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1858년~1945년 프랑스, 일본과의 투쟁 그리고 민족해방

중부지방의 후에(HUẾ)를 도읍으로 정한 윙왕조(NGUYỄN: 1802-1945)가 통치하고 있던 이 시기에는 프랑스에 이어 일본의 침략으로 1887년에서 1945년까지 혹독한 식민지배 상황이었다. 이때가 이전의 북속시기와 다른 점은 당시 침략세력이 북쪽의 세력이 아니라 바다를 넘어온 세력(프랑스, 일본)이라는 점이며, 엄연히 베트남 왕조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에서 프랑스와 일본에 의해 식민지 착취가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이같은 상황에서 윙신삭(NGUYỄN SINH SẮC: 1862-1929) 같은 이들은 스스로 관직을 버리면서 당시의 관리들을 ‘노예 중의 노예’라 자탄하고 유랑지식인의 길을 택하기도 하며, 심지어 오늘날에도 일부 사학자들은 윙왕조를 ‘프랑스에 기생하여 민중을 착취한 왕조’라 평가하기도 한다.

지난 호에 살펴본 대로 윙안자롱(Nguyễn Ánh Gia Long)은 프랑스군의 도움을 받아 따이선의 난을 평정하고 1802년 왕좌에 올라 윙왕조(1802-1945)를 세웠다. 하지만 윙왕조의 초기 왕들인 쟈롱(Gia Long)과 민망(Minh Mạng)은 일단 프랑스의 도움으로 나라를 얻었지만 천주교(당시 신자 30만)에 대해서는 비호의적이었다. 결국 민망 황제시대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하기도 했는데 이런 이유로 프랑스 내부에서는 베트남을 정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었다.
한편 티우찌(Thiệu Trị) 황제시절에는 다시 우호적인 관계가 시작되는가 싶더니 결국 1847년 다낭 항에서 베트남과 프랑스배의 충돌로 사태가 격화되기 시작했고, 뜨득(Tự Đức) 황제가 쇄국정책을 더욱 굳게 하자 마침내 나폴레옹 3세는 1858년 프랑스 국서를 거부했다는 명목으로 다낭항을 공격한다.

I. 베트남,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복속
프랑스는 제국주의 등장으로 인한 식민지 건설을 위해 1858년~1884년 사이 계속된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베트남과 프랑스합병을 이루게 된다. 베트남 사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프랑스군이 침략하자,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와의 타협을 주장하는 파와 저항을 고수하는 파로 나누어졌다. 왕과 고위관리들은 프랑스군의 현대식 무기를 두려워하는가 하면, 베트남인들은 먼 곳에서 찾아온 프랑스의 방문목적이 자신들의 땅을 지배하는 데 있기보다는 교역에 있다고 그릇된 이해를 하고 있었다.
또한, 당시 왕은 내부적 혼란을 충분히 겪고 있었기에 외세의 공격에 대항할 의지도, 여력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여건 하에서 왕과 관리들은 화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는 우선적으로 왕조를 압박해 뜨득황제의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1885년, 베트남 전역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복속시킨 후, 그 여세를 몰아 담배, 인디고, 차, 커피의 수출을 촉진할 목적으로 1940년 초까지 대규모 플랜테이션 경제를 발전시켜 나갔다.

복/속/과/정
제1차 사이공 조약 베트남이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 인정, 남동부 3성과 꼰 론(Côn Lôn)섬 할양, 다 낭(Đà Nẵng)을 비롯한 세 항구를 프랑스와 스페인에게 개항(1862년)

제2차 사이공조약 남부 6성에 대한 프랑스의 주권인정, 통상을 위해 하노이의 홍(Hồng)강을 개방, 하노이(Hà Nội)와 하이퐁(Hải Phòng) 등에 프랑스 영사주재,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왕래 인정(1874년)

제1차 훼(Huế) 아르망 조약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전락(1883년)

II. 베트남 애국주의자들의 투쟁
베트남의 애국주의자들은 줄곳 해방을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그러한 노력 가운데 판보이쩌우(Phan Bội Châu)가 이끌었던 동유(Đông Du) 운동을 들 수 있으며 ‘판쭈찐(Phan Châu Trinh)’과 ‘동경의숙 단체(Đông Kinh Nghĩa Thục)’ 등이 있다.

