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20년 9월부터 작가의 사정으로 휴식기를 갖은 <전종길의 역사더하기>가 새해를 맞아 독자 여러분들의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한국 역사이야기를 중심으로 당파싸움의 구조로 글을 작성하셨던 전종길 작가는 역사의 시기가 아닌, ‘역사기간에 동서고금, 어디에서나 있었던’
테마를 중심으로 글을 작성했습니다. 2021년 첫 편은 순장제도(상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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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장제도는 사후 세계가 존재 한다는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국왕이나 신분이 높은 귀족이 죽으면 주인을 모시던 노비 첩 등을 함께 매장하는 풍습입니다. 즉 자기가 모시던 주인이 죽으면 젊은 첩과 노비들은 저승까지 따라가서 모셔야 하는 슬픈 처지입니다. 발굴된 고대 시대의 무덤을 보면, 적게는 3 ~ 4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을 함께 묻었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순장된 노비들이 많을수록 자식들은 효자라고 칭송 받았다고 합니다. 고대 신분제 사회는 주인의 인권만 존재하고 노비 첩 가신 등은 개인의 소유물 취급을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순장제도는 어떤 이유에서 생기게 되었을까요? 순장제도가 생기게 된 이유는 기록에는 없고 추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의 환경을 고려하여 추정하면, 부와 권력을 가진 귀족들은 자신이나 가족들의 죽음을 쉽게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이렇게 좋은 세상에서 영원한 영화를 누리고 싶어하죠. 그래서 죽음 후, 사후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게다가 사후 세계에서도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들은 영화를 누리고 싶어서 생각한 방법이 자신이 부리던 시종이나 첩 등을 저승까지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저승까지 데리고 간 시종들은 죽어서도 자신이나 가족들에게 충성을 다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에서 순장제도가 생기게 됩니다. 게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순장을 몇명 시켰느냐 하는 경쟁이 생깁니다. 죽은 사람 한 명의 행복을 위해 살아있는 사람 수백 명의
생존권과 행복권을 박탈 했습니다.
순장제도의 시작
그러면 순장제도는 언제부터 시작 되었을까요? 시기는 지역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신분질서가 확립되고 지배자의 권력이 강해지는 청동기 시대 중반 BC 15세기 즉, 지금부터 약 3,500년쯤 시작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 발생 시기는 차이가 납니다. 1920년대부터 발굴된 상(은)나라 차마갱에 약 3300년 전 상(은)나라 왕의 무덤에 사람과 동물, 마차, 기타 생활용품이 출토 되었습니다. 보존이 잘된 마차가 출토되면서 차마갱 (마차와 말을 함께 묻은 무덤이란 뜻 물론 사람도 같이 생매장 당했음)이 알려졌습니다 이러한 순장은 전부 강제 매장 했을까요? 자발적으로 죽은 사람을 따라간 사람도 있었을까요? 기록을 살펴 보겠습니다.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서양 역사학자 헤로도투스의 기록에 의하면 “권력자가 죽으면 많은 부인들 중 죽은 남편이 가장 아끼던 부인 한 명을 함께 묻었는데 매장하는 날 장례를 주관하는 사람이 부인 한 명을 지목하면 지목 당한 부인은 남편을 매장할 때 함께 묻었다. 그때 지목 당하지 못한 부인들은 치욕으로 여겨 함께 묻히기를 요청하며 오열했다”는 기록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합니다. 함께 죽기를 자청한 부인들은 진심일까요? 이 기록은 2500년 전 기록인데 당시에는 순장제도를 거부할 수 없었고 나쁜 제도라는 인식이 일반화 되지 않았다고 추정됩니다. 중국으로 넘어갑시다. “춘추시대 진목공이 (진시황제의 진나라 즉 섬진) 죽은 후, 170명이 죽었는데 대부분 자발적 순장이다” 이러한 기록 또한 믿기 어렵습니다. 이번에는 우리의 조상인 고구려 기록을 살펴 봅시다 고구려 동천왕 서거 후 고인의 덕을 기리며 따라 죽는 자가 많았는데 동천왕의 장남 중천왕은 이를 금지 시켰으나, 동천왕 매장일에 장지까기 따라와서 함께 죽고자 했던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만두와 심청
순장에 관한 세 명의 기록을 (헤로도투스, 사마천, 김부식) 기준으로 볼때 전세계에 순장제도가 존재한 듯 합니다. 이번에는 순장제도의 변형인 제사 의식 때, 사람을 제물로 바친 기록을 살펴 보겠습니다. 상(은)나라 무정왕 제사때 사람 제물을 바쳐도 되는지 점을 친 기록이 있습니다. 갑골에 기록된 내용은 “이번 무정왕의 제사때 피부가 흰 서융인 3명을 바칠까요?” [서융인은 지금의 돈황 위구르 자치구에 살던 이슬람 족] 또한 하늘에 제사 지낼 때 100명의 인신공희를 (사람제물) 바친 기록이 있습니다. 이번에는 삼국지 기록을 봅시다.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마치고 개선할 때 남만땅에 (중국 운남성, 라오스 북부, 베트남 북부 영토로 추정) 비바람이 거세어 강을 건널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남만왕 맹획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하겠다며 어린 처녀 7명을 잡아옵니다. 맹획이 말하기를 “승상 용왕에게 처녀 머리 7개를 바치면 비바람이 멈추게 됩니다 처녀들의 목을 잘라 머리 7개를 강에 던지면 됩니다” 라고 하자 제갈량은 처녀들이 불쌍하여 살려 주려고 돼지고기에 밀가루를 입혀서 사람 머리처럼 만들고 삶은 후 강에 던집니다. 다음날 제갈량의 말대로 비바람이 그치자 제갈량은 말합니다. “비가 오고 파도가 치는 것은 기후의 변화이지 귀신의 조화가 아니다. 사람 머리 대신에 이것을 사용하도록 하라” 이때부터 만두라는 음식이 생깁니다. [만두 = 남만인의 머리를 줄인 말]입니다. 우리가 애용하는 만두는 남만인의 머리 즉 남방인의 머리라는 뜻 입니다. 우리나라 심청전에도 파도를 막기 위해서 인신공양을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심청전은 비록 소설이지만 당시 풍습을 바탕으로 쓴 것 같습니다. 2천년 동안 지속되던 순장제도는 점차 사라지게 되는데 인신공희 (사람제물) 라는 변형된 방법으로 존재 합니다.
