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재즈, 뮤지컬, 팝 영역을 종횡무진하며 장르의 정형성을 뛰어 넘었던 작곡가 ‘조지 거쉰’. 그는 미국 작곡가로서는 최초로 클래식와 재즈를 완벽히 융합해 냈다. 가끔, 그를 클래식과 재즈의 경계지점에 머물러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했던 애매한 장르의 주인공이라고 야박한 소리를 하는 이들도 있지만, 조지 거쉰은 누가 뭐라 해도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의 기운을 받은, 미국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음악을 창조한 천재 음악가이다. 비록 짧지만 39년이라는 생애 동안 그 어느 작곡가보다 다양한 장르를 통해 500여곡 이상의 작품을 우리에게 남겨준 조지 거쉰. 그는 어떻게 미국 크로스오버 음악의 ‘파이오니아’가 되었을까? 그 첫번째 이야기이다.
‘크로스오버’의 태동
거쉰은 유태계 러시안 ‘모리스 게르쇼비츠’의 4남매 중 차남이다. 1890년대, 러시아 본국의 박해를 피해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메리칸 드림’ 을 꿈꾸며 미국행 증기선에 올라탔을 당시, 게르쇼비츠 역시 ‘자유와 기회의 땅’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민자의 삶은 녹록치 않았다. 너무나 많은 가능성으로 넘실대던 뉴욕의 분위기에 휩쓸려 여러 사업을 시작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그 결과 온 가족은 할렘가를 전전했다. 그래도 아이들의 음악교육을 위해 중고 피아노 하나를 장만해 장남 ‘아이라’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별다른 소질을 보이지 않았다. 반면, 배우지도 않고 형의 피아노 멜로디를 그대로 흉내 내는 조지를 본 게르쇼비츠는 음악을 배울 녀석이 둘째임을 알게 되었다. 곧바로 피아노 교습이 시작되었고, 조지의 재능에 피아노 선생님은 탄복했다. 하지만 음악적 소질과는 별개로 학교 공부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조지는 이미 십대 초반부터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이면 할렘가 선술집 주위를 돌아다녔다. 술집에서 흘러 나오는 재즈와 블루스 음악을 듣는 재미에 푹 빠져서였다. 피아노 선생님은 조지에게 열심히 클래식 피아노 테크닉과 화성법을 가르쳤지만, 어린 소년의 마음은 온통 ‘래그타임’의 리듬과 선율로 가득차 있었다.
결국 조지는 열 다섯살 때 학교를 나와 한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뉴욕시에는 ‘양철 냄비 골목’이라는 뜻의 ‘틴 팬 앨리’ 지역이 있었다. 그 골목에는 뉴욕의 거의 모든 출판사들이 모여 있었는데, 조지는 그 곳에 있는 ‘리믹’ 악보 출판사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다. 19세기 미국에 등장한 유성기와 라디오 덕분에 음반제작과 라디오 방송이 활성화 되면서 출판사들은 새로운 악보를 홍보, 판매하기 위한 참신한 마케팅 전략이 필요했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송 플러거’라는 직업이다. 송 플러거는 서점에 온 손님들에게 새로운 곡들을 연주해 주며 악보를 소개하는 사람이었다. 조지는 틴팬앨리에서 가장 어린 피아노 연주자였지만, 악보 판매부수가 가장 높기로 유명한 소년이었다. 서점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조지의 매력적인 연주에 홀려 계획에도 없던 악보를 한 꾸러미씩 사 가곤 했다. 송 플러거로 일을 하던 몇 년동안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의 대중음악을 접하게 된 조지는 언젠가부터 슬금슬금 자신의 짧은 노래들을 끄적이기 시작하더니, 21세 때 뮤지컬 ‘스와니강’을 통해 첫번째로 자신의 노래를 발표하게 되었다. 드라마틱한 일이 벌어졌다. 스와니강의 악보와 레코드판이 300만장 이상 팔리면서 청년 거쉰의 이름이 브로드웨이에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당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는 유럽 오페레타 등의 영향을 받은 뮤지컬이 급부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할렘에서 접한 재즈, 블루스, 흑인 영가 덕분에 지극히 미국적인 색채의 음악을
지향하던 그는 천부적인 선율 감각을 무기로 해 브로드웨이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얼마가지 않아 ‘폴 화이트먼’의 제안을 받게 되는데…
재즈인가 클래식인가, 그것이 알고 싶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재즈의 시대’ 를 맞이한 미국에서는 뉴욕 할렘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재즈 음악가들이 상당히 많아졌다. 그들 중에서도 뛰어난 연출력과 탁월한 기획력으로 인기몰이를 하던 재즈 밴드의 리더 ‘폴 화이트먼’은 획기적인 콘서트를 기획하고 있었다. 일전에 거쉰의 1막짜리 오페레타 <블루 먼데이>를 보고 반했던 그는 거쉰에게 ‘협주곡 형식의 재즈’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거쉰은 당장 눈 앞에 닥친 작품들을 소화하느라 화이트먼에게 확실한 답변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버디 드 실바’와 당구를 치고 있던 거쉰은 우연히 <뉴욕 트리뷴>지의 한 대목을 읽게 되었다. ‘미국음악이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이 달린 화이트먼의 콘서트 리뷰 기사였는데, 기사의 마지막 단락을 읽던 거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조지 거쉰은 재즈 협주곡을 작곡 중이고, 어빙 벌린은 싱코페이션(당김음)을 쓴 교향시를, 빅터 허버트는 미국 모음곡을 작곡하고 있다.” 라고 쓰여 있었다. 실바가 거쉰에게 물었다. “이봐 거쉰, 자네 지금 화이트먼이 부탁한 재즈 협주곡을 작곡하고 있기는 한거야?” 이런저런 핑계로 손도 대지 못한 작품이 이런 식으로 신문에 나오자 거쉰은 화이트먼에게 전화를 걸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알게 된 사실인 즉, 화이트먼의 라이벌인 ‘빈센트 로페스’가 재즈와 클래식을 융합하려는 자신의 실험을 표절해서 먼저 선수 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거쉰은 갑자기 승부욕이 발동했다. 그러더니 단 5주만에 화이트먼이 요청했던 작품을 완성해 냈다. 다만, 당시 오케스트레이션(관현악 작곡 기법)에 관해 경험이 부족했던 거쉰은 이 작품을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만들어 ‘아메리칸 랩소디’라고 악보에 적었다. 그 때 거쉰의 형 ‘아이라(훗날 거쉰의 모든 노래에 가사를 쓴 작사가’)는 타이틀에서부터 재즈 냄새가 확실히 나야 할 것 같다며 <랩소디 인 블루>라는 제목을 제안했다. 형의 의견을 받아들여 완성된 ‘랩소디 인 블루’는 화이트먼에게 넘겨졌고, 밴드의 편곡자인 ‘퍼이 그로페’는 이것을 ‘피아노 솔로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으로 편곡해 주었다.
