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한해는 독자들 덕분에 고전으로 샤워했던 해로 기억될 것 같다. 고전은 내 마음을 모이스쳐 했다. 인간으로 태어나 나를 둘러싼 조건에 늘 의문을 품고 살았으나 이제 그런 고민 따윈 하지 않게 된 것은 글을 쓰며 얻게 된 큰 소득이다. 태어날 때부터 내 목을 휘감고 있던 인간으로서의 업력과 조건은 내 고유한 세팅 값이었다. 모든 태어난 것은 사라지는 길로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나도 그 축의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그 당연하고 확연하게 드러난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다. 그리하여 내가 어찌한다고 해서 어쩌지 못한다는 것을 마흔 줄에야 알게 됐으니 어영부영 느려터진 평소의 버릇은 앎의 영역에서도 돋보인다. 아니다, 늦게 나마 알게 된 건 다행이다. 고전을 읽고 정리하면 할수록 한 가지 명확한 사실에 이른다. 우리는 같지만 나는 다르다, 이 세상 모든 ‘나’는 다르지만 우리는 같다는 사실. 같지만 다르다, 다르지만 같다. 승가의 간화선 선문답을 돌려 말하는 말장난이 아니라 그렇다는 것이다. 한번 흘러간 강이 다시는 오지 않지만 강물은 늘 흘러 가는 것처럼 꼭 그와 같이 나는 두 번 다시 지금 이 순간, 여기를 다시 살 수 없지만 내가 있든 없든 무관하게 무수한 ‘나’와 우리는 늘 여기를 살 것이다.
한나 아렌트를 데려 와야겠다. “삶은 과정이다. 도처에서 지속성을 사용하여 없애며 그것을 마모시키고 그것을 사라지게 하는 과정이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에는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으로 되돌아 간다. 이 자연에는 시작도 끝도 존재하지 않는다. 변함없고 끝이 없는 반복 속에서 모든 자연적 사물은 움직일 뿐이다. 자연과 모든 살아 있는 사물이 강제적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자연의 주기적 운동은 우리가 이해하는 의미에서의 탄생도 죽음도 알지 못한다. 인간 존재의 탄생과 죽음은 단순히 자연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와 관련되어 있다. 고유하고 대체불가능하며, 복제 불가능한 실재인 유일한 개인들이 이 세계에 왔다가 이 세계를 떠난다. 탄생과 죽음은 부단한 운동 속에 있지 않지만 그것의 지속성과 상대적 영속성 때문에 나타남과 사라짐을 가능하게 하는 세계를 전제로 한다. 이 세계는 여기에 출현한 어떤 개인보다 앞서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가 마지막에 떠난 후에도 남아 있다. 인간이 태어나는 장소로서 세계, 죽을 때 떠나는 세계가 없다면, 불변의 영원회귀 위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즉 모든 다른 동물 종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죽음 없는 지속성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니체처럼, 모든 존재의 최고원리인 영원회귀의 긍정에 도달하지 못하는 삶의 철학은 자신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도 알지 못한다”
고전은 고유다. 모두 다르다. 같다면 고전이 될 수 없었을 테다. 우리는 모두 다르지만, 취향, 행동, 언어, 습관까지 모두 같은 게 없지만 살아간다는 것은 다르지 않다.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삶을 지배하는 한 우리는 의도치 않게 같아진다. 인간의 많은 감각과 통찰 중에 오로지 기계적 논리작동만을 원하는 사회에서 인간성이 상실 됐다고는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는 누구이고 나는 누구이며 이 우주는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해온 수 천 년의 시행착오는 오롯이 고전에 담겨 있다. 수많은 전쟁과 반목, 분서갱유에서부터 종족 말살에 이르기까지 역사 속에서 사라질 위기를 넘기며 존속한 인간 고유의 정신적 신경체계가 텍스트로, 고전으로, 예술로 살아남아 우리 앞에 현전한다.
프랑스 철학자 라깡은 말한다. ‘단지, 예술에 의해서만 우리는 자신의 바깥으로 나갈 수 있다’. 나와 다른 사람들이 이 우주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알게 되는 건 행운이다. 물론 그들의 우주는 나의 것과 다르다. 수많은 ‘나’가 오로지 내가 본 세계로 세상은 존재한다. 나는 세상의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나처럼 세상을 본, 봤던, 보고 있는, 볼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이 고전과 예술의 본령이다. 나를 나만의 방법으로 내가 본 세상에 관해 말하는 것, 나를 보여주는 것, 내가 읽었던 고전들의 공통점이었다. 이젠 죽은 사람들이 써 놓은 고전에서만 찾을 게 아니라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 맞겠다. 그것이 무엇이든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등산에 관해 자기만의 관점을 말하고, 피아노를 좋아하는 사람은 음악에 관한 자기 견해를 세상에 내 놓고, 건축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만의 건축관을 지어내 보이는 것, 멀리 갈 것도 없이 바로 그것이 나의 고전, 나의 예술이다.
개구리의 시선은 곧 그 개구리의 세계다. 나의 시선은 나의 세계다. 그대의 시선과 관점은 곧 그대의 세계다. 우리는 셀 수 없이 존재하는 무수한 세계 속에서 ‘나’의 세계에 살고 있다. 내가 중심이기 때문에 이 세계는 내가 뜻한 바 대로 벌어지고 해석된다. 그대의 일상은 황홀했는가? 지루하고 반복되고 시시한 일상은 누구의 세계였는가? 일상의 곳곳에 나의 견해, 나의 관점, 나의 시선은 존재했는가? 그저 태어나고 최선을 다해 살다가 때가 되면 죽는 앞집의 고양이처럼 유일하지도 고유하지도 특별하지도 않는 삶을 살고 있는 나에게 고전이 주는 질문은 명확하고도 분명했다. “나는 내 삶의 주인인가?”
다가올 한 해는 부디 일상이 황홀하여 견딜 수 없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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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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