순장제도 폐지를 위한 노력
이번에는 순장제도의 비인간적인 면을 나타내는 기록을 살펴 보겠습니다. 공자는 순장제도의 비윤리성을 강조하고 순장제도의 폐지를 주장합니다. 그러나 보수적인 기득권 층은 순장제도 혁파라는 개혁을 거부합니다. 다음은 공자와 기득권 층인 귀족들의 논쟁 내용 입니다. 공자는 “살아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을 위해 생매장하는 것은 야만적인 행위로 군자가 취할 행동이 아닙니다” 라고 말하자 귀족들은 “부모에게 마지막까지 효도를 다할 수 있는 순장제도는 아름다운 미풍양속 입니다”라고 대답 합니다. 이에 공자는 “그렇게 진정한 효도를 하려면 부모를 끝까지 봉양하기 위해 자식 중 한 명이 순장되어야 합니다” 라고 말하자 귀족들은 무덤에 넣는 부장품은 고인이 생전에 사용한 물건이나 가축입니다. 노비와 첩 시종들은 주인의 물건이나 가축과 같으므로 무덤에 넣을 수 있지만 사람을 무덤에 넣을 수는 없다” 라고 대답합니다. 이에 공자는 “노비 첩 등도 사람인데 어찌 물건이나 가축 취급을 합니까” 라고 묻자 귀족들은 답하기를 “노비나 첩 등은 돈으로 사는데 어찌 물건이나 가축과 다를 수 있습니까” 토론이 끝난 후 절망한 공자는 순장제도의 비인간적인 사례를 찾아서 [춘추]라는 역사책에 기록합니다. 춘추에 주석을 붙인 춘추 좌씨전에 기록된 순장제도의 모순에 관하여 기록한 “결초보은”에 관한 기록입니다.
지금부터 약 2,650년 전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 진나라 [진시황제의 진나라(섬진)가 아니고 섬진 옆에 있는 당진] 22대 군주 진문공의 충신 중 위주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위주는 전쟁에서 한번도 지는 법이 없는 불패의 장수 입니다. 위주는 진문공이 19년 동안 유리걸식할 때 고생을 함께 하였고 진문공이 춘추시대 두 번째 패자가 되는 성복 전투에서 초나라를 꺽고 이름을 알립니다. 영웅도 호걸도 흐르는 세월에는 어쩔 수 없어서 60세가 넘자 위주는 은퇴하고 가난한 집 딸 조희를 돈 주고 사서 첩으로 들입니다. 당시 조희의 나이는 당시 10대 중반으로 추정됩니다. 조희는 뛰어난 미모를 지닌 지혜로운 처녀였지만 가난한 평민의 딸 입니다. 게다가 진나라의 (당진) 최고 권력자 위주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어 조희의 아버지는 딸을 돈 받고 파는 형식의 계약을 한 후 위주의 첩으로 보냅니다.
말년에 어리고 예쁜 첩을 들인 위주는 행복한 노후를 보냅니다. 하지만 자기를 위해 정성을 다하는 영특하고 예쁜 조희를 보는 위주의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이에 위주는 두 아들 위과와 위기를 불러놓고 유언을 합니다.
“어린 조희가 비록 돈에 팔려서 나의 첩으로 왔지만 나는 늙어서 이 아이와 부부의 정을 느낄 수 없다. 내가 말없이 죽으면 이 아이는 나와 함께 생매장을 당하는 운명이니 조희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원통한 일이냐 그래서 나를 위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는 조희를 살려주고 싶다. 내가 죽은 후 이 아이를 순장시키지 말고 좋은 혼처를 마련하여 결혼 시키도록 하여라” 이 말을 들은 조희는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이어서 위주는 조희를 보고 말합니다. “이제 나의 명도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기간 동안 너를 곁에 두고 싶으니 조금만 더 내 옆에 있어다오.”
그때부터 어린 조희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위주의 곁을 지키며 시중을 들었습니다. 위주의 약속이 있고 1년도 못되어서 위주는 중태에 빠집니다. 위주는 자신의 임종을 지키는 위과 위기 두 아들을 보고 힘겹게 더듬 거리며 말합니다.
“이렇게 어리고 예쁜 아이를 두고 가기가 원통하다. 이 아이와 영원히 함께 하고 싶다. 조희를 내 무덤에 같이 넣어라” 옆에 있던 조희는 하얗게 질린 얼굴은 하고 더듬거리며 말합니다. “주인님을 저승까지 모셔야 하는 것이 저의 운명이니 받아 들이겠습니다”
그러나 맏아들 위과는 조희를 순장시키지 않고 좋은 혼처를 마련하여 시집 보냅니다.
다음 이야기
주인의 무덤에 생매장 당할 운명에서 벗어난 조희는 생명의 은인 위과를 위해 몇 백배 보답을 합니다 다음 시간에 “결초보은” (풀을 묶어서 은혜에 보답하다) 마지막 이야기와 우리나라의 슬프고 가슴 아픈 순장사례를 소개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