1924년 2월 12일, 폴 화이트먼이 ‘현대음악의 실험’이라는 타이틀로 기획한 콘서트에서 ‘랩소디 인 블루’는 초연되었다. 초연 당시의 비화가 인상적이다. 총 11개의 섹션, 악장 수가 25개에 이르렀던 장황한 프로그램이었다. 길고 긴 프로그램 앞엔 장사가 없다. 프로그램의 후반부로 갈수록 청중들은 모든 작품의 소리가 비슷한 것처럼 들렸다. 지루해져 하품을 하는가 하면, 아예 잠에 든 사람들, 참지 못하고 자리를 떠나려는 사람들도 있었다. 바로 그 때, 무대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름 아닌 거쉰의 협주곡이 시작된 것이었다. 순차적으로 17개의 음을 끌어올리는 클라리넷의 글리산도 주법이 청중들에게는 사이렌 소리처럼 들렸다. 그런데 이 사이렌 같은 도입부는 화이트먼 밴드의 클라리넷 주자인 ‘로스 고먼’ 이 리허설 때 입을 풀며 거쉰에게 장난친 것을 거쉰이 실제 콘서트에서 응용한 것이라니…
이후, 거쉰의 즉흥적인 재즈 독주가 시작되자 졸고 있던 관객들은 하나 둘 잠에서 깼고, 자리를 떠나려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 그만 얼어붙은 채 무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들어본 적 없었던 독특한 음악. 클래식과 래그타임을 넘나드는 피아노와 오케스트라의 환상적인 하모니, 신박한 스윙. 이거였다!! 이런 게 정말 미국의 음악이지!! 거쉰의 협주곡은 화이트먼이 기획한 ‘현대음악의 실험’ 이라는 콘서트 제목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음악이었다. 그런데…이것의 장르는 뭐지? 클래식? 재즈? 아니다. 이것은 정통재즈도 아니고 클래식도 아닌, 그렇다고 팝음악은 더욱 더 아닌, 재즈와 클래식을 절묘하게 버무린 ‘거쉰의 음악’이었다. 초연은 잭 팟을 터뜨렸고, 다음 날 뉴욕의 매체들은 앞다투어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미국 음악”이라는 찬사를 쏟아냈다.
귀부인이 된 재즈,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
‘랩소디 인 블루’의 초연에는 뉴욕 심포니의 상임 지휘자 ‘월터 담로쉬’가 앉아 있었다. 담로쉬는 이전의 그 어떤 음악가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던 거쉰풍 음악이 주는 신선함에 자극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다음 날, 거쉰의 아파트를 찾아가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콘서트에 사용할 작품을 의뢰했다. 전제 조건은, ’랩소디 인 블루’보다 좀 더 ‘정통 협주곡을 가미한 재즈 피아노 협주곡’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었다. ‘정통 재즈가 아닌 정통 협주곡을 가미한 재즈 피아노 협주곡이라…?” 난해한 주문이었다. 어린 시절 잠시 피아노 수업을 받았지만, 클래식 전문학교에서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은 적 없이 독학으로 곡을 써왔던 그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를 위한 협주곡을 작곡해야 한다는 생각에 겁이 덜컥 났다. 하지만 고민만 하고 있을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 화성법과 관현악기론에 관한 서적을 한아름 사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 년이 넘는 시간동안 그는 독학으로 오케스트레이션에 관한 공부를 했다, 아주 치열하게.
1925년 12월 3일. 거쉰은 담로쉬의 요청에 따라 완성한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를 카네기홀 무대에 올리게 되었다. 지휘자 ‘월터 담로쉬’의 명성 덕분이었는지, 일년 전 히트쳤던 랩소디 인 블루의 열기가 아직 식지 않았던 건지 모르지만, 연주회 티켓은 조기에 매진되어 버렸고, 거쉰의 연주와 담로쉬의 지휘로 이루어진 연주회는 그야말로 초대박을 쳤다. 피아노 협주곡 바장조의 성공은 그 동안 정통파 클래식 음악가들의 기에 눌려 있던 거쉰의 열등감을 해소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 계기는 ‘비교하지 말자. 내가 곧 장르다.’라는 자신감을 거쉰에게 심어주었다. 담로쉬는 음악회 직후 인터뷰에서 “조지 거쉰이 재즈를 귀부인으로 만들었다” 라고 말했다. 적절한 표현인 듯 하다. 거리의 재즈가 카네기홀에 입성했으니까. 그것도 피아노 협주곡이라는 고풍스러운 가운을 걸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