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첫 남편 부여우태가 일찍 사망하여 20대 과부가 된 소서노는 운명을 개척합니다. 두번째 남편 주몽을 만나 고구려 건국을 주도 합니다. 하지만 주몽의 배신으로 소서노는 자신이 세운 고구려를 버리고 남쪽으로 내려갑니다. 당시 기준으로 노령인 49세 소서노는 두번째 국가 백제를 건국했습니다.
소서노가 남쪽으로 떠나는 시점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야사에 의하면 주몽은 첫번째 부인 예씨를 만난 후
소서노를 의식하여 아들 유리의 거처만 궁궐에 마련하고 예씨부인은 궁궐 밖 사저에 머물게 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소서노는 궁궐에 예씨부인의 거처를 마련합니다. 또한 소서노는 예씨부인에게 첫번째 왕후 자리를 양보하고 자신은 둘째 왕후가 됩니다. 소서노의 통 큰 양보에도 불구하고 주몽은 유리를 후계자로 선정하자 소서노는 분노가 폭팔합니다. 하지만 주몽은 소서노의 반발을 예상하고 자신의 측근에게 군사와 행정을 맡겨 반란에 대비합니다. 소서노는 주몽의 반란 대비책을 눈치채고 조용히 떠날 준비를 합니다. 아버지 연타발 때부터 충성하던 측근과 자신의 측근을 합쳐 10명의 충신과 자신을 따르던 많은 백성들을 데리고 소서노는 남쪽으로 떠납니다.
소서노의 고구려 건국 과정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조선상고사 기록이 비슷하지만 백제 건국 과정은 좀 다릅니다. 또한 삼국사기에도 여러 설이 있어 좀 복잡 합니다. 일단은 삼국사기의 여러 설 중 가장 합리적인 설을 기준으로 설명하고 다른 기록들도 소개 하겠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소서노 집단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과정에 대한 기록이 생략되어 있으나 조선상고사 기록에는 남하하는 과정에서 토착 세력들과 많은 충돌이 있었다고 합니다.
압록강과 한강을 건너 하남 위례성에 당도하여 지세를 살펴보니 북쪽은 큰 강이 흐르고 동서는 산이 둘러싸고 남쪽은 넓은 평야가 있어 도읍지로 적합한 곳이라 여긴 소서노는 두 아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는 이곳이 도읍지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느냐?” 온조는 대답합니다 “고구려를 창업하신 어머님의 안목이니 어련 하시겠습니까” 하지만 비류는 다른 대답을 합니다. “소자는 바다와 평야의 이점을 동시에 가진 미추홀이 (인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소서노는 비류의 뜻을 꺽지 않고 무리를 둘로 나눠서 비류는 미추홀로 떠나고 소서노는 온조와 함께 위례성에 정착합니다. 소서노가 처음에 정착한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소서노는 위례성에 정착하고 나라 이름을 십제라고 부릅니다. (열명의 신하들과 함께 만든 국가라는 뜻) 미추홀에 정착한 비류는 염분이 많은 바닷가에서 농사 짓는 것이 어려웠고 바닷가에서 잡는 물고기로는 식량이 부족하여 지탱할 수 없습니다. 백성들의 불만이 생기자 비류를 따르던 신하들과 백성들은 소서노에게 갑니다. 소서노는 비류 집단과 합류하자 나라 이름을 백제로 부릅니다. (백제는 많은 사람들이 세운 큰 집단이라는 뜻) 이렇게 백제라는 나라가 건국됩니다. BC 18년 소서노의 나이 49세 때의 생긴 역사적 사건 입니다.
비류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은 두가지 인데 첫번째는 [백제 시조는 비류이고 비류가 일찍 사망하여 동생 온조가 이어받아 백제 국왕이 되었다] 삼국사기에 다른 기록도 있는데 [미추홀로 떠난 비류는 후회하다 죽고 백성들은 소서노에게 돌아가 합류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이다] 조선 상고사에는 비류는 일본으로 건너가서 비류 백제를 세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제 건국에 대한 세가지 기록은 학자들의 논쟁이 많아 아직까지 정설은 없습니다.
BC 18년 백제가 건국되자 소서노와 온조는
동명왕 사당을 세웠습니다.
필자가 공부하던 40년 전에는 동명왕은 주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배웠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와서 해석이 바뀝니다. 동명왕은 북부여의 시조 동명왕 인데요. 고구려 주몽의 건국신화와 비슷합니다. 또한 고구려 뿌리도 부여에 있고 백제 역시 마찬가지로 부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왕족의 성씨는 고씨이고 백제 왕족은 부여 왕족과 같은 부여씨 입니다. 따라서 북부여를 계승한 나라는 고구려가 아닌 백제라는 정통성의 표현으로 동명왕 사당을 세운 것 같습니다.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은 비류와 온조의 아버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두가지 설을 소개 했습니다. 비류와 온조의 부모는 주몽과 소서노라는 기록도 있고, 또 비류와 온조는 부여우태와 소서노의 아들 이라는 두가지 기록이 있습니다. 현재의 학자들은 백제 시조 온조는 부여우태의 아들 이라는 설을 정설로 인정합니다.
백제 건국 후 12년간 소서노에 대한 기록이 없다가 소서노가 사망하던 온조왕 12년 2월 (BC 6년 2월) 소서노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이 있는데
이상합니다.
