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에, 쌀국수를 아내와 나눠 먹었다. 동네에 사는 베트남 아주머니가 말없이 덩그러니 놓고 가셨단다. 어린 시절, 집 앞 현관에 누가 놓고 갔는지도 모를 대파 더미, 감자 봉다리를 무시로 봤더랬다. 철마다 나는 야채며 갖가지 음식들이 현관 손잡이에 대롱대롱 걸려있거나, 문 앞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모습을 늘 목격했었다. 어머니는 대번에 누가 놓고 가셨는지 아셨고 ‘아이고, 이 아지매가여’ 혼잣말을 하시며 받은 것보다 더 큰 다른 야채 뭉치들을 내게 주시며 아무개 집 앞에 놓고 오라 하시곤 했다. 쌀국수를 먹으며 왜 그때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말없이 놓고 갔다는 사실에 추억이 소환된 모양이다. 그래선지 어릴 적 인간미 넘쳤던 시절과 지금 먹는 쌀국수가 기묘하게 오버랩 되며 같은 질감이 된다. 마침내 나는 쌀국수에 관해 쓰기로 한다. 방금 먹었던 쌀국수는 기가 막혔다.
흔히 쌀국수를 베트남어로 퍼(pho)라 한다. 박지훈 선생의 저작, ‘몽선생의 서공잡기’에 따르면 퍼는 베트남 북부 지방에서 유래했고 ‘퍼’라는 어원은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는데 프랑스군의 식사를 뜻하는 포토프(Pot-au-Feu, 뜨거운 그릇)에서 기원했다고 한다. 퍼는 한국어와도 연결되어서 퍼마시다, 퍼먹다, 퍼주다 등에서 발견되는 한국어 동사’푸다’의 어간이기도 하다. pho는 베트남의 서민 음식이기도 하거니와, 한국어 어간 ‘퍼’도 꼭 그와 같이 결코 귀족적일 수 없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무렇게’, ‘질서없이’ 또는 ‘예의 없는’이라는 의미로, 호방하고 자유로운 서민적 가치가 그 안에 녹아 있는 것이다. ‘퍼’는 또한 부사에 가까운 동사 어간이기도 해서 마시다, 먹다, 주다라는 동사에 ‘퍼’가 없어도 홀로 존재할 수 있다. 그것은 마치 칼국수, 쌀국수, 잔치국수처럼 재료는 달라도 각각의 고유한 국수로 존재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붙었다 떨어진다. 젓가락으로 들면 미끄러지며 다시 떨어지는 pho와 닮았다.
과거 한국에서는 쌀을 국수로 만들어 먹진 않았던 것 같다. 베트남과 같이 이모작, 삼모작까지 가능한 대규모 곡창지대가 없을뿐더러 역사의 곡절마다 생채기처럼 그어진 모진 수탈 때문이기도 하다. 때를 굶는 지경에 쌀국수를 만들기 위해 감당해야 하는 30%에 이르는 쌀 손실율도 감당하기 어려웠을 테다. 거짓을 1g 보태면, 베트남에선 모내기와 동시에 맺히는 벼 이삭의 기쁨이 그 손실을 감당하는 풍요로 이어졌을 텐데, 그러고보면 쌀국수는 오랜 기간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배고픔이라는 트라우마를 가진 질곡의 한국적 선망이 국가적으로 투사된 음식이기도 하겠다. 특유의 감칠맛을 내는 국산 라면이 세계인의 입맛을 훔치며 쌀국수에 대한 열등을 넘어 보려 하지만, 서두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의 손에서 손으로 이웃과 이웃이 나눠 먹기엔 라면은 어딘가 부족해 보인다. 내 보기에 라면이 5G 초고속 인터넷망이라면 쌀국수는 여전히 느린 2G 언저리쯤 될 텐데, 그것이 어딘가 모르게, 쌀을 국수면으로 만들기 위해 필연적인 손실을 감당하는 풍요와 견딤의 역설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인터넷이 느리고, 차 가진 사람이 많이 없어도, 빨리 가려 하지 않고, 옆집 음치 아저씨의 고함 같은 노랫소리를 즐겁게 들어줄 줄 아는 이곳이 바로 쌀국수의 종주국이자 쌀국수적 풍모를 가진 베트남이라는 사실이 새삼 느껴지는 저녁이다.
이제 거리로 나서 보자. 쌀국수집에서 시켜 먹는 쌀국수는 희멀건 당면 같은 인스턴트 쌀국수가 결코 따라올 수 없는 묵직함이 있다. 쌀국수는 그 묵직함으로 대규모 라면의 공습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아 베트남 전역에 쌀국수집을 떠받친다. 베트남뿐이던가, 전 세계 쌀국수는 아마 인스턴트의 경박함과 힘겹게 싸우고 있는지 모른다. 가벼운 그리고 간편함의 세계에서 태어난 라면과 같은 인스턴트 음식은 태생적으로 얹혀진 약간의 경박함을 지울 수 없다. 그것은 오랜 시간 국물을 고아 만드는 일과, 스프를 톡 털어 넣고 3분 안에 만들어 먹는 차이에서 온다. 또, 아무나 만들 수 없는 것과 누구나 만들 수 있는 것들의 차이다. 거리에 쌀국수집에는 그 집마다 고유한 맛이 있어서 같은 맛이 하나도 없는 각양각색의 쌀국수 맛은 누가 끓여도 같은 맛을 내는 라면과는 확연하게 다르다.
