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주는 선물
재택 근무로 인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좀이 쑤시는 듯 집 밖을 향한 마음이 간절합니다. 코로나가 갉아먹은 근육은 당최 회복되질 않습니다. 관계의 인간이 감정을 나누지 못해 마음은 터지고 갈라집니다. 맨소래담도 듣질 않고 후시딘도 가라앉힐 수 없는 게 있는 모양입니다.
머릿속에서라도 나가야지요, 눈을 감습니다. 사방이 흐려지며 머릿속엔 상상 하나가 지나갑니다. 문득 먼데 하늘을 바라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손 닿는 것들을 무심하게 주섬주섬 꾸려 불룩해진 배낭을 들쳐 멥니다. 눈을 감으니 무거워야 할 배낭도 우주선 진공상태처럼 가볍습니다. 가을을 향해 가는 늦여름 산이 한심한 듯 내려다봅니다. 왜 이제 왔냐는 것 같습니다. 작은 내 키를 산 만큼 키워서 산은 자신의 꼭대기에 나를 데려다 놓고 마루금을 걷게 합니다. 그렇게 내려다보니 삶은 그야말로 막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삶을 돌아보니 순간 부끄럽기도 하고 조금 억울하기도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세상의 무책임한 말과 나를 찾아야 한다는 세상의 손쉬운 말이 그제야 들립니다. 마치 파우스트와 반목하며 두 가지 목소리를 한꺼번에 내는 악마, 메피스토펠레스 같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나열해 보지만 처참한 일상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을까요. 의지박약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시시한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까발리는 건 너저분한 이삿짐을 마당 가득 펼쳐놓은 민망함과 같을 겁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니었지요. 아침에 시원한 커피 한 잔, 산 중턱 시원한 바람 한 줄기,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 휴가, 달콤한 연인의 키스, 매콤한 떡볶이 같은 것, 불행을 잠시 잊게 하는 것들에 행복이라 말하지만 그 약발이 다하면 이내 불안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니 행복이라는 건 삶에서 불행을 잠시 잠깐 지우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불행도 행복한 중에 찾아오는 환영 같은 것이지요. 마냥 행복이 지속되면 그건 행복이 아닐 겁니다. 불행과 행복은 서로를 행, 불행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지요. 그러니 행복하다, 불행하다 떠들며 살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느냐를 고민하기 보다는 어떨 땐 시간을 밀치며 그저 사는 게 방법일지 모릅니다. 오늘 ‘좋아요’를 많이 받았다고 좋아할 게 아닐뿐더러 어제 누구에게도 좋아요를 받지 못해도 실망할 게 아닙니다. 절망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듯 희망도 사실은 무용합니다. 희망만을 생각하는 사람은 종국에 현실에서 절망을 만나면 무너지기 마련이니 말입니다.
넘어지지 않으려 등산화 끈을 조였지만 결국은 내 목을 조이고 말았던 것 같습니다. 끈을 느슨하게 풀려진 대로 마냥 걷다가 넘어지는 쪽을 택했더라면 삶은 분명 이리 조이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나는 인기있는 사람인가, 내 사는 집은 봐 줄만 한가, 벌이는 괜찮은가 같은 시덥잖은 자기검열에 얼마나 많은 환희와 웃음과 기회를 놓쳤을까 자책합니다. 산에서 바라보는 지난 인생은 진폐를 입가에 덕지덕지 붙이고도 욕망을 가둘 수 없어 다시 탄가루를 삼키는 막장과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도 그럴 게 기진맥진하며 번 돈을 죽어라고 탕진하니 아무도 모르는 이가 볼 때는 막장이 아닌가 할테니까요. 끌어 모으지 않고 또 죄다 쓰는 일을 중단하면 될 텐데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게 어렵지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카뮈가 말했다지요. “나는 소유할 줄 모른다. 내가 가진 것, 내가 애써 가지려고 하지 않았지만 나에게 주어진 것 중 어느 것도 나는 간직할 줄을 모른다. 그것은 낭비 때문이라기 보다는 다른 어떤 종류의 아까움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재물이 지나치게 많아지면 사라져버리고 마는 자유가 내게는 아까운 것이다. 가장 풍성한 호화로움이 나에게는 언제나 일종의 헐벗음과 일치하곤 했다. 아무 것도 부러워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은 나의 권리다.” 조금 덜 모으더라도 자유로 한 발짝 조금씩만 들어섰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자기계발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는 것과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라 말합니다. 문득 그들은 왜 그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스스로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생각에 이르자 광범위한 불행의 끝으로 떠미는 세상 현자들의 말이 무책임해 보입니다. 수단이 된 우리는 누군가의 목적을 위해 삶을 송두리째 봉사하는 것 같은 억울함이 드는 것이지요.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인이 그 누군가를 알지 못한 채 수단이 된다 생각하니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막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는지 모릅니다.
칸트라는 철학자가 ‘너의 인격과 모든 타자의 인격에서의 인간성을 결코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언제나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도록 행위하라’ 고 말할 때 저는 놀랐습니다. 그의 말은 높은 인간학의 정점 같았습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는 수단이 끼어들지 않습니다. 고양이와 고양이는 서로를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지 하지 않는지조차 인간은 모릅니다). 태양에는 목적이 있을까요? 산이 모든 사람에게 길을 이리 저리 내어주는 것도 누군가의 마음을 너를 위해 도모하려 하지 말고 마루금을 걷듯 그저 살아보라는 말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삶은 불안과 고통을 짊어진 채 거대한 거인의 등껍질을 걸어가는 산행과 같다는 말을, 산은 자신의 등을 보이며 조용히 말하는 것 같습니다. 물리적인 지역과 장소는 물론 정신적으로도 관념의 편견을 집요하게 뛰쳐나오고 다시 섞이다가 다시 멀리 떠나야 했음을 산 길을 걷다 자득합니다. 사실 답도 없고 정해진 길도 없으니 그 모든 헛발질이 모두 나의 길임을 알게 됩니다. 바이러스가 인간의 만남을 멈추게 하고 힘들게 합니다. 벌써 일상을 서서히 찾아가고 있으니 곧 이전의 삶을 다시 찾을 거라 확신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일상이 일상일 때는 그렇게 일상이 싫었는데 일상을 누리지 못하니 일상은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희망과 절망, 행복과 불행이 둘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굳이 바이러스로부터 받아야 하나 싶습니다만 인간의 헛발질 덕에 비롯된 일이니 이 또한 인간의 길이겠지요. 그러니 자신 있게 삽시다. 어떤 권위에 눌리지 않고 어떤 류의 인간을 만나더라도 지금 모습에 당당하고 주눅들지 않는 의젓함으로 말입니다. 열심히 산 자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마음대로 살아본 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서요. 모진 시대 모진 사람들 틈에서 인생 길을 함장축언하는 루쉰의 이 말을 저는 좋아합니다.
“갈림길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 숨 자고 일어나서 갈 만하다 싶은 길을 골라 다시 걸어갑니다. 우직한 사람을 만나면 혹 그의 먹거리를 빼앗아 허기를 달랠 수도 있겠지만, 길을 묻지는 않을 겁니다. 그도 모를 테니까요.”(루쉰, 쉬광핑에게 보내는 편지, 1925년 3월 11일)
이제 내려 갑니다. 상상 속에서라도 산길을 걸으니 오늘 하루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산은 오늘도 우리를 빈 손으로 내려 보내지 않는 군요. 늘 깨닫지만 산에서 보낸 하루가 몇 수레의 책보다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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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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