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3,Saturday

다 사는 것, 마지막까지 길에 있으라

출근하려 신발을 신었는데 물컹한 무엇이 밟혀 딸래미가 물 묻은 휴지를 넣어 장난치나 싶었던 것이다. 손을 넣어 빼도 빠지지 않았는데 기울여 털어봐도 휴지 뭉텅이는 나오지 않았다. 신발을 곧추세워 바닥에 털어냈더니 커다란 두꺼비가 튀어나왔다. 나는 놀라 뒤로 자빠지고 마당에서 혼자 파다닥거렸다. 밤새 내 발 안에 있었던 모양이다. 혹시나 모를 역한 인간의 냄새에도 아랑곳없이 깊이 숨어 웅크리고 있었을 두꺼비에게 내 발은 기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내가 보는 너의 모습이 기괴했던 만큼 놀라 자빠지는 내 모습을 봤을 때, 너는 얼마나 기괴하고 또 같잖았겠는가. 그러나,
내 발이 안식을 얻었던 그곳, 한동안 같은 공간에서 추위와 천적을 피하며 함께한 너의 그 축축한 기억을 나는 간직하겠다. 요즈음 동네에 고양이들이 창궐한다. 부디 살아라. 네 뒷다리의 민첩함을 위해 기도하마.

변변찮은 나를 위해 출, 퇴근을 도와주시는 기사님의 부고를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모든 아들에게 자기 안의 커다랗고 묵직한 세계 하나가 무너지는 일이다. 모든 아들의 유년에 영웅은 아버지다. 세상에서 가장 큰 사나이고 그 큰 손으로 내 몸을 한 손으로 들어올려 공중에 날리는 슈퍼맨이다. 도대체 저렇게 힘센 사나이가 있을 수 있는가 여겨지던 때, 내 목소리가 굵어지기 시작할 무렵 영웅이던 아버지의 손은 작아지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어머니 앞에서 한없이 더 작아지는 영웅의 등판을 보게 된다. 그의 젊음을 빨아들여 아들은 커가고, 그의 고혈을 욱여넣어 아들의 육신은 성장한다. 이젠 아버지라 불리는 사나이는 더는 이 세상에 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당면한 세상 모든 아들은 페르시아 요새처럼 육중하게 버티고 섰던 마음 속 세계 하나가 비로소 굉음을 내며 무너진다. 기사님의 부고를 들었던 날, 한때 자신의 영웅을 떠나보내는 모든 아들의 리츄얼로 약소한 동지의식의 부조금을 전했다. 내 손이 그의 어깨를 어루만질 때, 접촉한 몸을 통해 그가 내 마음을 꿰뚫어 봤는지 내 두 손을 와락 끌어 잡는다. 그러나 우리, 서로의 마음을 바닥까지 들켜선 안 되므로 얼른 두 세번 두드리는 것으로 모면했다. 그것은 한때 아들이었을 모든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될 모든 아들에게, 그것은 입밖으로 내선 안 될, 영원히 서로가 서툴게 놔둬야 할 불문율이므로. 늘 어거지로 살아서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살면서 고마운 두꺼비와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을 만날 때면 그저 막 사는 나에게도 인연은 찾아오는구나 여긴다. 자아니 영혼이니 형이상학이니 하는 초월론적 이야기보다는 내게 찾아온 인연들 하나 하나를 고마워하는 것이 다 사는 것이라 여긴다. 다사는 것, 그것은 마치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죽어라 오른 산, 꼭대기엔 정상임을 알리는 표지판 밖에 없다. 책의 마지막은 마지막을 알리는 페이지 숫자만 있을 뿐이다. 착각해선 안 된다. 정상에 이르렀다고 해서 정상은 우리에게 커다란 선물을 덥석 안겨주지 않는다. 책을 끝까지 읽는 것과 산의 정상에 마침내 다다른 사태는 ‘기대’ 에 젖어 사는 인간의 대표적인 헛발질인지도 모른다.

오르고, 읽고, 먹고, 싸는 동안 인간은 출생에서 죽음으로 나아가고 출생자 1과 사망자 1이라는 통계적 숫자사이에 가느다란 눈금은 우리의 기대다. 그 눈금에 서식하는, 혹시나 모를 ‘기대’ 에 기대어 기대하다 사라지는 우리 삶은 자연수가 아니다. 그것은 허수도 아니고 실수와 허수로 이루어진 복소수의 삶에 가깝다. 잡히지도 않고 보일까 말까 한다는 말이다. 태어남, 죽음, 결혼과 헤어짐에 관해 1이 더해지거나 빠지게 되는 한 사람의 중요한 변곡점들은 덤덤하게 아무런 심장의 요동 없이 숫자로 표현되어 통계로 관리될 텐데, 삶에서 느끼게 되는 기대와 헛발질은 통틀어 1이 되고, 다다르고 굽어지고 꺾이는 인생 곡절의 끝에는 누구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표정으로 입관하는 내 할아버지 얼굴과 같을 테다. 한번 삶을 염세적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 경로徑路의 존적인 삶의 양태에 무서움이 엄습한다. 죽을 때가 되면 죽고, 태어날 때가 되면 태어나며, 태어나고 살고 죽는 것이 우리가 보아오던 일요일 오전 지루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처럼 꼭 그렇게 끝나고 시작되고 진행된다. 그 속에 인상을 쓰기도 하고 누군가와 박치기도 했다가 인색하게 굴고, 증오하며 분노하고 또 기뻐하기도 하고 행복해하기도 하는, 많은 무리 속 인간 중에 하나인 내가, 태어났으니 살고, 살았으므로 죽어야 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이기 버거울 때가 있는 것이다. 그 끝은 끝이므로 끝을 보고 싶지 않을 때 말이다. 다만 꼭대기에 이르는 길에는 그 험난함을 뚫어낸 상처와 흔적만은 남는다.

그 여정의 상처와 흉터가 사실은 정상이 수여한 훈장이다. 우리는 사실 길이 주는 흔적이다. 길이라는 것이 산에서는 산길이요, 책에서는 페이지 한 장, 한 장 읽어가는 것이라면 모든 길은 과정이고 재단하자면 우리는 우주가 저지르는 어떤 과정의 흔적에 지나지 않을 테지만, 살지 않으면 결코 받을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그 ‘흔적’은 오로지 묵묵하게 견딘 사람에게 삶이 수여하는 선물이다. ‘열반에 이른 자는 열반에 머물 수 없다.’ 정상에 이른 자는 내려서야 옳다. 흔적과 흉터를 간직한 채. 내려서서 오르지 못한 자, 오름의 기쁨을 모르는 자, 오르는 과정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되어 부디 정상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지 말자. 그 길을 걸어간 자와 그렇지 못한 사람은 다르다는 것, 정상을 향하는 사람의 존재 이유는 정상에 있지 않고 어쩌면 낮은 땅에 있다. 첨단을 지향하되 애둘러 가기를 두려워마라. 꼭대기를 오르되 내려서기를 멈추지 마라. 삶의 상처와 흉터를 사랑하는 자, 마지막까지 길에 있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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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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