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퉁이에 있는 점방 앞에는 호빵 통이 연탄불의 홧김에 못 이겨 김을 내뿜고 바닥 위에 따닥따닥 붙어 있는 껌딱지는 사람들의 신발에 밟혀 까맣게 멍이 들어간다. 매표소 창살 안쪽의 누나와 창살 바깥쪽의 아저씨는 유리칸막이에 뚫린 콧구멍보다 작을 것 같은 구멍의 안과 밖에서 아리랑 성냥보다 작은 표 한 장을 사이에 두고 고막이 터지듯 소리를 지르고 뒤쪽에 엿가락처럼 휘어져 있는 사람들의 줄은 지칠 대로 지쳐 고개를 내밀어 보지만 앞사람이 내민 뒤통수만 확인하고 고개를 집어넣는다.
내 어린 유학시절 부모님이 있는 고향에 가려면 이런 시외버스 정류장 풍경을 지나 소달구지보다 느린 버스를 타고 시루에서 자라지 못한 콩나물처럼 끼여서 오랫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갔던 기억이 난다.
그곳은 내가 살고 있을 때도 그곳에 있었고 내가 살지 않았을 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그곳은 그 자리에 있지만 내가 그곳을 떠나 멀리 있는 때부터 그곳은 집이 아니라 나의 고향이 되었고 그곳은 어느 날부터 내가 잘 가지 못하는 곳이 되었다.
나는 그를 떠나 바빴고 그를 떠나 알게 된 쾌감의 달콤함 때문에 동전 크기만큼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고통 또한 알게 되었지만, 그 쾌감이 주는 달콤함은 마약보다 찐하였기에 나는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그곳은 꿈 많은 나를 품을 수 없었고 꿈 많은 나를 품어주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일찍 알고 나를 놓아 주었기에 나는 일찍 떠나 버렸다. 그 곳은 나의 엄마를 만나게 해주었고 그곳의 자그마한 산에 영원히 둥지를 털고 있을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었고 나의 첫사랑 ‘윤숙’이란 여자를 알게 해주었지만 나는 그곳에 영원히 돌아 가지 않았다.
나는 강산이 아름다운 나라에서 살았다. 봄은 따뜻하고 가을은 쌀쌀하며 겨울은 겨울답게 추웠고 여름은 여름답게 더운 나라에서 매 계절마다 옷을 갈아 입으며 자랐다. 산업화의 격동기를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고 지옥 같은 입시 경쟁에서도 나를 버티게 했으며 취업난의 한 중앙을 헤치며 살아왔다. 민주화 현장이 청춘 속에 이었기에 모든 학생이 돌멩이를 들 때 나 또한 보도블록을 높이 들어 깨면서 시대의 흐름에 보조를 맞추며 자랐고 인생의 전부가 친구인 시절에는 그들과 밤새도록 밤이 다 새도록 막걸리를 마셨고 어깨동무로 시내를 소리쳐 활보하다가 파출소 나무의자에서 돈도 내지 않고 잠을 자 본 적도 있었다.
3박 4일 동안 잠 안 자고 쉴새 없이 이야기해도 모자라는 군바리 생활을 대한민국 5대 장성 중의 하나인 병장을 달고 전역하였기에 젊은 청춘을 젊은 청춘처럼 살아왔으며 짝을 찾아 종족 번식의 의무를 해야 할 시기에는 하루에 세 탕 씩도 마다하지 않고 미팅 전선에 투입된 적이 있었기에 나를 쏙 빼닮은 아들 또한 생산 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성장했고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내가 태어난 나라에서 취업하고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나는 대한민국 헌법에서 규정한 전형적인 대한민국 국민이며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서 40년을 넘게 살아왔었다.
그렇지만 내 청춘이 묻어 있고 내 아들의 할아버지가 지금도 누워 계시는 나의 고향이 있는 대한민국을 6년 전 외롭게 떠나왔고 이제는 그곳을 떠나 올 때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 한다. 아마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내가 살아가기에는 내가 가진 경쟁력을 더 이상 높이 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고 내가 앞으로 살아있을 긴 긴 세월에 내 경쟁력을 나의 조국은 더 이상은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 했을 수도 있고 나의 조국이 더 이상 나의 미래를 책임져 주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 했기에 나는 그를 떠나기로 맘 먹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 또한 아직도 남아있는 내 꿈을 만족시켜 주지 못할 것을 알았기에 김해 공항 출국장을 쉽게 열어 주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를 떠나온 6년 동안 나는 자주 자주 그를 찾았다. 때로는 그리움 대문에 때로는 비즈니스를 핑계삼아 때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떤선엿 공항 2층에서 그를 찾는 비행기를 타고 그에게 돌아 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내가 어린 시절 고향을 떠나와 사람냄새 나는 버스 정류장을 통하여 명절이면 한번씩 고향을 방문했듯이 40이 넘은 나이에 고국을 떠나와 땀냄새 나는 떤선엿 공항을 지나 이제는 고국을 한번씩 여행하는 여행객이 되었다.
나는 오래 전 떤선엿 공항을 출국하여 김해공항을 통하여 귀국했지만 그를 떠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언제부턴가 떤선엿 공항을 통하여 입국 할 때 귀국이란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언제부턴가 고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후 내가 사는 푸미흥 아파트에 짐을 풀 때 ‘집이 최고다’ 란 말을 이곳 호찌민에서 하게 되었고 언제부턴가 이곳에서 사귄 지인들을 칭할 때 친구, 선배님이란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고 한국에 오래된 친구를 칭할 때는 ‘한국에 있는 친구, 한국에 있는 선배’ 란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나는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호찌민에 살고 있는 호찌민 시민이 되었다.”
젊은 시절 누구나와 같이 나도 와이프에게 ‘늙으면 돈 많이 벌어 고향에 새집을 짖고 텃밭을 갈구며 살자’라고 한 말들이 생각 난다. 하지만 도시가 주는 쾌감 때문에 내 아주 늙을 때 쯤에는 고향에 대한 낭만의 찌꺼러기도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아 다시는 고향에서 살아 보지 못할 것이란 생각을 했었다.
내 6년 전 호찌민의 첫 번째 하숙집 아저씨와 술을 마시며 ‘돈 많이 벌면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돌아가 노년을 보내겠다’ 라고 한 말들이 기억이 난다. 하지만 호찌민이 주는 마력 같은 쾌감도 일부 있겠지만 첫 번째 하숙집에서 장담한 만큼의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은 느낌도 없기 때문에 조국에서 내 노년의 삶은 꿈이 될 가능성이 많을 것 같다.
특히나 난 언제부턴가 나의 조국 대한민국을 방문하고도 출국이란 단어를 김해 공항에서 사용하고 귀국이란 단어를 떤선엿 공항에 도착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집이 최고다’란 단어를 푸미흥에 있는 아파트에서 여행가방을 풀면서 사용하고 있기에 내가 돌아가 살지 못할 고향처럼 내가 떠난 조국에서 다시는 살아보지 못할 것 같아 슬퍼해 본적이 있는 것 같다.
작성자 : 최 은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