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3,Saturday

삼국통일의 완성

지난 이야기
삼국시대 전쟁이 가장 치열했던 7세기 중반 고구려 백제 연합군에 의해 한강유역을 침범 당하고 백제에게 대야성이 함락된 신라는 비담의 반란까지 겹쳐 국가 존립이 위태 했습니다. 그러나 김춘추는 외교력을 발휘하고 김유신은 뛰어난 군대 통솔력으로 신라는 위기를 극복 합니다 입지가 강화된 김춘추와 김유신은 신라를 이끌며 권토중래 합니다. 이렇게 위기를 극복한 신라는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아갑니다.

삼국통일 전쟁의 시작
삼국통일 전쟁이 일어나기 20년 전부터 삼국은 치열하게 싸웁니다. 먼저 백제의 멸망 과정을 살펴봅시다. 의자왕은 641년 즉위하자 마자 귀족들의 권한을 약화 시킵니다. 이때부터 백제에는 귀족들의 불만이 생깁니다. 왕권을 강화시킨 의자왕은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와 당나라의 연결 통로인 당항성을 공격합니다. 또한 윤충 장군을 보내 신라의 요충지 대야성을 함락시킵니다. 이렇게 의욕적인 의자왕이 655년경부터 달라집니다. 충신을 멀리하고 술과 여자에 빠집니다. 화랑세기에는 “의자왕이 은고라는 여인에게 빠졌는데 은고는 신라의 첩자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랑세기는 신빙성이 떨어져서 진실 여부는 모릅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백제의 좌평 임자는 전쟁 포로 조미갑을 노비로 데리고 있었는데 조미갑이 성실하여 임자가 매우 신임했습니다. 하루는 조미갑이 임자에게 백제의 미래를 알 수 없으니 김유신과 교분을 가져 훗날을 대비하라고 말합니다. 전략의 귀재 김유신은 임자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냅니다. “앞으로 신라와 백제는 큰 전쟁이 벌어질 것 같은데 백제가 이기면 그대가 나를 도와주고 신라가 이기면 내가 그대를 도우겠소.” 김유신의 편지를 받은 임자는 몇 달간 고민하다가 김유신의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

그때부터 백제의 고급 정보가 신라에 들어갑니다. 또한 김유신은 성충을 제거해야 백제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임자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편지를 보냅니다. “의자왕은 그대와 성충 중 누구를 더 신임하오? 왜 의자왕은 그대와 같은 인재를 몰라보고 성충을 신임하는지 아시오? 성충은 품성이 음흉하여 항상 의자왕을 불안하게 만들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오. 이런 사실을 의자왕에게 알려야 하오.” 나라가 망하는 첫째 이유가 내부의 분열입니다. 임자는 미인계를 쓰고 동시에 의자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합니다. 자존심이 상한 의자왕은 성충을 하옥 시키고 흥수를 귀양 보냅니다. 백제의 운명이 다했다고 생각한 성충은 죽기 전에 감옥에서 마지막으로 유언 상소를 올립니다.
“신 성충 아룁니다. 신이 생각컨데 곧 큰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적의 수군은 백강 기벌포에서 막고 적의 육군은 탄현에서 막으면 됩니다. 대왕께서도 아시는 바와 같이 기벌포와 탄현은 천험의 요새입니다”
유언 상소를 올린 성충은 감옥에서 굶어 죽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의자왕이 음식을 주지 않아서 성충이 굶어 죽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역사 학자들은 성충이 단식하여 죽은 것으로 추측합니다.

성충이 유언 상소를 보낸 3년 후 당나라 수군 20만 신라 육군 5만이 백제를 침략합니다. 당황한 의자왕은 귀양 보낸 흥수에게 계책을 묻습니다. 흥수의 계책도 성충과 같습니다. 하지만 간신들은 “성충과 흥수는 대왕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는데 옳은 계책을 주겠습니까?” 라고 의자왕에게 말합니다. 간신들의 말이 그럴 듯 하다고 믿은 의자왕은 마지막 기회를 잃어 버립니다. 마지막 남은 백제의 충신 계백은 결사대 5천을 모집하여 황산벌로 출전을 합니다. 백제의 운명이 다한 것을 짐작한 계백 장군은 가족들을 죽이고 자신과 5천 결사대 모두 전사합니다. 황산벌 전투에서 죽을 각오로 싸우는 백제군에 고전하던 김유신은 반굴과 관창 두 어린 소년을 희생 시키고 승리합니다. 이렇게 백제는 멸망하고 의자왕과 태자 부여융은 신라 태종 무열왕 김춘추 당나라 장수 소정방 앞에 무릎을 꿇고 술을 올립니다. 이때 김춘추는 의자왕을 침을 뱉고 발로 차면서 욕을 합니다. “내 딸 고타소를 죽인 원수야” 그리고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에게 아내를 뺏기고 신라를 배반한 검일 형제를 잡아 몸을 토막 내 죽입니다. 개인의 살인 사건도 아닌 국가간 전쟁으로 인해 딸이 죽었는데 의자왕과 검일 형제에게 복수를 한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행동은 일국의 왕이 아닌 소인배의 행동 입니다. 그로인해 지켜보던 모든 백제의 군사들은 눈물을 흘리며 백제를 살리는 부흥 운동을 결심합니다. 특히 31세의 젊은 청년 장수 흑치상지는 백제 부흥군을 이끌며 활약을 합니다. 백제 멸망 다음해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죽었으나 그의 아들 문무왕은 백제 부흥군 때문에 3년간 고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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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멸망
서기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663년 백제 부흥군 마저 패배합니다. 그렇게 백제는 사라집니다. 이제 고구려 멸망 과정을 살펴봅시다. 고구려 멸망 26년 전 서기 642년 대당 외교 강경파 무장 연개소문은 반란을 일으킵니다. 영류왕과 100명 넘는 대신들을 살해하고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당나라 침략에 대비합니다.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는 644년부터 소규모 부대로 고구려를 자극합니다. 고구려도 이에 대응하여 요서지방 군수기지 영주를 (현재의 조양) 공격합니다. 645년 드디어 당 태종 이세민은 30만 대군으로 고구려와 전면전을 벌입니다.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할 때, 당나라 동맹국 신라는 고구려 남쪽 국경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고구려 동맹국 백제가 출동하자, 신라군은 퇴각합니다. 이렇게 당시에는 개별적 전쟁이 아닌 국가간 연합전선을 구축 합니다.
고당 전쟁의 결과는 고구려의 승리로 끝납니다. 성충의 제안을 받아들여 고구려와 동맹을 맺은 백제 의자왕의 선택은 옳은 듯 보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가 존재하는 한 당나라의 고구려 침략은 힘들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의자왕은 오직 신라만 견제합니다. 의자왕의 이러한 생각 때문에 나중에 백제가 멸망하게 됩니다. 660년 소정방의 20만 군대가 백제를 침략 한다는 정보가 있을 때, 고구려가 건재하면 당군은 침략 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무시했고 결국 백제는 망하게 됩니다.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내부 분열로 망하게 되는데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에 논란이 좀 있습니다. 중국 측 기록에는 전부 666년 연개소문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신채호 선생의 조선 상고사는 657년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가 왜 논란이 될까요?

