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이야기는 정말 다시 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은 어린 영혼을 포함한 300여 명의 애달픈 생명을 포함하여, 아둔한 머리로 2주일마다 본지의 메인 칼럼을 써내야만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처량한 인간의 사고능력마저 덤으로 수장시키고 말았다.
아무리 털어내도 지워지지 않고 굳건히 머릿속을 맴돌고 있는 이일이 과거의 슬픈 사건으로 기억속에 인지될 세월을 기다리는 것보다 어린 영혼의 명복을 가슴에 깊이 묻어두고 구체적으로 어떤 응어리인지 모르지만, 말이 되든 아니든 나오는 대로 전부 털어내고 그것을 기화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이기적 욕망을 허용하기로 했다.
부디 용서해 달라. 어린 영혼을 대가로 치른 참사를 감수해야만 다시 살아날 것 같은 나약한 인간의 무례를.
한국은 나라 전체가 세월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집단 우울증 증세를 보이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지 3주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모든 매체는 대부분의 시간을 세월호 사건에 목을 매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것 조차 죄스러운 양 눈치를 보고 있다. 언론조차 세월호 트라우마에 빠져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드러나는 우울증은 각각의 부류마다 각기 다른 증세로 나타나고 있다.
가장 심각한 우울증 증세는 물론 유족들에게서 보인다. 이들에게 보이는 증세는 또 다른 개인적 사건들로 확대될 수 있을 정도로 위중하고 무거워 보인다. 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일어나는 모습은 < 절망>이다.
지금은 많은 유족들과 함께 맞이한 공동의 운명을 서로 위로하며 슬픔을 나누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고 더 이상 기적과 같은 생환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마주하는 시간이 되면 그동안 품었던 불안한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고 절망이 찾아온다. 이제는 아이가 없는 세상을 마주해야 한다는 냉혹한 현실을 받아 들어야 하는데 아직은 그래도 누군가를 원망하며, 관계자들과 정부관료들 그리고 정치싸움에 빠져 국민들의 안전에 눈곱만한 관심도 보이지 않았던 정치꾼들에게 그 분노와 화를 돌리는 과정이 끝나지 않은 탓에 실낱 같은 희망이 마음속 한 곁에는 아직도 남아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대중도 친지들도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차가운 현실을 마주할 때 그들은 그 실낱 같은 기적의 판타지마저 버려야 한다.
이것이 절망이다.
그래서 그 순간을 인정해야 할 시간이 임박한 그들의 침묵 시위가 더욱 애처로울 뿐이다.
이들에게 우리 같은 일반 대중이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단지 그들이 여전히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냉철한 정치꾼들 특히 현 정권에 반감을 가진 이들에게도 트라우마 증세는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모든 사건의 이유를 박근혜 정권 탓으로 돌리며 비이성적 질타를 쏟아내고 있다. 사건이 일어난 이유
나 수습 혹은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데는 관심이 없어 보이고 그저 현 정권에 대한 저주를 쏟아내는 것으로 자신들의 트라우마 증세를 보여주고 있는 듯하다.
이들에게 일어나는 이런 증세는 < 반감>이다.
이들의 증세는 결코 이 사건만을 이유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 사건은 단지 그들이 어떤 이유로든지 갖고 있던 상처를 자극하였을 뿐이고 이들이 품고 있는 세상에 대한 저주를 뿜어내는데 창구 역할을 했을 뿐이다. 아마도 이들의 상당부류는 예전 박정희정권 시절에 직간접적으로 아픔을 겪었던 사람들과 관련되었거나 그런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다.
인간은 원래, 함께 있을 때 기쁜 감정을 주는 사람을 사랑하고 반대로 슬픈 감정을 주거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이들은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에서 과거의 아픔과 미움의 대상이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이 아픈 상처를 다시 떠오르게 만드는 것에 대한 감성적 반응, < 반감>이다.
이 사건으로 너나없이 모든 국민이 다 함께 우울증 증세를 보이긴 하지만 기성세대와 신세대에서 드러나는 증세와 근원적 감정은 각기 다르다.
과거의 불우하고 가난했던 불행을 안고 살았던 기성세대가 느끼는 감정은 < 두려움>이다.
전쟁과 빈곤의 트라우마를 숙명처럼 안고 살아온 기성세대에게는 불행하던 지난 과거가 현재의 충만한 삶의 풍요를 가져다 준 무용담으로 미화되어가는 순간 다시 과거형의 사건이 터지면서 거의 지워져 가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슬픔처럼 되돌아오는 것이다. 당장 이런 사건을 기회로 한층 목소리를 높이며 사회를 뒤흔들어대는 정치꾼들의 목소리에서 바로 지난 정권, 나라전체를 혼란으로 삼켜버린 촛불시위가 떠오르는 두려움도 생겨난다. 그래서 이들이 보는 이 사건의 시각은 조금은 냉철하고 또 다른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으로 비교적 절제된 자세로 슬픔을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반면, 그런 아픈 과거의 기억이 없는 신세대가 느끼는 이 사건의 감정은 < 치욕>이다.
실제로 한국의 국가 위상이나 국력보다 훨씬 높은 자긍심을 가진 신세대에게 이런 후진국적 사건은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었고 동시에 그 상처로 인한 분노와 함께 치욕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사건을 단시일에 경제개발을 이룬 부작용으로 보는 외국 언론들의 시각은 비난이 아니라 현실적 진단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이미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섰다고 생각하던 신세대 에게는 냉소적 비난으로 들리고 그런 일방적 사고는 치욕으로 둔갑하며 그런 치욕을 안긴 정치권과 현 정권에 대한 복수를 행하므로 무너진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반정부 시위나 인터넷의 부정적 댓글의 적극적인 참여로 그 치욕을 되갚아주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스스로 과대 평가된 자존심이 유발한 치욕의 감정이 아니라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해 미리 노력하는 감정 즉, 수치를 아는 겸손함과 우리의 현실적 위치에 대한 자각이다. 수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할 때 생기는 부끄러운 감정이다. 아직은 우리가 더 보완하고 고칠 것이 많다는 현실적 상황을 인식하고 자신을 낮추며 수치를 아는 행동을 한다면 다시는 치욕당할 사건은 생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가 그들의 손에 있는 만큼 그들에게 결코 오만한 자긍심을 심어주는 일은 삼가야 할 일이다.
이런 국민들의 다양한 감정과 우울증의 증세를 치유하기 위한 박근혜 정권은 해법은 무엇이 될까?
그것은 백 마디의 사과가 아니다.
오직 한가지,
희망이다.
지금은 모든 국민이 박 정권에게 주어진 나라의 미래에 대한 의구심을 애써 감추려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이 오히려 희망이라는 감정이 잘 파고들 수 있는 가장 적절한 환경이라는 것을 냉철하게 간파해야 한다. 스피노자는 “< 희망>이란 그 결과에 대하여 어느 정도 의심하는 미래나 과거의 관념에서 생기는 불확실한 기쁨”이라고 했다.
유족들의 절망과 정치적 반대파들의 반감, 기성세대의 두려움과 신세대의 치욕을 다 함께 포용하고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아직 미약하기에 오히려 희망이 있다는 사실을 호소해야 할 것이다. 이런 호소가 공감을 얻는다면 이 사건으로 비롯된 온 국민의 슬픔을 우리의 오랜 숙제인 사회적 분열을 치유하는 동력으로 바꾸는 극적인 반전을 이룰 수 있다.
미래가 불확실할 때 더욱 절실히 기다리는 것이 바로 < 희망>이기때문이다.
작성자 : 한 영 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