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쭝 황제 청나라 대군 30만을 섬멸하다!
천재적인 전략가 윙후에(Nguyễn Huệ;광쭝 황제)가 이끄는 따이성(Tây Sơn) 군대는 전광석화 같은 공격으로 단 하루 만에 응옥호이(Ngọc Hồi), 동다(Đống Đa) 등에서 청나라 대군 30만 명을 파죽지세로 무너뜨렸다. 이번 호에는 베트남 사가들이 베트남 역사상 가장 영예롭고 자랑스런 전투로 평가하는 광쭝 황제와 청나라 간의 전쟁을 소개한다.
청나라 30만 대군 탕롱으로 진격하다!
1788년 11월, 청나라의 깡롱(Càn Long; 건륭)제는 이 기회를 놓칠세라 똥시응이(Tôn Sĩ Nghị-손사의;孫士毅)와 함께 30만 대군을 보낸다. 당시 그가 이끄는 본대는 Lạng Sơn으로, 섬응이동(Sầm Nghi Đống) 장군의 부대는 까오방(Cao Bằng), 오다이낀(Ô Đại Kinh) 장군의 부대는 광닌(Quảng Ninh)을 지나 속속들이 탕롱(Thăng Long)을 향해 진격한다. 여기에 민족의 반역자 레찌우똥(Lê Chiêu Thống) 황제도 청나라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여 그 기세가 엄청났다. 건륭은 또한 지난해에 베트남이 대 흉년을 겪였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군량보급이 어려울 것을 염려하여 운남과 광서의 양로에 70개가 넘는 역참을 설치하여 대비를 철저히 했다. 게다가 베트남 강을 건너는 작전이 어려울 것으로 여겨, 병사들로 하여금 일부러 적의 시선을 끌면서 상류와 하류에서 추가병력이 강을 넘도록 지시했다.
한편 당시 박하(Bắc Hà) 지역에서 주둔 중인 따이성 군대는 숫자적으로 열세인 데다 내부에서도 봉건잔재들이 지속적인 항쟁을 벌여 위기감이 감돌고 있었다. 청의 작전대로 초반에는 손사의 대장군이 주력부대와 대포를 이용해 적의 시선을 교란하는 사이, 청나라의 정예병이 상류에서 강을 건너 적을 뒤에서부터 공격, 따이성 군은 양쪽에서 공격받고 사상자 수천여명을 내면서 대패했다. 건륭은 이 승리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
청군, 따이성 군의 전략에 휘말리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는 줄로만 알았단 전황이 갑자기 기묘해졌다. 온 조정이 기뻐하고 있던 바로 그 순간, 청군은 난데없이 대패하여 점령한 지역을 모두 토해내야 할 지경에 몰린것이다. 손사의는 “윙군을 물리쳤다”고 보고했는데, 그건 따이성 군이 일부러 후퇴했다가 역습을 가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손사의는 적의 의도를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었으며, 사실상 따이성 군대는 병력손실이 매우 경미했다. 이 무렵 팔순이 다 되었던 건륭은 사태를 눈치채고, 지금 물러나지 않으면 큰일이 나겠다고 여겨 서둘러 퇴각을 명했다. 게다가 딱히 레찌우똥(여유기)를 위해 청군이 많은 피를 흘려줄 이유도 없었다. 이때 청군이 군을돌렸다면, 비록 실질적인 성과는 없더라도 한번 베트남을 혼내준 후 큰 피해 없이 물러났기에, 건륭 자신에게나 청나라 군대에게나 체면을 차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스럽게도 손사의 대장군은 건륭의 지시를 무시했다. 그는 따이성 군의 수괴인 윙씨 형제를 사로잡아 자신의 공적을 올리고 싶은 욕심에, 일부러 철수를 뒤로 미루었다.
광쭝 황제, 북진 명령 – 가자 탕롱으로!
1788년 12월 21일 윙후에는 푸쑤언(Phú Xuân)에서 탕롱이 함락되었다는 급보를 전달받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Quang Trung)에 오른 뒤 북으로 진군을 명한다. 같은 해 12월 25일에는 4일간 북으로 400여 km를 진군한 후 응에안(Nghệ An)에 도착, 그곳에서 10일간 군열를 가다듬고 구체적인 전략을 세운다. 당시 군세는
이미 10만을 넘어섰다. 그리고 1789년 1월 25일 마침내 땀딥(Tam Điệp)에 이른 광쭝 황제는 그곳에서 승리를 장담한다.
