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2,Friday

마흔, 다시 시작하려는 그대에게

[고전에서 길어 올린 ‘깊은 인생’]

서너 군데 나라에서 거처를 옮기며 살았다. 그래선가, 태어나 자란 곳과 지금 사는 곳이 다르고 말과 글이 다른, 낯선 곳을 억지로라도 적응하며 살다 보니 어느 순간 영토 개념이 사라지는 건 자연스런 수순인지도 모르겠다. 더해서, 지구라는 공 위에서 보내는 하루라는 시간적 개념과 삶이라는 공간적 관념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인가도 알게 된다. 지구 입장에선 시간과 공간이란 개념이 보통 억울한 일이 아니다. 그저 둥글게 허공을 빙빙 도는 게 지구의 미덕이고 한번씩 쏟아 붓는 폭풍과 내리치는 번개, 가끔 바다를 뒤흔드는 일을 주 업무로 삼았을 뿐이니, 살고 죽고 여기니 저기니 하는 유혐간택(唯嫌揀擇)이 없는 것이다. 다만 할 뿐, 그저 최선을 다한다. 뒷다리를 어설프게 쭈그리며 부끄럼 없이 똥을 싸재끼는 개를 보며 삶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 지구나 개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 그런 생각이 들게 된 즈음, 내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 느닷없이 올라와 이마를 쥐어박는 자각에 한 동안 나는 곤혹스러웠다. ‘나 또한 지구라는 행성 위에 살고 있는데, 왜 고작 이따위로 사는 걸까.’

때론 ‘표면 장력이 강한 투사의 눈물’을 보이며 쉽지 않은 삶을 견뎠다. 마흔은 그런 모양이다. 마흔을 훌쩍 넘겼지만 삶의 방향은 스무 살 객기어렸던 생각과는 크게 달라졌다. 어느 소설가는 마흔을 이렇게 묘사한다. ‘입사를 하고 칠 년간 맞벌이를 해서, 신도시에 지금의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은근히, 세상이 변하기보다는 직급이 변하길 바라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느 가을날인가, 깊이 담배 한 모금을 들이켜다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마흔이었다. 동지가 간 데를 알아도, 깃발은 나부끼지 않았다. 신도시에 온 아내는 급격히 살이 찌기 시작했다.’ 그대는 마흔인가? 마흔은 태어나 40여년이 된 세월의 물리적 나이테가 아니다. 마흔은 단테가 신곡 첫 머리에 말했던 것과 같이 ‘인생 반 고비’의 고유명사다. 지난 삶의 반조와 여전히 늙지 않았다는 스스로의 위안을 가진 자라면 그대는 마흔이다. 마흔은 어지간한 일에 미끄러지듯 능숙하다. 일을 마치고 누군가 와인 터뜨리는 소리를 내며 ‘오늘 저녁 어때?’ 하면 수순을 밟듯 따라 나선다. 억지로 간 술자리에 부어지는 술을 억지로 마시며 맥없는 사내들의 낮고 낮은 가십들을, 듣고 날아가 버릴 그저 그런 얘기들을 하고 또 듣는다. 마흔은 이렇게 삶이라는 얼음판에 미끄러지듯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살아지는 것이다. 이미 내 삶은 내가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관성이 지배하고 있다. 마흔은 관성의 최대값에 능수하고 이상의 최소값에 능란하다. 그래서다. 나는 그대가 휴일 오후 호숫가에 오리배가 심심하게 떠다니듯 ‘저렴한 인생들 사이에 흐르는 심야전기’처럼 삶이 시시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 날 그 시간에 울리고야 마는 전국노래자랑의 딩동댕 소리처럼 심심한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때론, 어쩌지 못하는 삶의 관성이 미워질 것이다. 그대 뜻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느껴질 때 여기까지 굴러먹은 인생 곡절이 무참할 테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왔을까. 경박해진 삶과 어리석은 인생을 자책하지만 답은 보이지 않는다. 엑셀레이터를 무던히 밟아보지만 삶은 공 회전한다. 밥벌이하며 가족을 부양하는 자이므로 그래서 밥벌이에 최선을 다한다. 월급에는 온 인생을 밀어붙여도 뚫리고 마는 물리적 파괴력이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아차렸지만 다음 10년은 지금의 지식과 경험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순탄치 않을 것이다. 이리저리 일자리를 찾아 다녀야 하고 거친 밥과 사나운 사람들을 만나게 될 테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며 선처를 바라다 처분에 맡겨지게 될 것이다. 내 등을 보고 자랄 아이에게도 서서히 무너지는 등뼈를 지켜볼 아내에게도 자랑스럽지 않은 삶이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다음 10년을 걸어가야 할까? 무력한 삶을 환희로 빛나게 할 비책이란 게 있을까? 꿈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직도 당황과 흥분이 불화살처럼 핏줄을 타고 흐른다면 그대에게 다음 10년을 모색하는 몇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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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모험처럼 과거로 가라. 에스키모인들이 북극곰을 잡기 위해 날카로운 칼 위에 신선한 고기를 찔러 눈 밭에 꽂아 두는 것과 같이 미래 10년을 위해선 과거와 단절하는 작업에 들어가야 한다. 잘못 꿴 단추, 엇나간 퍼즐의 그 처음으로 가라. 그러나 엉클어진 실타래에 성급하게 다가가선 안 된다. 가만히, 조용한 가운데 아주 가만히 들여다보아라. 그대가 원하는 얘기들이 매직아이처럼 떠오른다. ‘그때 내가 이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할 때가 있다. 누군가는 16년 전 여름이 떠오를 테고 누군가는 3년전 겨울의 이야기가, 또 누군가에겐 지난 해 회사에서 겪었던 굴욕이 울컥 올라올 테다. 인화성 짙은 일들을 애써 피해 온 삶이 지금의 그대다. 그것은 성실이라는 미덕으로 둔갑해 있고 신앙처럼 섬기지만 그것이 자신의 삶을 옥죈 장본인이라면 성실한 사람이라는 굴레는 슬픈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샅샅이 뒤져 잘못 들어선 곳을 찾아내고 그 곳에서 다시 시작하라. 마흔은 굴레를 끊어내기 좋은 나이다. 그래서 뭔가를 시작하기도 좋은 시기다. 자신을 옭아맸던 단추를 모두 끊어내고 처음부터 다시 꿰라.

