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성공은 독(毒)이다. 과거에 이루어 낸 일들에 대한 집착은 다가올 성공을 가로 막는다. 지금 오르는 봉우리를 위해서는 이전에 올랐던 봉우리는 잊어야 한다. 오직 더 이상 오를 곳 없는 사람만이 과거의 빛나던 순간을 회상한다. 과거는 대부분 그 당시에 빛나지 않았더라도 회상하는 순간 빛났던 것으로 뒤 바뀌는데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삶 전체가 부정 당하기 때문이다. 회상에 의한 과거의 의식적 분칠은 삶이 허망하다는 사실을 부인하려는 인간의 방어기제다.
아무도 그대의 빛났던 과거를 부정하지 않는다. 자신이 과거에 했던 일은 탁월했고 지금, 과거 자신과 같은 업무를 하는 사람은 뭔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꼰대들이 세상에는 많다. 그때는 모든 것이 좋았고 지금은 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더는 봐줄 수 없는 노회함에 사로잡힌 것이다. 그대가 아니길 바란다. 과거에 붙들리면 한 치 앞도 나아가지 못한다.
봉우리는 봉우리만의 난해함을 가진다. 지나간 봉우리는 끼니와 같아서 오르려는 봉우리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의 높이를 생각하고 데날리(Denali, 북미대륙 최고봉, 6,194m)를 오를 때 에베레스트(8,848m)보다 낮다 하여 물로 보다간 큰 코 다친다. 날고 기던 산악 영웅들은 데날리에서 죄다 운명을 달리 했다. 데날리는 산악영웅들의 무덤이다. 북극권 거봉에는 습한 돌풍이 분다. 온대지역의 온축 위에 높은 고도로 인한 추위가 히말라야의 추위라면 한대지역의 냉축 위에 서 있는 봉우리가 데날리다. 추위의 기본 레벨이 다르다는 말이겠다. 북극지방의 매서운 추위를 히말라야의 마른 바람에 예견하여 오르면 낭패를 본다. 꼭 그와 같은 마음을 먹고 올라 낭패를 봤다. 그대는 여기를 바라보지 않고 늘 먼 미래 어딘가만 바라보고 있다. ‘여기 지금’을 살지 않고 과거 빛나던 순간만을 기억한 채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닌 그렇다고 지금도 아닌 지금을 살고 있다. 쓸데없는 일이다. 이를테면 그 시절, 그 시기, 그 순간이 자신에게 너무도 강렬하여 시간을 건너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시대를 건너오지 못하고 머무르는 것이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늘 그때의 이야기만 한다. 그때의 환희로 사는 사람들이다. 마찬가지로 지금 눈 앞에 대화하는 사람의 아픔을 제쳐 두고 다가올 미래만 말한다. 4차 산업혁명이니 AI니 하는 것들을 두고 마치 진리의 담지자인 양 교주와 같이 말하지만 나는 다만 인간을 갉아먹지나 않을지 걱정될 뿐이다.
지금 사는 꼬라지가 꼭 그 순간을 벗어나지 못하니 아래로 열려 있으나 위로 닫혀 있는 사면초가다. 주역 64괘 중 마지막이 화수미제(火水未濟) 라는 것을 잊지 마라.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다. 마칠 수 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인생이 아름다운 건 이미 가진 것이 이미 많아서가 아니다. 과거에 이룬 일로 누리고 즐길 것이 많아서가 아니다. 없는 것을 부지런히 만들어내고 가지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그 과정 속에 인생의 참다운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 것이다.’
삶은 멈추지 않고 머물지도 않으며 고이지도 않는다. 그때는 옳고 지금은 틀리는가? 되는 게 하나 없다는 생각의 근원은 과거에 무게중심을 놓고 살기 때문이다. 지나간 봉우리는 잊자. 지금을 어엿하게 살아갈 수 없다면 그때도, 앞으로도 제대로 사는 게 아니다.
지나간 봉우리는 마음이 만든다. 자극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가는 것이 마음이다. 인간은 내 자신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도 구분하지 못하는 광기와 허망함 위에 서있다. 그런 인간이 생각하는 마음은 늘 지금을 제쳐 두고 과거와 미래의 환상을 쫓기 때문이다. 달리려는 마음을 멈춰 세우라. 사사로이 이어가려는 마음을 끊어버리는 연습이 필요할지 모른다. 더 가지지 못해 안달하기보다 가지려는 그 마음을 멈추는 것이 현명하다. 남들보다 적게 가진 부끄러움과 더 가진 자들을 향한 부러움으로 죽어 나가는 사람들이 어디 한 둘인가. 영원히 살 것 같은 마음도 죽음이라는 단명함을 인식해야 나와 내 주변의 모든 존재들이 소중함으로 재구성된다.
과거는 후회를 필연적으로 소환한다. 후회라는 것은 늘 오만함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오만함은 의젓함이 아니라 언제나 자신이 가진 물적 환상에서 나온다. 그 토대가 마음이라는 환상이다. 그것은 욕심을 만들고 분노를 내뿜게 하고 희망과 절망도 생산한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평생 이 환상들과 싸우는지 모른다. 선이든 악이든 도덕이든 윤리든 시비 판단이든 지금을 떠나지 않고 멈출 때 그 배후가 확연하게 드러나는데 그 배후는 마음이고 마음은 언제나 과거의 기억에 의해 지배당한다. 그러므로 마음은 늘 지나간 봉우리, 과거를 지향한다.
무언가를 지독하게 삶에 끌어들여 노력했지만 쌓이지 않았고 잡지 못했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저 흘러갔다. 그때 그때 받은 월급처럼 지나간 삶은 모두 쓰여졌고 사라졌다. 기껏 남은 은행 대출처럼 너저분한 직급과 직함이 명함이라는 종이 쪼가리에 남았을 뿐이다. 경로에 의존되는 삶의 관성은 아무것도 과거로 되돌려 놓지 못한다. 과거를 헤매면 헤맬수록 선명해지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가는 길로 돌진했다는 책망뿐이다. 나의 길이 아닌 곳에서 성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실패의 정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길은 무엇인가, 나의 길은 있을까? 불행은 우리로 하여금 질문하게 만드는 데 이것이 불행의 위대함이다. 잗다란 과거 성공의 기억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이 위대한 불행에 동참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위대함은 그 안에 몰락을 품고 있다. 이 위대함에 사로잡힌 사람은 자신을 자진(自盡)에 이를 때까지 밀어 부친다. 오로지 밀어 부치는 중에는 지난 성공과 지나간 봉우리가 다시 솟구치지 않도록 자신의 발 밑에 둔다.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 과거에 더는 사로잡히지 않는 것, 지나간 봉우리를 잊는다는 건, 오늘 아침 가져온 우산 같은 건 잊어버리고 내 앞에 벌어지는 사건에 기꺼이 휘말릴 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