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게 힘들어요, 한가한 게 힘들어요?
요즘 직장이 있던 베트남을 떠나 한국에서 지낸지가 2개월이 넘어가니 자꾸 창 밖을 기웃거리는 횟수가 늘어갑니다. 아직은 베트남으로 돌아 갈 입장이 아니라, 마음을 내려놓고 지내고자 하는데 평생을 일과 함께 뒹굴며 지내온 사람이 이리 손 놓고 하루 하루를 보내자니 뭔가 불편함을 느끼는 것이죠.
돌아보면, 그동안 너무 일과 자신을 동일시 했다는 것은 느낍니다. 그런 사람이 일과 떨어져 한가한 시간을 보내려니 뭔가 상실감이 생기는 거죠. 하지만 현실은 냉정합니다. 특별히 제가 있어야 돌아가는 일이 아니니, 제가 없어도 일은 뻔뻔하게 돌아갑니다.
어쩌면 그런 사실이 슬픈 것이지요. 내가 없어도 잘 돌아가는 세상, 존재의 무게가 가벼워집니다. 곧 나를 잊고, 내 자리를 지우고, 결국에는 내가 존재했던 기억마저 사라질테죠.
하지만 이런 감정을 유발하는, 일 없는 한가함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허균의 <한정록>에서는 ‘ 조물주는 공명과 부귀를 아끼지 않는데 한가한 것만은 아낀다’고 합니다. 한가함이야 말로 조물주의 선물이란 생각하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지냅니다.
요즘, 그런대로 평이하게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비록 노모를 모시느라 요양일기를 마음에 기록하는 형편이긴 하지만, 널널하게 남아도는 시간에 새로운 책도 뒤져보고, 세상 소식은 유튜브를 통해 듣고, 아침에는 동아일보와 함께 들어오는 서울경제신문을 통해 세상과 끈을 닿고 있으니 별로 소외감이 들만한 형편은 아닌데, 그래도 마음에 평화는 오지 않습니다.
마치 평화가 밖에서 찾아오듯이 말하네요. 이런 생각을 하니 평생 평화를 찾지 못하나 봅니다.
저녁엔 산책을 갑니다. 식사를 마치고 어둠이 덮이면, 잊기 전에 해야 할 무언가처럼 양말을 싣고 나갈 채비를 합니다. 매일은 아니지만 이틀에 한번 꼴로 나갑니다.
집사람이 같이 나갈 까 하는데, ‘아니, 혼자가 좋아’ 하며 혼자 나갑니다. 동네를 한 바퀴 돕니다. 바람이 싸늘할 수록 걷는 맛이 납니다. 두툼한 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쓰고 가죽 장갑을 끼고 마지막에 마스크까지 챙기면 외부로 드러나는 눈자위만 외출을 한 듯하고, 나머지 몸은 아직도 이불 속에서 보호받고 있는 느낌입니다.
자신과 대화를 하며 걷습니다. 요즘 어떠냐고 묻고, 괜찮아 하고 대답합니다.
또 걸으며 기도를 합니다. 엄마의 건강을 지켜달라고, 편하게 지내시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올리죠. 엄마는 생각만 해도 콧등이 멍해집니다. 하나님과의 대화가 할수록 편해집니다.
거리가 눈에 보입니다. 동네에 터줏대감처럼 자리하고 있는 카페, 미용실, 안경점, 빵집 등을 만납니다. 떡집 앞을 지날 때 엄마가 좋아하시던 떡이 뭐였지 생각합니다. 텅빈 홀을 밝히는 휑한 불빛이 미안한 식당을 만나면 언젠가 한번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겨납니다.
한참을 걷다가 어둠 속에 외롭게 서있는 버스정류장을 만나면 송구하듯이 빈 벤치에 앉아 엉덩이를 녹입니다. 요즘 한국의 버스 정류장에 있는 벤치에는 난방장치를 해 놓았는지 앉으면 따뜻해집니다. 따뜻한 엉덩이를 즐기며 어둠에 찬 거리를 바라봅니다. 희미한 가로등불이 겨울바람에 흔들리며 인적없는 거리에 기척을 만들어냅니다. 가끔 버스가 부르듯이 다가와 타겠냐고 묻듯이 섭니다. 모른 척하고 있으면, 공연히 섰다는 듯이 평소보다 요란한 엔진음을 남기고 떠납니다. 저도 엉덩이를 털고 버스가 떠난 자리를 따라 걷습니다.
아파트 오르막 길을 오르면 마스크 안에는 가쁜 숨이 만들어낸 물기가 모입니다. 허리가 뻐근한 것은 어제도 마찬가지였는데 좋아질 기미가 안 보입니다. 나이 탓이려니 하렵니다.
집에 다 오니, 오늘 무슨 글을 쓸 것인지 생각하지 못한 것이 떠오릅니다.
늘 이렇게 뭔가 빼먹고 사는 게 일상입니다.
마스크와 웃옷을 벗고 소파에 앉으니 “손 딱고 오세요” 마나님의 엄명.
이놈의 오미크론이 평화를 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