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흐마니노프의 큰 손은 유명하다. 가온 ‘도’에서 쫙 펼치면 다음 옥타브의 ‘라’까지 닿았다니 도저히 믿기 힘든 사이즈이다. 그렇다. 라흐마니노프는 2m에 가까운 장신이었고, 엄청나게 큰 손을 가진 거인 ‘피아니스트’ 였다. 여기서 그를 피아니스트라 국한한 이유는 그가 만든 대부분의 피아노곡을 직접 연주했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였기 때문이다. 그것도 범접하기 힘든 괴물같은 기량으로… 큰 손과 완벽한 테크닉을 갖췼던 만큼 그가 창작한 피아노 작품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어려운 테크닉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라흐마니노프는 비교적 손이 작은 피아니스트들에게는 애증의 대상이 되어 왔다. 너무나 정복하고 싶지만 결코 만만치 않은 그의 피아노 음악들. 라흐마니노프는 우리 피아니스트들을 애끓게 만들었고, 고단하게 만들었으며, 수없이 좌절시켰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음악을 연주 버킷리스트에 넣어 끊임없이 도전한다.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서 피아노라는 악기의 극한을 시험한 작곡가, 독창적이고 대륙적인 스케일의 음악어법으로 당대 음악청중들의 마음을 훔쳤던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의 마지막 작곡가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 그의 이름 뒤에 언제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피아노 협주곡 2번과 3번>의 작곡 배경에 얽힌
이야기이다.
세르게이
집안 대대로 장군 가문이었던 귀족의 가정에서 태어난 세르게이(라흐마니노프)는 부모의 파경과 형제 자매의 사망 등을 목격하며 우울한 유소년기를 보냈다. 아홉 살에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전액 장학금으로 입학하게 된 그는 자신을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로 만들려는 피아노과 교수들의 등살 때문에 혹독한 훈련기를 보냈다. 당시 러시아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들었던 ‘즈베레프’ 교수는 세르게이의 어려운 집안 사정을 고려해 레슨비 한 푼을 받지 않고 자신의 집에 기숙을 시키며 열정적으로 피아노 지도를 했다. 매일 아침 6시에 기상해 아침 연습을 시작한 후,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건반 앞에 앉아 피아노 테크닉을 연습시켰던 즈베레프의 교수법은 어린 세르게이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미 만들어진 남의 음악을 치는 것 보다는 자신의 음악 만들기에 더 관심이 갔던 세르게이에게 피아노 연습은 맹목적으로 꼭두각시가 되기 위해 훈련하는 것만 같게 느껴졌다. 결국 세르게이는 즈베레프의 집을 뛰쳐나와 자신이 좋아하는 작곡 공부로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과 학생이 되어 눈에 띄는 작품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한 그는 졸업 연주로 최고상을 받으며 차이코프스키의 후원까지 받게 되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차이코프스키가 타계했을 때 ‘어느 위대한 예술가의 추억’이라는 제목의 피아노 3중주곡을 작곡해 헌정하면서 더욱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세르게이는 음악원 재학 당시인 스무 살에 이미 차이코프스키의 후계자라는 닉네임을 달고 음악가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자기암시요법,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라흐마니노프(세르게이)가 최초로 자신의 이름을 걸고 대중에게 선보인 작품은 ‘교향곡’이었다. 그런데 주변의 기대와 달리 초연은 실패였다. 음악평론가들은 라흐마니노프의 미흡한 부분을 조목조목 따져가며 혹평을 해댔다. 글라주노프(지휘자)가 연주할 때 술에 취했었다는 말들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스무살 새내기 작곡가가 단 악기 장르가 아닌 오케스트라용 대곡으로 단번에 대중에게 어필하려던 것은 너무 무리였던가 보다. 초연 무대가 있었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청중은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초연이 실패하자 통쾌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면, 당시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음악가들 간의 경쟁구도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청중들은 모스크바가 내세운 신예 라흐마니노프를 향해 “니가 얼마나 잘났나 보자”라는 듯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음악회를 지켜봤던 것이다. 모스크바 전역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며 기세등등하게 도전했던 라흐마니노프는 상당한 충격을 받고 말았다. 그는 심각한 신경쇠약과 극도의 노이로제로 고생하였는데, 간혹 어쩔 수 없이 연주회장에 갈 때면 얼굴 전체를 복면으로 가릴 정도로 심각한 대인기피증에 시달렸다. 그런 그를 구출해 낸 것은 최면술사이자 심리학자였던 ‘니콜라이 달’ 박사였다. 그는 라흐마니노프에게 ‘자기암시요법’이라는 처방을 내렸다. 이는 환자에게 최면을 걸어 놓고 매일 그에게 필요한 말을 반복하는 치료법이었는데, “당신은 위대한 작곡가입니다. 당신은 런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곧 어마어마한 작품을 작곡하게 될 겁니다.” 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니콜라스의 치료법은 상당히 효과적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치료 4개월차가 되던 즈음 새로운 작품 구상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회복되었다. 우울증을 극복하자마자 작곡한 작품이 바로 <피아노 협주곡 제 2번 다단조>이다. 1901년에 완성되어 10월 라흐마니노프 본인의 피아노와 모스크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치러진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크렘린의 종소리’ 라는 별칭을 가진 피아노 독주 오프닝 이후 비장하게 흐르는 현악기 선율, 지극히 러시아적이고 애절한 메세지가 가득한 이 협주곡은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2번’ 이라는 공식이 완벽히 성립할 정도로 그의 피아니즘을 잘 대변하는 명작이다.
