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티비를 보다가 예쁜 혼혈인이 나온 것을 보고 “참 예쁘다, ‘아이노꼬’라 그런가?” 하는 말을 무심코 내 뱉았는데, 순간 주위에서 그 말을 듣던 처제들이 놀라서 배꼽을 잡는다. 아이노꼬가 뭐예요. 믹스지, 우리말로는 혼혈아다. 어려서 듣던 일본어에 대한 기억의 잔재가 남아 순간 튀어나온 것이다.
참으로 끈질긴 일본의 잔재다. 이제 그런 잔재의 영향을 받은 우리 세대가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그 흔적도 사라질 것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가만히 보니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 형제는 7 남매다. 그 중에 광복 이전에 태어난 큰 형과 누님이 있는데. 큰 형은 영일, 누님은 봉자였다. 영일이란 이름은 일본식으로 장남에게 주로 붙이는 이름이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자로 끝나는 일본식 이름을 지은 것이다. 해방 후 모두 멋진 한국 이름으로 개명을 했지만 아직도 가끔 촌스러워 보이는 봉자라는 이름으로 누님을 놀려주곤 한다.
이렇게 이름에 붙은 일본의 잔재는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이름에 그대로 남아있다.
그뿐이더냐, 수많은 지명들도 그렇다. 특히 외국어로 된 나라 이름이나 외국어가 변형되어 우리말처럼 사용되는 단어는 거의 일본식이다.
베트남이 대표적이다. 베트남인에게 베트남이라는 말을 하면 알아듣는 이가 하나도 없다. 지금이야 한국인들이 많아서 대부분 ‘한국애들은 우리나라를 베트남이라고 부르는구나’ 정도로 인지하고 받아주는 것이지, 이런 발음을 처음 듣는 베트남인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한다. 베트남이 아니다. 비엣남, 혹은 좀더 분명히 V 발음을 살리려면 븨엣남이 되어야 한다.
그 외에서 우리가 쓰는 영어에도 일본식 엉터리 영어가 넘친다.
일본식 영어 발음이 원어와 비슷하지도 않은 이유는 일본어의 미천함 때문이다. 고작 기백 개 발음도 하지 못하는 일본어로 영어를 읽으려 하니 그런 생뚱맞은 발음이 나온 것이다. 한글로는 원어와 차이 없이 표기할 수 있는데 왜 일본식 발음으로 된 표기를 고집하려 하는가? 이런 것을 하나씩 고쳐 나가는 것이 일본의 잔재를 씻는 일이다.
또한, 아직도 일본의 한국지배가, 정당하지는 않아도 우리가 힘이 없어 당한 것이고 그런 지배로 인해 우리가 발전한 것은 사실이라며 그들을 옹호하는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고 적지 않게 놀랐다. 이런 사고가 어디서 나왔는가 생각해 보았다. 아마도 자신과 우리 민족의 입장을 분리한 탓으로 보인다. 즉 우리 역사를 객관화시킨 것이다. 그들은 그런 역사의 당사자에서 벗어나 타자의 입장에 선 것이다.
한민족에게 한국의 역사는 남의 일이 아니다. 내 민족, 나의 역사다. 내가, 내 가족이 일본 침략자들에게 말과 문화를 빼앗기고 이름마저 잃으며 때로는 이유 없는 죽임을 당했는데도 그 침략자를 정당하다고 말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인은 한국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이다. 그 역사의 당사자로서 우리의 역사를 대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저 역사를 공부할 뿐이지 그것에서 배우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허깨비 민족으로 전락할 뿐이다.
한국에 살면서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국적을 버리고 외국적을 받아 조국을 버리는 이들이 있다. 이번 베이징 동계 올림픽에서 그 얼굴들이 당당히 등장하며 옛 동료들 앞에서 새로운 조국을 소리 높여 응원한다. 과연 그런다고 그들이 한국인라는 원본을 벗을 수 있을 까?
오호 통재라! 그들의 앞날이 어찌 될 것인지 보이지 않는가?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다.
아무리 진저리 치게 외면하고 싶은 조국일지라도, 우리는 그 모자람이나, 그 우월함이나, 그 슬픈 역사 모두를 자신의 운명처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굴레를 지닌 한민족이다.
나를 사랑하듯이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의 아픔을 내 것으로 보듬어야 할 대한국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