느 날, 이 춤에 서식하는 철학적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어디까지나 내 나름의 개똥철학이지만, 이 춤 문 워크, 앞으로 가듯 뒤로 간다는 역설적인 몸짓은 물리학적 재해석을 요구하는데, 법칙 너머의 인간을 갈구하는 의지가 아로새겨진 춤이라는 걸 알게 된다. 또는 앞으로 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유사이래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어리석은 인간들을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메모지에 끄적인 다음 해석에 마음이 간다.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순 없지만 붙잡을 수도 없는, 자기 의지와는 무관하게 전개되는 삶에 지쳐갈 때는 한 번쯤 뒤로 걸어보라는 위로의 춤사위!

왔던 길을 톺아가며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은 삶의 여유를 찾기 위한 필사적인 전진과도 같은 것, 봄을 기다리기 위해 겨울을 나는 위대한 동면, Great depression의 댄스적 해석이라 여긴다. 걸어온 길을 돌아볼 여유가 없는 삶,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삶은 얼마나 숨 막히는가.

2,500년 전 장자의 친구였던 양주는 말한다. ‘온전한 삶이 첫째이고 부족한 삶이 둘째며, 죽음이 그 다음이고 압박받는 삶이 제일 못하다.’ 삶의 끝, 마지막 순간까지 숨 가쁘게 살긴 싫다. 그렇게 보면 문 워크는 인간에게 ‘여유’의 가치를 역설하는 것 같다.

오토바이 위에 아크로바틱한 자세로 길게 누워 한낮, 뜨거운 햇빛에도 아랑곳없이 꿈꾸며 자는 저 그랩, 쌔옴(Xe om, 영업용 오토바이) 아저씨의 수도승과 같은 여유를 나는 언제나 배우겠는가. 시끄러운 노상 목욕탕 의자에 앉아 더치 커피보다 늦게 떨어지는 베트남 드립법으로 커피잔을 가득 채울 때까지 얘기를 나누는 그들의 여유로운 점심을 언제쯤 따라 할 수 있을까. 내가 감히 할 수 없는 여유를 곁에 두고 보는 일은 즐겁다.

그러게나 말이다. 여유라는 단어 자체가 아주 오래된 말 같다. 세상 사람들은 즐거움을 위해, 이제는 텍스트를 멀리하고 즉각적인 만족에 길들여져 영상과 손 안에 들어오는 작은 스크린에 몰두한다. 인간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텍스트에서 사진으로, 사진에서 영화로 옮아가면서 구체와 사실이 만들어내는 자극만을 신뢰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연극 또는 발레극으로 갈수록 생략은 커지고 자극은 사라지는데, 상세설명과 구체가 없더라도 상황과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는 능력이야말로 인간적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생략되고 감추어져 있지만 그 비약과 도약을 간파하는 것, 부족한 설명과 내러티브라도 행간의 은폐된 보물을 알아내는 것, 그것이 인간이 가진 아름다움이라 여긴다. 사람들아, 꼬깃꼬깃 육필로 써내려 간 어눌한 편지를 레트로라 폄하하지 마라. 40년전 춤을 이제와 자빠져가며 추는 아재를 조롱하지 마라. 삶은 결코 스크린 속에서 마감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 “참 지저분한 꿈을 꾸었군” 세계의 종말에 유피테르(Zeus의 로마/라틴어)가 몸을 옆으로 돌리고 하품을 하며 말했다는 저 말이 실은 발레리(Paul Ambroise Valéry, 프랑스의 시인)가 지어낸 세기의 여유였다. 유피테르가 신에게 말한다. “어쨌든 자네는 벼락을 만들지 못했단 말일세.” 발레리의 뜬금포에 혹여 유피테르가 문 워크를 춘다면, 신으로부터 의문의 1승을 거두는 그 장면을 상상하곤 실없이 웃는다. 여유로움을 옆에 두고도 도대체가 여유롭지 못한 ‘나’라는 인간에게 경고를 주고 싶은데 그 와중에 문 워크를 배웠다니 스스로 기특하여 그 경고는 다음으로. 그대, 어깨가 굳어지고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면, 문 워크.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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