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하바드 대학 강의 실에서 미국인 여학생과 한국인 여학생을 앞에 세워두고 당사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스스로 얼마나 뛰어난 학생이라고 생각합니까?
미국여학생은 일류 대학원생 답게 “나는 특별하다.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라고 답하고 한국학생은 “나는 그리 나쁜 편은 아니지만 뛰어나지 못하다. 그런대로 일정 수준에 떨어지지 않으려 버티고 있다”
그리고 교수는 두 학생의 성적을 물었습니다. 미국 학생은 역시 상급 성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국 여학생은 전과목 A+에 월반까지한 특별한 수재였습니다.
진짜 특별한 사람은 미국인 여학생이 아니라 한국인 여학생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 여학생은 자신을 그저 평범을 좀 상회한 수준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 미국인 여학생은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 믿습니다.
어디서 이런 차이가 발생하게 된 것 일까요?
젊은 시절 처음 서구권 나라를 방문 했을 때 느끼는 문화의 충격 중에 하나가 칭찬이었습니다. 그들은 늘,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호들갑을 떠며 최상의 수식어를 동원하여 칭송하기 바쁩니다. 특히 아이들의 행동에 따른 칭찬은 과다할 수준을 넘어, 안하면 의무를 저버리는 듯이 거의 결사적으로 칭찬을 합니다. 너는 천재가 틀림없다 아무도 너만큼 특별한 사람은 없을 거다. 등등.. 그런 영향을 받은 탓일까 아이 들의 자존감이 향상되어 자신을 스스로 특별하다고 믿게됩니다. 반면, 유교 문화의 영향으로 한국인은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은 겸손의 문화를 익혀왔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자신을 내세우는 데에는 체질적인 거부감을 느낍니다.
이런 문화는 칭찬에도 적용됩니다. 한국에서는 지나친 칭찬은 남사스러운 일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어린아이에게 하는 칭찬은 아이들에게 내가 최고다 라는 겸손하지 못한 인식을 심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삼가하는 실정입니다.
이런 한국인의 겸손 문화는 스스로를 평가절하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세계무대에서 뛰고 있는 운동선수나 음악인 등, 우리 인재들이 실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절하된 대접을 받는 이유도 여기서 기원합니다. 스스로 내세우지 않으니 누가 구태여 대신 나서지 않는 한 대중이 그의 진가를 제대로 느끼려면 장고의 시간이 필요합니다. 스스로를 뽐내서 분위기를 고조시켜 그 분위기에 동승하여 플러스 알파되는 대중적 대접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인류 최고의 재능을 지닌 민족이 겸손까지 하니 주변 국가의 질투는 이해할만합니다. 하지만 그런 겸손의 자세로인해 제대로 된 평가를 못받는다면 이제는 우리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겸손대신 우리 민족의 대표적 심성인 배려를 끄집어 내면 됩니다.
겸손은 자신의 문제이지만 배려는 타인을 대상으로 하는 심상입니다. 겸손은 나 스스로를 숙이는 심사지만 배려는 나 스스로를 높이는 심사입니다. 타인의 일에 대하여 평을 할 수 있는 평가 권력자가 되어야 타인을 칭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칭찬은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좋은 점을 찾아서 칭찬을 하다보며 자신도 그 장점을 닮아가기도 합니다.
배려는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잘한 일을 한 아이가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요. 그 아이를 위해 칭찬해 줍니다. 칭찬은 아이를 꿈꾸게 만듭니다. 칭찬은 최고의 배려입니다.
새롭게 만난 사람에게는 칭찬해 줄 장점을 찾아봅니다. 누구든지 장점이 있습니다. 단점을 지적하고 고치는 것도 다른 방식의 배려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충돌을 야기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그러나 칭찬은 충돌이 없는 배려입니다.
칭찬을 받고 자란 아이의 자존감이 상대적으로 훨씬 높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상대를 칭찬해주면 자신도 스스로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안할 이유가 없습니다. 칭찬을 통해 타인을 배려하고 또 스스로의 자존감도 높이는 선한 배려를 나누며 지내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