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3,Saturday

오늘, 그 사나이에게

간 밤, 갑작스런 고열로 잠을 설쳤습니다. 벌써 우기가 시작된 모양인지 아이들과 함께 세찬 비를 맞고 놀았더니 몸살이 왔던 모양입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마냥 좋다고 비 맞고 놀 나이는 아니지만, 쏟아지는 비가 그리 좋을 수 없었습니다. 신나게 놀았으니 그걸로 됐습니다. 나아지겠지요. 쑤시는 몸을 겨우 일으켜 출근했습니다. 출근 길에 문득 이대로 죽는다면 내 인생은 아름다웠다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3초간 했습니다. 조금 아쉬울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막았습니다. 체력이 갈수록 바닥나니 생각도 약해집니다. 눈물이 많아지니 두려움도 커졌던 모양입니다. 분명 이 따위로 살려고 밥을 축내고 있진 않을 텐데, 고작 일상에 쫄아 두려움에 떨어선 안 될 텐데, 걱정을 떨칠 수 없습니다. 아직 길을 찾지 못했고 찾으려 하지도 않는 내 자신의 모습이 스스로도 봐주기 어렵습니다. 가련한 안락을 즐기다 겁마저 많아지고 있습니다. 아무데도, 누구와도 드러내고 즐기지 못하는 시시함이 더해져 볼품없는 인간이 된 것 같습니다.

생각건대 오늘 출근 길에 불현듯 내게 들이쳤던 질문은 나에게 화답하는 그 사나이의 말이 아닐까 했던 것입니다. 그 사내는 항상 사람들에게 스스로 묻게 했습니다. 내 인생은 스스로 아름다웠다 말할 수 있는가? 너의 오늘은 어제보다 아름다웠는가? 그러고 보니 지금 한국은 봄이 한창입니다. 산 언저리에 벚나무가 꽃을 피워 산 전체가 열병을 앓고 있겠지요. 아, 알겠습니다. 꽃은 시드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피지 못하는 걸 두려워한다는 것을요. 나는 여전히 시드는 걸 두려워하고 있으니 피워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혼자 터지는 벚꽃은 꽃을 틔울 때 남의 눈치를 보지 않습니다. 동백은 꼿꼿했으므로 싹둑 떨어지는 그 순간을 끝까지 즐기는 것 같습니다. 바다가 태풍을 만들어낼 때는 누군가 시켜서 그렇게 하진 않습니다. 사바나 초원에 영양의 새끼는 태어나자마자 뛸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초원 전체로 퍼진 피냄새를 맡은 맹수들이 달려 듭니다. 이렇게, 세상의 생명은 그 자체로 완벽하고 그 자체로 완성입니다. 그에 비하면 인간은 나약합니다. 인간은 늘 누군가의 눈치를 봅니다. 누군가 시켜야 배우고, 일을 합니다. 태어나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누군가 품에 안고 돌보지 않으면 안 되는 존재입니다. 존재를 놓고 존재의 정당성을 찾거나 존재감이라는 단어와 사유를 발명해내고, 미친듯이 존재감을 찾고 느껴야 비로소 존재하는 줄 아는 허약함이 바로 인간입니다. 존재감이라는 생각을 죽을 때까지 항상 해야 하는 건 인간만이 하는 일이라는 걸 늦게나마 알게 됩니다. 인간만이 눈치보고 미숙하고 지배당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내가 가진 두려움도 조금 이해가 됩니다. 그 사내도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선지 그 사내는 눈치 볼 수밖에 없는 약자를 위해 마지막까지 살았던 것 같습니다. 약자는 강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데 세상에 널려 있는 강자들의 눈치만 살피다 내면에 있는 자기 안의 강자의 꽃을 피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래서 늘 ‘네 꽃도 언젠가 핀다’는 말을 달고 살았지요. 꺼지기를 겁내지 말고 활활 타지 못함을 자책하라며 불쏘시개 부지깽이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약해 빠진 인간들을 모아 놓고 ‘창조적 부적응자’로 추켜세웠습니다. 그의 말은 누군가에게 꿈으로 걸어가게 하는 용기가 되었고 또 누군가에겐 다시 타오르는 삶의 의지가 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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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로부터 2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변명하자면, 눈치보지 말고 세상과 맞붙어라는 그의 말은 때론 숨겨져 있었고 더러는 속삭임처럼 나긋했으므로 나는 그의 무시무시한 말을 알아차릴 수 없었는지 모릅니다. 아닙니다. 솔직하게 말해야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주술의 진위를 알게 된 후에 저는 두려웠습니다. 거친 삶을 미리 예견했고, 삶을 송두리째 걸어야 비로소 닿을 수 있는 그 길이 무서워 애초부터 비겁하게 알아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한발 빼는 야비함이었습니다. 그 사내가 하는 명령에 나는 이것저것 현실의 핑계를 댔고, 직장 상사의 눈치를 살폈고, 아내, 자식의 존재를 방패삼아 사나운 삶을 지레짐작으로 그렸고, 보기 좋게 뭉개며 빠져나갔습니다. 인화성 짙은 일들을 애써 피하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사는 게 편안했고 사건에 휘말릴 일도 없고 환희도 없었겠지만 몰락도 없으니 그럭저럭 살기 좋았습니다. 이제는 점점 빠져나올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옴을 느낍니다. 그는 이제 제 옆에 없지만 그의 호통이 여기까지 들리니 말입니다. 언제나 그랬듯 한 발 앞선 말을 선문답처럼 넌지시 건네던 그 사내는 저의 얍삽함을 알고 있었다는 듯, ‘어리석은 놈아, 이래도 못 알아먹느냐’ 하며 이젠 제법 힘을 주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유난히 생각나는 스승을 소환하여 그의 사자후를 또박 또박, 얼굴이 무너지게 웃는 그를 두고 내 얼굴이 무너지는 걸 억지로 참으며 읽습니다. “어느 날 어떤 일에 공명해 떨림을 얻게 되면 그 문, 그 길로 들어서라. 의심하면 안 된다. 모두 버리고 그 길로 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자기혁명이다.” -구본형-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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