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나이를 드러내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아닌지 판단이 선뜻 서지 않는다. 이렇게 자신의 나이를 밝히는 것을 망설이는 것을 보면 나이의 공개가 현명 여부를 떠나 스스로 원치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 왜? 아마도 이제 사회적으로 효용가치가 감소된 일원으로 인정되는 나이를 드러내는 것이 내세울만한 일이라 보지 않는 탓이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난 4월 초 필자는 한국 나이로 70, 즉 고희를 맞았다. 요즘 칠순이 뭐 대세냐 하면 별다른 생각 없이 넘어가긴 했는데, ‘ 예전부터 흔한 일이 아니다’ 라는 뜻을 가진 古稀라는 단어를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냥 아무 일이 아닌 양 지나가기에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고희라는 단어는 중국 두보(杜甫)의 곡강(曲江) 시에 「술빚은 보통 가는 곳마다 있으니 결국 인생은 기껏 살아 본들 70 세는 옛날로부터 드물다. (酒債尋常行處有하니 人生七十古來稀 라.)」란 승구 중 고(古) 자와 희(稀) 자만을 써서「고희(古稀)」란 단어를 만들어 70 세로 대신 쓴 것이다.
그렇게 옛부터 흔치 않은 길고 긴 세월을 살았으니 그 행운을 축하할 만 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하긴 필자의 죽마고우 4명 중 2명이 암으로 먼저 하늘로 올라간 것이 이미 수년전의 일이고 보면 아직까지 살고 있다는 것이 그냥 보통의 일로 다루어지는 것보다는 무게가 있을 듯 하다.
그렇게 흔치 않은 생을 살았다는 증거가 되는 칠순 날을 이국에서 맞은 필자는 매년 그렇듯이 그저 그동안 살아온 날을 다시 한번 세어보고 반대 급부로 남아있는 세월을 대충 꼽아보는 일로 하루를 보냈다.
코로나로 오가지 못하는 세상이라 가족들의 축하는 카톡 메시지로 때우고, 그나마 카톡 메시지는 단지 립서비스일 뿐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에게는 그것마저 생략되었다. 그리고 그때 마침 베트남에 입국한 집 사람은 난세에 움직인 댓가로 2주간의 격리 상태라 그 역시 온라인 인사로 넘어갔다. 그나마 가장 많은 인사를 받은 친구들은 페이스북 친구들이다. 세상이 온라인화 되는 것을 실감하지만 온라인 축하가 아직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항상 필자와 함께 호흡하는 회사 직원들로부터 커다란 케익과 정성을 모아 준비한 선물을 한아름 받았다는 것이다. 위안 정도가 아니라 깊은 고마움에 은근히 눈물이 고일 판이다.
일생을 살면서 개인을 위한 이벤트가 얼마나 많은가?
물론 입신양명을 한 인생에게는 넘치도록 많은 개인 이벤트가 줄을 있겠지만 그저 한 가족 이루고 그 가족 먹여살린 것이 자신이 내놓을 성공 스토리의 대부분인 일반인에게는 그나마 매년 돌아오는 생일이 유일한 개인 이벤트다.
그러니 그날은 좀 특별하게 당사자를 위한 시간을 할애하며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설사 그것이 온라인 축하라고 하더라도 마음을 담아 보낸다면 충분히 그 사랑을 알아줄 것이라 믿는다.
나이 칠십을 고희라 하는 것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두보의 시구절을 인용한 것이고, 공자은 나이 칠십을 종심이라 했다.
從心所欲 不踰矩 (종심소유 불유구)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하여도 법도를 넘어서거나 어긋나지 않았다` 에서 앞 글자만 따내어 종심이라 칭했다.
이 말은 정말 맘에 든다. 제 맘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여도 사회적으로 지탄은 커녕 나름 인정받는다는 소리인데,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예전에 40에 이르렀을 때 공자 형님이 하신 말씀, 40의 불혹이라는 말에 어찌 그런 경지 –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 – 를 고작 40에 이룰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었는데 그 의문은 사실 불혹이라는 말을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된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공자님이 말씀하신 불혹이란 유혹에 빠지지 않는다는 소리라기 보다 사리를 구별할 줄 안다는 의미다. 세상의 수많은 주장이나 의견 등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누가 입 맞는 소리를 하며 구술려도 그런 말에 넘어가 엉뚱한 실수를 하지 않는다는 소리다. 한마디로 세상의 이치가 어찌 돌아가는 것 정도는 안다는 수준이 40의 불혹이다.
그리고 진정 미혹되지 않은 확실한 불혹은 바로 세상의 모든 유혹에도 그저 미소로 답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를 70의 종심을 의미하는 듯하다. 그래서 예전부터 이날이 오기를 은근히 기다려 왔다.
그런데 정작 70이 된 지금, 종심의 경지에 올랐는가 하고 돌아보면, 택도 없는 소리다.
사회적으로 별다른 흔적을 남기지 못한 그저 평범한 군상이 나이만 찼다고 함부로 행동하고 말을 내뱉다가는 이른 나이에 노망들었다는 소리나 안들으면 다행이다.
즉, 종심의 경지도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얼마 전 윤여정이라는 75살 먹은 한국 여배우가 영국의 아카데미 상이라는 BAFTA( The Orange British Academy Film Award) 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면서 영국인을 빗대어 고상한 척하는 의미의 SNOBBISH 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이목을 끈 적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냈다. 망설이거나 머뭇거리지도 않고 평소의 그녀의 생각을 수많은 대중들에게 실시간으로 그대로 내보였다. 좀 위험스러워 보이는 그 말이 떨어지는 그 순간, 뭔가 아찔 할 수 있다는 예감이 스쳤지만 모든 이는 다 같이 그녀의 말에 동의를 하며 통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영국인의 콧대높기는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얘기라 별로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배가 다 침몰하는 상황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질서를 지키지 않자 선장이 한마디 한다.
단 한마디, BE ENGLISH !
애써 해석을 하자면 영국인답게 위엄있게 행동하라는 뜻이다.
그런 영국인들에게 너희는 좀 고상한 척하는 국민이잖어 하는 소리를 하고도 여전히 살아남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아마 젊은 배우가 그런 소리를 했다면 잘은 몰라도 엄청난 후 폭풍에 시달려 참회의 시간으로 반 백년은 보내야 할 것이다.
윤여정 배우의 말을 듣고 바로 이런 것이 종심의 경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즉 종심의 경지란, 70이 되어 그냥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그 긴세월 동안 그에 어울리는 경험과 경륜을 쌓아 타인으로부터 인정 받았다는 조건을 전제로 하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윤여정의 경우, 한 분야에서 50년을 넘게 일하여 깊은 경험을 통해 그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고 또 늘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살아왔던 터라 그런 자리에서 조차 자신의 생각을 드러낸다고 해도 스스로 꺼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 모든 제약에서 해방된 상태, 사회의 어떤 형태의 제약이나 구속에서 스스로 자유로워질 정도의 경륜과 수양을 쌓은 사람이 누리는 수준. 이런 수준에 이르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안다.
40의 불혹이 준 절망을 종심으로 씻으려 30년을 보냈는데 종심 역시 여전히 무거운 과제로 남아 자신을 초라하게 만든다. 그래도 막연하기만 했던 종심의 실체를 조금은 깨닭은 것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언젠가 필자 역시 진정한 종심의 세계에서 마음의 평안을 누릴 날이 오리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