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주필 칼럼-무용한 지식.

세상 많이 편해졌다.

인터넷으로 인해 지식의 휴대가 가능해진 덕분에 일반적 상식에 속하는 지식은 따로 익힐 필요성이 많이 사라졌다. 모른다는 이유로 지탄받는 경우도 줄어 들고, 동시에 단순히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행세를 하는 시대도 지난 것 같다. 세상이 달라진 것이다.

결국 이런 시대의 변화는 그저 단순히 알고 있는 지식을 대입시키는 일은 인간이 하는 일이 아니라고 대 변혁을 만들었다. 아무리 뛰어난 인간이라 해도 인간이기에 갖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기억의 한계만이 아니라 노동시간의 한계까지 아무런 제약이 없는 AI라는 괴물은 단순한 지식을 대입하는 인간들의 일자리를 간단하게 차지해버린다.컴퓨터로 인해 우리의 삶은 편리해졌지만 동시에 그들과 뭔가는 달라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진 셈이다. 단순한 지식의 대입은 인간의 몫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제 응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지식은 무용한 시대가 되어 버렸다.

법조문을 잘 외우고 있는 법관이 있다. 쌓아 놓은 지식이 엄청나 모르는 법이 없다고 하자. 그렇다고 이 법관이 일을 잘 할 것이라는 보장이 있는가? 법조문을 정확히 암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법이 만들어진 배경과 의의 그리고 이법이 적용될 사안의 특수성을 다 고려할 줄 아는 법관이 진정한 법관이라 할 것이다. 지식을 응용할 줄 아는 법관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 대신 AI에 법복을 입히는 것이 더 확실한 판결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이 관청에 가서 답답해하는 것 역시 이런 문제에 속한다. 시민들에게 뭔가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었다면 대민 일선에서는 그에 대한 문의가 빗발 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담당자가 그 새 규정에 대한 행정 수속만 암기하고 그대로 시행만 하고 있다고 하자. 그 경우 해당 공무원이 일을 잘 하고 있는 것인가를 떠나 그 일을 과연 사람이 하는 것이 효율적인가 하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요즘 베트남 교민들이 한국에 들어 갈 때 백신접종을 마쳤다면 2주간 격리를 면제받을 수 있다 하여 많은 귀국자들이 너도나도 면제 신청을 하는데, 그 신청서류가 장난이 아니다. 백신 접종 완료자라는 것만 보여주면 될 듯한데 정부의 뜻은 다른 모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쉽지 않은 가족관계 증명서라는 것을 요구한다. 덕분에 신청 과정이 만만치 않은 모양이다. 어떤 이는 3번이나 반려 당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그 과정이 힘들어 격리 신청을 포기하고 그냥 들어갔다고도 한다.

격리 면제 신청과 한국에 가족이 있어야 하는 것과 연관성을 찾기 힘든 많은 교민들이 이 부분에 열을 받아 영사관에 문의하곤 했다는데, 정부의 지침이라는 답만 듣는다고 한다. 여러 단톡방에서 그 일에 대한 얘기를 하는데 아무도 그에 대하여 이해가 되는 답을 들었다는 사람은 없다. 한결같이 정부 지침이 그렇다는 얘기가 전부다. 만약 그 질의를 받은 영사관 직원이 질문자를 제대로 이해시키지 못하고 그저 정부지침이라 시키는 대로 합니다 식의 답변을 한다면 그 직원 업무는 AI에게 넘기는 것이 맞다. 하긴 문제의 격리면제 신청은 대면업무가 사라지고 인터넷 신청만 가능하도록 만들어 이미 그 업무는 AI로 넘어간 듯하기도 하다.

그래도 인간은 AI를 대면하기보다 인간을 상대하기 원하며 영사관에서 일하는 양반들에게 연락을 하고 문의를 한다. 그런데 돌아오는 것이 정부의 지침이라는 영혼 없는 대답이라면 우리는 AI와 대화를 나눈 셈이 된다.
알기만 하고 응용을 모르는 자는 똑똑하다는 소리는 들어도 슬기롭고 지혜롭다는 평가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덕분에 똑똑한 사람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러나 그냥 똑똑하기만 해서는 우리 세상을 잠식하는 컴퓨터와의 전쟁에서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
모든 정보, 지식을 손에 들고 다니는 이 시대를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