1. 수도에서 한 노파가 남자로 변하였다
2. 성안에 호랑이 다섯 마리가 나타났다
3. 온조왕의 어머니 소서노가 61세의 나이로
사망하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다른 고대의 기록들은 가끔씩 은유적인 표현을 사용했는데 위의 기록들 역시 은유적 기록으로
보고 추론 합시다.
1. 노파는 소서노를 지칭하고 남자로 변했다 라는 내용은 소서노가 권력과 거리를 두다가 온조왕의 실세들의 정치가 못 마땅해서 다시 정치에 개입하려 했다고 추측됩니다.
2. 호랑이 다섯 마리가 성안으로 난입했다. 이는 궁궐에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추측됩니다. 백제 건국후 12년 동안 힘을 기른 온조왕의 측근 세력과 이를 못 마땅하게 생각하는 소서노 세력간에 무력 충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소서노는 정치 실세들에 의해 제거 당한 것 같습니다.
필자가 추측한대로 소서노가 백제의 정치 실세들에 의해 제거 당했다면 소서노는 남성 권력자 중심 사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됩니다. 남편인 주몽에게 배신 당할 때에는 아들이라는 든든한 믿음이 있어서 새로 시작할 수 있었건만, 이번에는 아들이란 버팀목 마저 사라진 소서노의 입장에서 선택의 폭이 좁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당시 나이로는 초 고령인 환갑을 넘긴 소서노는 그렇게 허무한 최후를 맞이 했습니다. 소서노는 죽은 후에도 부정적 평가를 받는데요 소서노에 대한 후세 역사가들의 평가를 살펴봅시다.
소서노가 죽은 후 백제에는 자연재해 흉년 외부침략 등 나쁜 사건이 많이 발생하자 온조왕은 어머니 소서노의 사당을 세우고 나라가 힘들때 어머니 소서노에게 기도합니다. 또한 백성들도 힘들때 마다 소서노 사당에 가서 기도하는 풍습이 생깁니다. 소서노는 백제의 수호신이 됩니다. 하지만 백제가 멸망하고 소서노는 잊혀지다 소서노 사망 1150년 후 (백제 멸망 500년 후) 삼국사기를 편찬한 김부식에 의해 소서노는 역사에 이름을 올립니다. 김부식은 신라 귀족출신 유학자 입니다. 따라서 삼국사기는 신라 중심의 유교 사관에 의해 편찬 됩니다. 당연히 남성 중심의 역사로 기록됩니다.
17~18세기 성리학이 주도하던 조선은 성리학 이외의 이념이나 사상은 반역으로 간주합니다. 따라서 소서노에 대한 평가는 거의 혐오 수준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는 소서노에 대한 역사 지우기를 시도합니다. 조선의 성리학자가 평가하는 소서노에 대해서 소개 하겠습니다.
1. 과부가 된 소서노가 재혼한 것은 강상의 법도를
어긴 죄인이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과부의 재가가 허용 되었습니다. 과부 재가 금지법은 오직 조선시대에만 존재 했습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성리학 이외의 문화는 전부 잘못된 문화로 생각하고 역사를 평가합니다]
2. 부인이 있는 주몽과 재혼한 소서노는 첩의 신분인데 분수도 모르고 설쳤다.
[조선시대 이전에는 여러명의 부인을 둘 수 있었습니다. 첩의 개념은 성리학 문화의 유산입니다 고려 태조 왕건은 호족 연합을 위해 29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모두 정식 부인입니다]
3. 암닭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소서노는 고구려 창업후 영향력을 가졌고 백제 창업 후에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를 두고 비판한 것입니다]
4. 남편인 주몽의 뜻에 반하여 남편을 떠나 백제를 창업한 사실은 삼종지례를 어겼고 새로운 국가를 창업한 것은 반역에 해당한다.
이러한 조선 성리학자들의 시각을 보면 한심 합니다.
훌륭한 사람도 나쁘게 만드는 정치가의 음모를 보는 것 같습니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 식민사학도 소서노를 외면합니다. 일본은 조선의 훌륭한 사람들에 대해 전부 역사 지우기를 했습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와서 젊은 학자들에 의해 소서노에 대한 연구가 많았습니다.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다음 이야기
고구려 첫번째 명재상 명림답부는 고구려 전술의 기본인 청야전을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고구려 초기의 상황과 명림답부의 행적을 다음 시간에 살펴봅시다.
온조.비류에 관한 것은 백제의 건국 설화일뿐, 물론 한국사를 공부하다보면 정사.야사.설화 같이 공부하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공부는 자기 취향대로 하면 되는 것이고 설화를 마치 정사인 것 처럼 호도해서는 아니될듯. 어디 기원 전후 일을 지금 사실인 것 처럼 말하는 것은 위험천만입니다. 유일한 근거가 삼국사기 한 줄 나오는데, 삼국사기에 나오면 다 맞나요? 삼국사기가 1145년쯤 씌여졌는데 그 쓸 때 이미 1,000년전 일인데 써놨다고 다 맞을거라 보나요? 그때 세월 보다 지금이 훨씬 좋은데 좋아봤자 100여년전 일을 잘 모르는데. 100여년전에 있었던 1890년 동학혁명 당시 내걸었던 폐정개혁 12개조도 전하지 않는데. 지금 교과서에 온천지 사실인 거 처럼 떠벌리는 내용은 세월이 50년 지나 1940년에 한 무명 역사소설 작가 오지영이 쓴 소설책에 나오는데
네이버 검색하면 나와요. 검색어 ‘한국사 공부방’으로
홍순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