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2년동안 격리를 벌써 3번째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두 번, 베트남에서 한 번, 모두 세 번을 하다보니 이제 격리가 그리 낯설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지리한 여가 시간을 유익한 휴식으로 전환시키는 요령도 제법 몸에 익혔습니다.
일정 기간동안 강제로 외부와 차단이 되고 철저히 혼자서 생활해야 하는 격리는 잠시 지나가는 주말의 휴식과는 전혀 다릅니다. 친구를 만나 대화를 나눌 수 조차 없으니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티비나 책을 보며 생각을 하는 일이 전부입니다. 이런 환경을 긍정적으로 만드는 방법은 이 격리를 뭔가 목적이 있는 자발적 고립으로 스스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자연히 자신의 삶을 입체적으로 돌아보게 되는 성찰의 시간이 다가옵니다. 자신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객관화 작업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이 자기 성찰입니다.
그런 시간을 통해 깨달음을 갖고 아니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지역을 넘을 때마다, 매듭을 맺듯이 갖는 격리생활을 잘 활용한다면 일반 휴식보다 차원이 높은 자기 수양의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 성찰을 거치면 평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도 합니다.
베트남에서 느끼지 못하다가 한국으로 오면 달라져 보이는 것 하나 살펴볼까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돌아오고 나서 바뀌는 것 중에 하나는 호칭입니다. 베트남에서는 주로 직업상의 직책이 이름 대신 통용되곤 했는데, 한국에서는 특별한 직업이 없으니 모든 관계가 이름으로 통용되고, 거기에 예의상 붙여주는 가장 흔한 명칭인 사장이 의미없이 따라 붙습니다. 베트남에서 불리우던 발행인이니, 주필이니 하는 직업상의 호칭은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이런 호칭은 그 관계의 깊이를 알려주는 표상이기도 합니다. 베트남에서 그리 가깝게 지내다가도 한국으로 귀국을 하고나면 대부분 의례적인 인사 정도만 나누는 소원한 관계로 격하되는 것을 자주봅니다. 왜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가진 적은 없으신가요?
물론 그 이유를 쉽게 짐작을 하시겠지만, 논리적인 분석을 하자면, 베트남에서의 관계는 대부분 직업상으로 맺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만남은 처음부터 끝까지 직업에 방점이 찍히는 호칭을 사용하는 관계입니다. 직업상 맺은 인연은 직업을 떠나고 나면 공통 화제가 사라집니다. 베트남에서만 통용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은 한국에 오면 자연스럽게 직업으로 맺은 인연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게 되겠지요, 설사 그 인연이 같은 한국에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사실 베트남에서 이름이 불리는 경우는 참 흔치 않습니다. 그만큼 직업상의 관계가 많다는 뜻이지요. 반면에 한국에서의 인연은 이름이 갖는 정체로 맺어진 오래된 관계가 많습니다.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접근입니다. 그가 하는 직업에 대한 접근이 아니라, 이름의 임자인 그 사람, 인간자체에 대하여 알고 싶어서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을 만나서 직업상으로만 사귀고 싶다면 줄곧 직책을 위주로 호칭을 하고, 그 인간 자체를 알기 원한다면 가능하면 이름을 부르며 사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후자의 인연을 많이 만드시는 것이 지역을 떠나도 계속 유지되는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그런 면에서 베트남사람들이 늘 말 끝에 상대의 이름을 붙이는 문화는 우리도 배울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서로 이름을 불러서 그런가, 베트남 사람들과의 인연이 귀국 후에도 더 오래 지속되는 것을 자주 봅니다.
서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이야 말로 인간 자체로의 사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서로의 이름이 불리우는 곳, 그곳이 우리의 고국이고 고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