1. 중부
타이 피엔(Thaí Phiên)과 쩐 까오 반(Trần Cao Vân) 등 여러 학자들과 관리들의 지지를 받고 7살의 나이로 1907년 즉위한 주이떤(Duy Tân) 왕에 의한 반란이었다. 왕이 기반으로 삼았던 세력은 프랑스로 출발하기 위해 후 에(Huế)에 모인 수천의 군사들이었다.
당시 반란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가 1916년 5월 3일에 나타나기로 되어 있었으나 불행하게도 비밀이 누설되어 출발 직전 프랑스군에 의해 무장해제 당했으며, 왕은 수도에서 탈출을 시도했으나 결국 붙잡혀 섬으로 유배되고 여러 곳에 분산되어 있던 군대들도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2. 남부
이 지역에서는 비밀조직의 결성으로 20세기 초부터 활발한 독립활동이 진행되었다. 이들 중 가장 중요한 조직은 티엔디어 호이(Thiên Địa Hội, 천지회)였는데 이와 관련된 운동이 사이공(Saigon) 주변 여러 지역에까지 퍼져있었다. 한편 이러한 조직들은 대개 겉으로는 정치, 종교 단체의 양상을 띠고 있었는데, 주요 활동은 배신자를 처단하는 것이었다. 특히 이러한 비밀조직 활동의 일환으로 승려 출신의 판씩롱(Phan Xích Long)이 1913년 항쟁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하얀 의복과 터번을 착용하고, 미개한 무기로 도시들을 공격하였다. 하지만 주도자였던 판씩롱(Phan Xich Long)은 결국 프랑스군에 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3. 북부
이외에도 베트남의 광복 (Quang Phuc)운동은 베트남 내의 민족주의자들과 해외에서 훈련된 혁명군의 합동작전을 통해 하노이를 구하기 위한 계획이었다. 하지만 비밀작전이 누설됨에 따라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고, 1917년 8월 31일, 통낑(Tonkin)에서는 한 때 게릴라 운동 (Hòang Hoa Thám)의 당원이었던 찐반깐(Trịnh Văn Cấn)과 광복(Quang Phục) 운동의 일원이었던 르엉 응옥 꾸옌(Lương Ngọc Quyến) 의 지휘하에 타이응웬(Thái Nguyên) 주둔지의 군사들이 반란을 시도했다.

많은 군사들이 참가하여 프랑스 장군을 죽이고, 다량의 무기와 군수품을 확보한다. 하지만 9월 4일 프랑스군은 다시 이 지역을 빼앗고 반란군들을 내쫓았다. 한편 호찌민은 1930년에 베트남 공산당(당시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명명)을 창립하였고, 그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베트남 독립투쟁을 주도하였다. 베트남 사가들은 이 같은 상황에 대해 “프랑스가 오랫동안 전쟁을 치르는 내내 베트남을 통치할 수 있었던 이유는 베트남 독립 운동의 결속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III. 일본침공과 베트남제국 수립
이후 제 2차 세계 대전이 벌어져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무릎을 꿇자 장 드쿠 (Jean Decoux)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정부는 일본군의 베트남 주둔을 허용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1941년) 1945년 3월에 일본은 마침내 드쿠 정부를 전복시키고 그의 군대 및 관리 모두를 감금한 후, 대동아공영권의 기치를 내세워 자신의 꼭두각시 정부로 만들어 버린다.

1945년 3월 일본의 지원을 받는 바오다이 황제가 베트남제국(꼭두각시 정부)의 독립을 선포하고 안남과 통킹을 프랑스 보호구역으로 내준 1883년 조약을 폐지했던 것이다. 바로 이 시기 일본에 의한 미곡수탈과 산업용 작물 생산강요, 홍수, 제방 파손등으로 인해 북부에 심각한 기근이 발생했고, 그 결과 북부 베트남 1천만 인구 중 2백만 명이 기아로 사망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IV. 프랑스 재침공과 북월맹 탄생
하지만 2차 대전의 패배로 일본과 베트남제국이 1945년 8월 무너지자, 일본은 비엣민에게 행정권을 넘기고 꼭두각시 황제인 바오다이도 즉각 퇴위하고 만다. 당시 비엣민은 하노이를 점령, 임시정부를 선언했고, 연이어 9월 2일에는 독립을 주장했다.
하지만 포츠담 회담의 결과에 따라 베트남은 중국과 영국에 의해 다시 분할 점령의 운명에 놓이게 된다. 이 기회를 틈타 1945년 프랑스 임시정부는 프랑스 극동 원정군을 보내 베트남 독립운동을 진압한 후, 바오다이 황제를 다시 내세워 사이공에 괴뢰정권인 베트남국(45년 3월~8월)을 수립하게 되며, 이에 맞서 비엣민은 하노이에 동남아시아 최초의 공산주의 나라인 베트남민주공화국(월맹, 북베트남)을 세운다.

다음 호에는 베트남과 프랑스의 최후 항전인 딩빙푸 전투가 이어집니다.

시대별로 살펴보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전쟁들

● 흥브응 Hùng Vương 과 안증왕시대 ( ~ 938년)
진나라 등 역대 중국왕조와의 항쟁기 (기원전 2, 3세기)
비엣 떤 (Việt Tần ) 전투
하이바쯩 Hai Bà Trưng 봉기
바찌우 Bà Triệu 봉기
응오 전투 밧당 Bạch Đằng 강에서
● 중세 봉건시대 (939년~1858년)
송나라와의 1차 항쟁 (981년)
송나라와의 2차 항쟁 (l075~1077년)
몽고-원나라와의1차항쟁 (1258년)
원나라와의 2차 항쟁 (1285년)
원나라와의 3차 항쟁 (1287~1288년) 밧당
Bạch Đằng 전투 (1288년 4월 9일)
명나라와의 항쟁 (1406~1427년)
씸 (Xiêm; 태국)과의 항쟁 (1784~1785년)
만탄(Man Thanh :청) 과의 전쟁
프랑스.일본과의 투쟁 (1858 ~ 1945년)

● 1945~ 현재 (근, 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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