시야를 사회 전반으로 넓히자면, 모든 음식에 넣어도 감칠맛을 낸다는 화학 조미료식 스프가 내는 라면의 국물은, 공간의 벽을 타고 국물의 질감으로 내려온 아파트 같은 것이다. 범용적이고 편하지만 모두가 똑 같아서 내 것 같지 않은 아파트 말이다. 그것은 대도시 시시한 삶을 압축하는 공간이다. 똑 같은 공간 속에서, 거의 비슷한 월급으로, 거의 비슷한 삶을 유지하면서도, 서로는 엄격하게 단절된 채 오로지 겉으로 보이는 평수와 벌이로 서로를 비교하는 데 혈안인 삶. 그것은 먹는 시간도 아껴가며 살아내야 하는 야만 안에서 끼니 해결이라는 유일한 명제만 남긴다. 서로의 눈을 지그시 마주보며 먹어야 할 식사가 ‘떼우는’ 것으로 졸아든 라면 같은 것으로 바뀌고, 오로지 배를 채우는 데 급급한 경박한 패스트푸드 같은 것으로 대체된다. 라면, 아파트, 기성복, 월급쟁이…평준화된 것들로 인해 우리의 사고는 획일적이고 작아진다. 인간의 자기 축소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실, 라면도 좋아한다. 라면을 좋아하지만, 오늘의 주인공 쌀국수를 위해 악역에 캐스팅한다. 라면은 교환가치를 상징한다. 현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사용가치에 앞서는 교환가치 속에 잠재해 있다. 말하자면 어떤 것이 무엇에 쓰이느냐가 아니라 얼마만큼의 값어치를 가지느냐에 그 가치가 결정되는데 이 ‘값어치’의 세계는 속도와 간편, 편리와 범용이 결정하는 세계다. 이러한 세계에서 인간은 그 특유의 복잡함을 멸균해야 하고 알록달록한 상상의 사유를 접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교환가치의 세계에서는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올라온 아버지는 세상에 여전히 정직했고 ‘정직한 만큼 아버지는 무능했다’는 어느 소설의 문장처럼 사용가치의 세계에서 정직한 것은 교환가치의 세계에서는 무능한 것이 되고 만다. 정직하게 고아낸 사골 국물은 3분 스프가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느려터진 무능이다. 마찬가지로 결코 무능하지 않은 인간이 교환가치의 세계에 내던져져 무능의 낙인을 감당하며 살고 있는 것이 이 세계다. 그 안에서 이미 삶의 의미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는 역설적으로 의미로 넘쳐나는 세계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찾기 위해 무의미와 싸워야 하는 것이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쌀국수를 먹어보자. 얼마전 동네 베트남 아저씨로부터 알게 된 마을 길가의 쌀국수집이 있다. 특별할 것 없는 외관에 간판은 ‘분보 후에, PHO’를 큼지막하게 써 놓았다. 같은 마을에서 어릴 때부터 나고 자라 40여년을 친구로 지낸 이들의 진한 우정만큼이나 진국의 쌀국수가 식탁 위에 올라왔다. 이 집의 인심은 남달라서 산처럼 쌓인 국수에 갖은 야채도 푸짐하다. 어디서부터 먹어야 하나, 우선 슴슴한 잎사귀(민트 잎 같기도, 자스민 잎 같기도 하지만 정확한 이름은 알 수 없다. 알려주시라)를 뚝뚝 떼내, 생숙주 또는 삶은 숙주 위로 던져 휘휘 젓고 다시 위아래로 올렸다 내렸다 두어 번을 한다. 어른 엄지 만한 잎사귀가 완전히 젖기 전에 그러니까 잎사귀가 쌀국수 국물과 그 표면에서 여전히 장력과 싸울 때 끊어질까 말까한 면발을 젓가락으로 함께 잡아 소중하게 들어올려 같이 먹는다. 아무렇게나 면발을 잡아서 앞니로 툭툭 끊어 먹는 라면과는 달리, 끊어 먹으면 낭패를 보는 것이 쌀국수다. 끊어진 잗다란 면이 조금은 탁한 국물에 시스루 드레스처럼 하늘거리며 저 아래로 숨어 버리기 때문인데 몇 번이고 젓가락으로 집으려 하지만 다시 끊어지기 일쑤다. 그때는 숟가락을 동원해 그릇 밑바닥에 깔린 조각난 면을 저인망으로 천천히 훑어야 한다. 가출한 아들이 집으로 끌려오듯 젓가락을 요리조리 피하며 도망간 면발이 숟가락 가득, 만선이다. 그러나, 그때, 가득 채워진 숟가락에 왠지 모를 공허함이 솟아오른다. 푸짐했던 쌀국수 한 그릇으로 이제 배는 고프지 않지만, 그렇다고 부르지도 않다. 한 그릇 더 먹는다면 부담스럽고 그만 먹자니 아쉽다. 아, 그때 쌀국수는 말한다. 모자람을 알아라. 지족을 모르는 인간에게 욕심이라는 두 글자를 큼지막하게 남은 국물에 반사하며 말하는 것 같다.
내일, 점심은 홀로 말없이 쌀국수를 먹어볼 작정이다. 홀로 쌀국수를 먹으며,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나에 관해 생각하며 열심히 젓가락질을 해 볼 작정이다. 아니다, 아무 생각 없이 먹어야겠다. 그래서, 이 세계의 무의미에 대해 쌀국수 한 그릇으로 대항해 볼 작정이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