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일본 기상청에서 태풍에 대한 방송을 하면서 디지털 기자회견을 한 일이 인터넷에 회자되고 있다. 원래 일본은 디지털과는 거리를 두고 사는 나라인 듯한데 이번에 디지털 브리핑을 한다고 하니 관심이 모아진 것이다. 그런데 그 디지털 브리핑이 코미디에 가깝다. 브리핑시 보여주는 자료는 디지털 화면인데 정작 화면에 나타난 것은 인터넷의 실시간 화면이 아니라 인터넷 화면 자료를 프린트한 인쇄지를 카메라로 찍어서 화면에 올린 것이었다.
도저히 요즘 사람들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 종이가 인터넷 화면을 프린트한 것이라면 그냥 그 화면을 직접 올리면 될 터인데, 왜 그걸 굳이 프린트하며 종이에 옮기고 또 그 종이를 카메라로 찍고 확대하여 다른 화면으로 옮겨야 하는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모두 놀라고 있다.
무엇이 원인인가?
모두 어설픈 지식이 문제를 만든 것이다. 어설픈 귀동냥으로 익힌 반쪽짜리 디지털 지식으로 한 국가의 기관이 세계적 조롱거리로 전락한 것이다.
세상의 일에 있어서 사람으로 인한 말썽은, 적당히 배우고 적당히 무식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익힌 사람은 문제가 생겨도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갖고 있으니 문제가 드러나지 않는다.
탈무드에 이런 비유가 있다. 바닷속에 완전히 가라 앉은 배는 다른 배의 항해에 방해되지 않지만 절반쯤 잠긴 배는 다른 배의 항해에 장애가 된다. 배가 풍랑을 만나 완전히 가라앉는다면 그나마 다른 배의 운행에 지장을 주지 않지만,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던 중 모래톱에 끼어 좌초도 아닌 상태로 엉성하게 서있기만 한 일본 배는 그야말로 세계적 문제를 만들었다. 실제로 세상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이와 비슷한 말로, 덜 어리석은 사람이 더 어리석다는 말이 있다. 세상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현명한 척하는 어리석음이라는 얘기다. 어설픈 지식을 자랑하거나 남용하다가 자신은 물론 남들도 다치게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지적한 소리다. 그런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산다. 특히 이렇게 인터넷으로 정보가 널려 있는 시대에서는 작은 지식으로도 전문가 코스프레를 하기가 용이하기에 더욱 그런 류의 사건이 끊이지 않는다.
이런 어설픈 배움을 경계하는 격언을 몇 개 더 보자.
물이 반쯤 찬 항아리가 가장 시끄럽다.
당연한 소리다. 엉성한 배움은 자신이 모자람을 감추려 늘 소리를 많이 낼 수밖에 없다.
또한 가득 찬 항아리가 반쯤 찬 항아리보다 옮기기가 용이하다는 말도 있다.
맞다, 어설픈 배움을 가진 자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않고, 다른 이의 의견에 절대 동조하지 않으며 또한 설득되지도 않는다. 자신의 부족함이 드러날까 두려운 탓이다.
이렇게, 깊은 배움을 가진 사람은 늘 배우기를 원하지만 어설픈 지식은 배움을 거부한다.
이 특징을 활용하여 어설픈 지식인을 탈피하는 좋은 방법이 있다.
남의 말을 경청하며 자기 주장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다. 그 습관만 가져도 그 누구도 그대의 어설픈 배움을 눈치채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자세는 배움이 깊은 사람들의 특징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