둘째, 마지막 기회를 잡아라. 운명을 바꿀 수 있었던 자다란 전환의 기회들이 많았지만 그대는 매번 결정적인 기회를 놓쳐왔다. 바뀔 수 있었던 운명, 벗어날 수 있었던 시시한 삶, 잡지 못한 기회에 대한 아쉬움을 긍정해선 안 된다. 지금, 여기가 곧 나의 운명이라는 말로 긍정하는 당위는 비겁하다. 그대는 ‘사건’ 에 빨려 들어 회오리 칠 준비가 되지 않았고 더 솔직하게는 ‘사건’이 겁났던 것이다. 그대 스스로를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실망하기엔 이르다. 기회는 다시 온다. 그렇지만 이번에 다시 돌아오는 남은 한 번의 기회는 영혼의 촉수를 동원해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마흔, 아마 마지막 전환의 기회일 가능성이 높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느닷없이 기회라는 것이 찾아오면 그때 가서 뒷걸음질 치지 않기를 바란다. 슬그머니 발을 빼며 안온한 삶에, 노예적 당위를 장황하게 떠벌리지 않기를 바란다. 폭풍처럼 내 삶을 뒤 덮을 기회가 왔을 때 물러서지 마라. 운명처럼 따라 나서라.’

셋째, 물러서지 않는 것이 실천이다. 지금 일어나 찾아라. 나는 전환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흥미롭지 않다. 옹졸한 마음이 그들의 이야기를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우리는 보기 좋게 전환해야 한다. 사람은 두 번 태어난다. 두 번째 탄생, 지금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전환의 기회는 메시아처럼 출현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는 수동적 전환이어선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게 안 되려면 전환을 넋 놓고 기다릴 게 아니라 찾아 나서야 한다. 지겨울 때까지, 토가 나올 때까지, 모든 걸 내팽개칠 만큼 그대를 욕망하는 그 무엇을 말이다. 시간과 삶의 파괴력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 일이 없도록 눈을 뜨고 그 펀치를 맞아야 한다. 모르고 얻어맞을 때 휘청거리는 법이다. 방심하다 일격을 당하면 무너진다. 이젠 두 번 다시는 펀치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무엇이든 지금 바로 여기서 시작하라. 하지만 무엇보다 인생 반 고비를 돌았다면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알아야 한다. 생긴 대로 사는 것이다. 생긴 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을 아는 사람이다. 자신을 아는 사람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 누군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시켜서 하는 사람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은 밥과 꿈이 화해하는 지점이다. 서두르지 말고 그 지점을 찾아라. 비록 그것이 불행을 자초할지라도 그 불행을 견디는 것, 나는 나 자신을 견딜 수 있다는 믿음. “서서히, 신중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가차 없이” 이것이 마흔의 스피릿이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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