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실이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이제 일상이 바꿨습니다. 어제, 월요일부터 그전에 있던 일상의 자리로 되돌아왔습니다. 참 길고 긴 길을 돌아온 듯합니다. 4개월여 창고에서 억지 잠을 차던 삶의 열망이 다시 고개를 듭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은 황당한 사건으로 고장 난 것도, 오래되어 부식된 것도 없이 잘 달리던 열차를 억지로 괘도에서 이탈시켜 오랜 세월 창고에 처박아 두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시혜를 내리듯이 백신이라는 옷을 하나 입혀 꺼내서 다시 달려보라 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어떤 주문이 밀려들까요? 그동안 쉬었던 일거리를 도루 채우라고 열화 같은 채근이 이어지겠죠. 누가 쉬게 해달라고 요구를 하기나 했던 것처럼 마구 채찍을 휘두를 것이 뻔히 보입니다. 뭐 그래도 움직일 수 있으니 좋습니다. 채찍질이라도 받으며 일하며 살아간다는 사실에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긴 시간 어둠의 창고를 헤매며 배웠으니까요. 결국 신이 인간에게 심어준 노동의 본능을 되찾아가는 것인가 봅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가 갖는 진실은 무엇인가요?
다시 만나는 직원들의 얼굴에서 뭔가 모를 해방감을 피어납니다. 다시 만나서 반갑다며, 다시는 억지로 헤어지지 말자고 포옹이라도 해야 하는 것인지, 참 난감한 재회이긴 합니다. 그동안 이런 식의 헤어짐도, 재회도 없었으니 말입니다.
다시 책상에 앉아 버릇처럼 컴퓨터를 커서 세상과 연결을 합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여전히 잘 굴러가고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그 속에 자신을 꾸겨 넣기 위해 몇 가지 SNS를 열어 나도 살아있다는 손짓을 합니다. 이렇게 굳이 나도 함께 가자고 매달리는 이유는, 그들과 함께 꿈꾸며 살라고 보낸 신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하는 탓입니다.
우리의 모든 생은 만남으로, 관계로 이루어집니다. 부모와의 만남으로 시작하는 우리의 생은 가족과 이웃 그리고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과의 만남으로 나 역시 한사람의 사회인으로 살다가 결국 신과의 만남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모든 기쁨과 슬픔을 안기는 사건 사고도 관계로 시작되고 관계로 마감됩니다. 관계가 없는 감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관계가 일방적으로 형성되지 않듯이 우리의 생도 자신이 힘으로만 완성되지 않습니다. 부모, 가족, 친구, 이웃, 동료들의 도움이, 그들의 존재가 음으로 양으로 작용하면서 생의 바구니가 채워집니다. 나의 존재는 타인의 존재로 확인됩니다. 나의 미천함이나 우수함이나, 모자람이나 탁월함이나, 아름다움이나 추함 마저도 다 타인이 존재함으로 드러날 뿐입니다.
결국 함께 존재함으로 자신이 살아갑니다. 나를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경의 말씀은 그대의 존재가 타인의 존재로 확인된다는 것을 일러주는 말씀이 됩니다. 타인에게 보이는 모든 감정은 자신에게 향하는 감정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신의 가르침입니다.
오랜만에 만난 직원들과 피자를 시켜 점심을 함께 합니다. 이들의 존재로 베트남에서의 삶이 형상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아름다워 보이는 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