미국 순회 연주, ‘피아노 협주곡 제 3번’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성공으로 러시아와 전 유럽에 알려지게 된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순회연주 제안을 받고 가슴이 벅차 올랐다. 좀 더 새롭고 강렬한 곡을 만들어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싶은 열망이 들끓었다. 그렇게 탄생한 곡이 <피아노 협주곡 제 3번 라단조>이다. 일반적인 레파토리의 피아노 협주곡에서 가장 어려운 곡으로 알려져 있는 이 협주곡은 피아니스트들의 능력치를 시험하는 고난이도의 곡이다. 웬만한 피아니스트들은 감히 엄두내기도 힘든 에베레스트 같은 난곡을 작곡해 자신의 연주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걸까? 그는 당시 미국 데뷔에 사활을 걸었던 게 분명하다. 미국 순회 연주 일정에 맞추어 작품을 완성하긴 했지만, 시간 제약 때문에 본인의 솔로 부분 연습을 충분히 하지 못했던 그는 러시아발 원양 정기선이 미국땅에 도착할 때까지 약음 키보드로 쉬지 않고 연습했다. 노력에 대한 답을 듣는 듯 라흐마니노프의 바램은 이루어졌다. 미국의 청중들이 열광한 것이다. 잠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초인적인 기교로 본인의 작품을 ‘직접’ 연주하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는 정말 매력적인 존재였다. 당시 미국은 영웅주의적 낭만주의 연주가에 대한 숭배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다. 다양한 개인사로 인해 유럽으로부터 망명해 온 어마어마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들이 판을 치고 있던 미국이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절대 기죽지 않고 작곡가로 그리고 피아니스트로서의 존재감을 확실히 알리게 되었다.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발발했다. 수많은 귀족들과 기업가들은 러시아를 탈출하기 시작했다. 시국이 어수선하던 그 때 마침 스웨덴으로부터 연주 요청을 받은 라흐마니노프는 가족을 모두 데리고 스톡홀름행 기차에 올라탔다. 스톡홀름에서의 연주를 마친 그의 심정은 복잡했다. 자신의 집안이 대대로 공화당을 지지했기 때문에 볼셰비키가 정권을 잡은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온 가족이 곤경에 빠질 게 뻔했다. 그는 러시아로 돌아가는 기차표를 사는 대신 미국행을 선택하였다. 이미 한 차례 미국에서의 성공을 경험한 그는 그것을 밑거름 삼아 음악가로서 충분히 활동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미국에서의 성공적인 데뷔를 마친 지 불과 10여년이 지났지만, 당시의 미국은 기존 음악의 틀에서 벗어난 새로운 자유와 이전 음악의 규칙이나 금기에 도전하는 음악가들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있었다. 그들은 다양한 음악 형태의 실험과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가지고 20세기 음악의 문을 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으니, 여전히 고전주의를 기반으로 한 19세기 낭만주의에 젖어 있던 라흐마니노프의 아이디어들은 어느새 구태의연한 유물로 전락하고 있었다. 라흐마니노프는 발표하는 작품마다 빛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집도 재산도 모두 버리고 온 가족을 끌고 미국땅을 밟은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로서의 수입이 적어지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주특기였던 피아노 연주로 다시 한번 승부를 걸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자신의 작품을 발표할 때만 피아노 연주를 했던 그가 쇼팽, 슈만, 브람스,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을 연주 프로그램에 넣고 닥치는대로 연주하며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라흐마니노프의 방향선회는 옳았다. 청중들은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에게 열광했다.
고국이 그립지만…
라흐마니노프는 미국에서 성공한 피아니스트가 되었다. 베버리힐즈에 가족음악회장을 갖춘 대저택을 구입했고, 두 딸에게는 출판사를 차려 주었으며, 스위스에 멋드러진 별장을 지을 정도로 여유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1917년 스톡홀름 연주회를 마칠 당시, 들고 있던 악보 꾸러미와 몇 벌의 옷이 든 가방이 전 재산이었던 망명 음악가 라흐마니노프는 이제 당당한 미국시민권자이자 영향력 있는 음악가가 되었다. 하지만 그는 풍요로움 뒤에 가려진 외로움과 고국에 대한 향수병으로 많이 괴로워했다. 미국에서 25년이나 살았지만, 좀처럼 늘지 않는 영어 때문에 가족과 몇몇 친구들 속에서 고립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늘 고국 러시아를 그리워했던 그는 해마다 유럽으로 순회연주를 다니며 러시아로 돌아가볼까 고민했지만,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바람에 결국 귀국의 꿈을 이루지 못한 채 1943년 03월 28일 베버리힐즈에서 잠들었다. 민족주의, 국민주의, 인상주의 등 클래식 음악계가 혁신의 바람을 세차게 맞고 있던 19세기 말에 태어났지만, 20세기 중엽 사망할 때까지도 차이코프스키의 계보를 잇는 후기 낭만주의의 감성을 잃지 않았던 진정한 낭만주의자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만난 지 어언 35년이 다 되어 가지만, 그의 피아노 협주곡은 해가 갈수록 기품이 늘어나는 어른처럼 내 안에서 더욱 익어간다. 들을 때마다 새로운 메시지로 내 안에 분화되어 있는 감정선 하나를 건드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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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