그리고 광쭝 황제는 본진을, 롱(Long) 장군은 2진을 이끌고 동다(Đống Đa)로, 바오(Bảo)장군은 3진과 함께 주력군과 합류했으며, 뚜잇(Tuyết장군과 록(Lộc)장군은 각각 4진과 5진을 이끌로 해로를 통해 하이증성과 박양성을 지나 탕롱으로 진격했다.
출귀몰 따이성 군, 하루 만에 청군 30만 섬멸
1789년 1월 25일 마침내 탕롱 20km 부근까지 진입한 따이성 군은 이때부터 속전 속결 탕롱 주변을 하나하나씩 공략해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1월 30일 응옥호이(Ngọc Hồi; 탕롱에서 14km남쪽)에 집결한 따이성군은 Hứa Thế Hanh 장군의 지휘아래 100 여마리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강력하게 청군을 공격, 단 반나절만에 3만 명을 궤멸시킨다. 당시 따이성 군이 야밤에 급습하자 청나라 군대는 “귀신부대가 쳐들어왔다”며 허겁지겁 달아났고,
나머지 패잔병들도 덤묵(Đầm Mực;하노이 일대)에서 바오(Bảo)장군의 부대에 의해 이차로 섬멸되고, 다시 동다(Đống Đa)에서 2진의 기습공격에 의해 또다시 수만 명이 죽었다. 청군은 부하장군 허세형과 장조룡 등이 1만여 군대와 함께 따이성 군에게 살육당해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광쭝 황제 (윙후에)는 마침내
탕롱을 수복하고 전쟁을 하루 만에 마무리하여 탕롱에서 대대적인 설 연회를 베풀겠다는 병사들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청나라 완패, 양국 화해
당시 비보를 전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청의 건륭제는 손사의 장군을 책망하고 그에게 하사했던 관모 등을 모두 회수해버렸다.
휘하 장군과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하고, 총사령관은 줄행랑을 놓았으니 천하를 호령하는 대청제국의 존엄한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백전노장 건륭제는 여기서 싸움을 그치는 편이 옳겠다며 최종적으로 냉정한 판단을 내렸다. 건륭은 직접 칙서를 작성해 윙씨 삼 형제에게 전달했는데, 이후 베트남 측에서 청에 직접 입조하면서 이후 외교적 관계를 무난하게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현 베트남 사가들은, “광쭝 황제는 세계 최강 건륭제가 통치하는 청나라 군대와 맞서 스스로 황제라 자처함으로써 그들에게 조금도 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월등한 군사전략과 여유로 단 하룻밤 만에 그들을 무찔러 다시는 베트남을 넘보지 못하게 한 일이야말로 1천 년 역사상 가장 통쾌한 전투요, 베트남전쟁사상 가장 위대한 투쟁”이라고 평가하고 있으며, 광쭝 황제(윙후에)야말로 근대 베트남사에서 외적을 물리친 걸출한 민족의 영웅이자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적을 섬멸한 백전백승의 용장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는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4년 만인 1792년에 39세를 일기로 병사하고, 얼마 못되어 그의 가족들은 1802년 윙왕조를 건국한 쟈롱황제에 의해 후에에서 참살당하고 만다.
시대별로 살펴보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전쟁들
● 흥브응 Hùng Vương 과 안증왕시대 ( ~ 938년)
진나라 등 역대 중국왕조와의 항쟁기 (기원전 2, 3세기)
비엣 떤 (Việt Tần ) 전투
하이바쯩 Hai Bà Trưng 봉기
바찌우 Bà Triệu 봉기
응오 전투 밧당 Bạch Đằng 강에서
● 중세 봉건시대 (939년~1858년)
송나라와의 1차 항쟁 (981년)
송나라와의 2차 항쟁 (l075~1077년)
몽고-원나라와의1차항쟁 (1258년)
원나라와의 2차 항쟁 (1285년)
원나라와의 3차 항쟁 (1287~1288년) 밧당
Bạch Đằng 전투 (1288년 4월 9일)
명나라와의 항쟁 (1406~1427년)
씸 (Xiêm; 태국)과의 항쟁 (1784~1785년)
만탄(Man Thanh :청) 과의 전쟁
베중전쟁 (1858 ~ 1945년)
● 1945~ 현재 (근, 현세)
프랑스 식민주의자와의 항쟁
딩빙푸 (Điện Biên Phủ) 전투1954년 3월 13일~5월7일)
베트남전쟁 (1955년 11월 1일~1975년 4월 30일)
호찌민운동 (1975년 4월 26일 ~ 4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