이유를 살펴봅시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살아 있을 때 666년 이미 고구려 요동 방어선이 무너지고 사실상 고구려는 멸망한 상태가 됩니다. 신채호 선생의 주장에 의하면 연개소문이 살아 있을 때 당나라는 고구려가 두려워서 침략을 못했는데 중국인들은 이를 수치로 여겨 연개소문의 사망 연도 657년을 9년 뒤 666년으로 조작했다고 합니다. 경극에도 자주 등장하는 연개소문은 중국인들의 공포의 대상입니다. 중국 3대 황제 중 한명인 당 태종 이세민도 극복하지 못한 연개소문 입니다. 또한 1932년 발견된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의 묘지석에는 657년 고구려 막리지 및 군 최고 사령관인 대장군의 지위를 계승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개인의 기록인 묘지석은 당대의 기록이며 왜곡된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 연개소문의 생전에 권력을 미리 이어 받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채호 선생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고 형제들의 권력 쟁탈전 때문에 멸망한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권력 쟁탈전에서 밀려난 연남생은 당나라에 투항하여 고구려의 군사 기밀을 당나라에 제공하고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할 때 안내자 역할까지 합니다. 고구려 멸망 500년 전 고국천왕이 죽고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발기의 경우와 같습니다. 당시 고구려 사령관은 발기의 동생 계수입니다. 계수는 중국 군대를 몰고 고구려를 침략 했던 발기에게 했던 유명한 말이 있죠.

“왕권 승계의 순서를 어긴 작은 형님 연우의 (산상왕) 잘못이 있다 하지만 아무리 원통해도 원수의 나라에 투항하고, 게다가 조국을 멸망시키고 백성들을 죽이려고 적군의 군대를 이끌고 오는 큰 형님의 잘못과 견줄 수 있겠습니까?”

막내 동생 계수의 말을 듣고 발기는 부끄러워 자결을 합니다. 하지만 연남생은 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킨 고구려를 멸망 시키고 당나라에서 영화를 누리고 살다가 갑니다.
660년 백제 의자왕은 항복했으나 어디까지나 중앙정부의 항복입니다. 대다수의 지방에 주둔한 군대는 건재한 상태였죠. 게다가 부여성 함락 당시 탈출한 장수와 군대의 합류로 백제 부흥군의 수는 날로 늘어났습니다. 흑치상지 지수신 복신 도침 부여풍 등이 이끄는 부흥군은 당군을 공격합니다. 처음에는 백제 부흥군 토벌에 고생하던 문무왕은 백제 부흥군이 주로 당군을 공격하자 은근히 방치합니다. 그리고 “삼한일가”라는 용어를 사용합니다. 즉 삼국은 한 집안이며 한 민족이라는 개념을 심어줍니다. 하지만 백제 부흥군도 내분 때문에 실패하고 663년 백제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는 멸망 과정이 백제와 좀 다릅니다. 백제처럼 중앙정부가 먼저 항복한 것이 아니라 3년간 요동 방어선이 붕괴되고 당나라 군대가 차근차근 남하하여 평양성을 포위합니다. 신라는 평양성 포위 때 참전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강직한 무장들의 부흥운동이 전개됩니다. 삼국을 통일한 후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집어 삼키려 합니다. 문무왕은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의 협조 없이 당나라 군대를 몰아낼 수 없다고 판단하여 고구려와 백제 유민들로 구성된 별도의 부대를 조직 합니다. 이렇게 민족개념을 사용하여 하나로 뭉친 삼국이 당나라 군대를 몰아내고 통일을 완수 합니다만 영토가 대동강 원산만 이남으로 축소되어 안타까운 사실입니다.

다음 이야기
고대 역사는 사료가 부족하여 합리적인 추측으로 해석할 때가 많아서 고대사 미스터리가 많습니다. 삼국통일 과정의 “고대사 미스터리” 다음 시간에 함께 살펴봅시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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