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리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어울릴 칼럼 주인공을 찾다 보니 이 분이 떠올랐다. 20세기 영국 클래식 음악의 부흥을 일으켰던 작곡가 ‘에드워드 엘가’. 신앙심이 투철했고, 아름다운 부부애로 주변에 모범이 되었으며, 평생을 성실한 음악가로 살았던 음악가. 엘가의 삶과 사랑, 음악 몇 편을 소개한다.
사랑의 인사
1888년 여름, 연인 앨리스는 자신이 쓴 시 ‘Love’s Grace’를
엘가에게 선물했다. 엘가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수줍게 표현한 시였다. 이에 감동받은 엘가는 일종의 답가로 피아노곡을 작곡해 앨리스에게 선물했는데, 그 곡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사랑의 인사(Love’s Greeting)’이다. 사실, 두 사람의 관계를 알았던 앨리스의 아버지는 무명 음악가였던 엘가를 영 탐탁치 않아 했다. 명문 가문에 육군 대장 출신이었던 그는 “너무 차이가 나는 집안과의 결혼은 불가하다”, “8살이나 어린 남자랑 무슨 연애냐”며 두 사람의 결혼을 완강히 반대했다. 하지만 너무나도 서로에게 절실했던 엘가와 앨리스는 이듬 해인 1889년에 결혼식을 올린 후, 런던으로 이주해 둘만의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고, 앨리스의 지극한 내조 덕분에 엘가는 런던에서 존재감 있는 음악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사랑의 인사’는 초판 당시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왜냐면, 앨리스의 유창한 독일어를 고려해 붙인 제목이 독일어 ‘Liebegruss’였는데, 당시 런던 음악계에 불어를 선호하던 풍토가 있어 눈길을 끌지 못했던 것이다. 대중들의 관심이 미미한 것을 눈치챈 출판사는 엘가에게 묻지도 않고 불어로 된 ‘Salut d’Amour’라고 제목 붙여 다른 곡인 것처럼 출판했다. 신기하게도 제목 마케팅이 통했나 보다. 악보는 불티난 듯 판매 되었고, 다양한 악기의 편곡판이 등장할 정도로 남다른 인기를 끌게 되었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는 3분 남짓하는 짧은 소품이지만 연인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설레임, 기대감, 애틋함, 달콤함 등이 표현된 사랑스러운 곡이다. 평생토록 남편만을 사랑하며 그의 성공을 위해 헌신했던 아내 앨리스, 부와 명성을 얻은 후에도 사소한 스캔들 하나없이 진심으로 앨리스만을 사랑했던 진정한 애처가 엘가, 그들은 세상의 모든 부부에게 귀감이 되는
아름다운 커플이었다. ‘사랑의 인사’는 그래서 더욱 충만한
행복감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수수께끼 변주곡
평소 작곡을 할 때면 언제나 아내의 감상평이나 조언을 주의 깊게 들었다가 작품에 반영했던 엘가. 그는 앨리스의 말을 받아들여 그 즉흥 멜로디를 확장해 35분이나 걸리는 큰 관현악 작품으로 완성했다. 이것이 바로 관현악곡 ‘수수께끼 변주곡(Variations on an Original Theme, op. 36 “Enigma”)’의 탄생 배경이다. 이 작품이 큰 히트를 치게 되면서 엘가는 25년간의 무명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고 비단 영국이 아닌 전 유럽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스타작곡가로 발돋움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변주곡의 원래 제목은 ‘수수께끼 창작 주제에 의한 14개의 관현악 변주곡’이었다. 하나의 주제와 14개의 변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엘가가 초판 악보의 첫 페이지에 ‘Enigma’ 라고 적은 후 ‘이 작품에는 숨은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라고 언급했던 것에 기인해 자연스레 ‘수수께끼 변주곡’이라는 별칭으로 더욱 알려지게 되었다. 한동안 이 ‘수수께끼’ 를 풀기 위해 노력한 음악학자들은 각각의 변주들이 엘가의 절친이나 지인들의 캐릭터를
묘사한 것이라고 밝혀냈다.
- 주제 처음 네 음이 영어로 ‘에드워드’를 부를 때의 억양을 나타낸다고 해서 작곡가 자신을 의미
- 제 1변주(C.A.E) 아내 ‘앨리스 엘가’
- 제 2변주(H.D.S.P) 장난끼 많은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데이비드 스튜어트 파웰’
- 제 3변주(R.B.T) 성대모사의 달인이었던 아마추어 배우 ‘리차드 박스터 타운젠드’
- 제 4변주(W.M.B) 대규모 토지 정리 사업을 주도했던 대지주 ‘윌리엄 미스 베이커’
- 제 5변주(R.P.A) 아마추어 피아니스트 ‘리차드 펜로즈 아놀드’
- 제 6변주(YSOBEL) 엘가의 비올라 제자 ‘이사벨 피튼’
- 제 7변주(TROYTE) 건축가이자 피아노 애호가 ‘아더 트로이트 그리피스’
- 제 8번주(W.N) 엘가가 산책을 할 때 자주 담소를 나누었던 ‘위니프레드 노버리’
- 제 9변주(Nimrod) 엘가의 작품을 자주 출판했던 노벨로 음악출판사의 편집자 ‘아우구스트 예거’
- 제 10변주(Dorabella) 말을 더듬는 버릇이 있는 ‘도라 페니’
- 제 11변주(G.R.S) 성가대 지휘자 ‘조지 로버트슨 싱클레어’가 기르던 개 ‘댄(DAN)’
- 제 12변주(B.G.N) 엘가가 첼로곡을 작곡할 때 테크닉에 관한 조언을 주었던 첼리스트 ‘베이질 네빈슨’
- 제 13변주 힌트가 없는 변주. 멘델스존의 서곡 ‘고요한 바다와 즐거운 항해’의 선율 인용
- 제 14변주(E.D.U) 엘가 자신, 이니셜은 아내 앨리스가 자신을 부르던 ‘에듀’ 라는 애칭
※ 감각적으로 분배된 관현악기들 덕분에 각각의 주제가 묘사하는 인물들의 캐릭터를 악기 소리로 듣는 재미가 있다. - 위풍당당 행진곡
‘사랑의 인사’ 만큼이나 잘 알려진 관현악 행진곡이다. 원제는 ‘Pomp and Circumstance Military Marches(op.39)’. ‘위풍당당’이라는 번역이 참 탁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오델로> 중 3막 3장에 나오는 대사 “우는 군마, 드높은 나팔 소리, 영혼을 뒤흔드는 북소리와 귀를 뜷는 듯한 피리소리, 장엄한 군가, 그 어떤 영광 있는 전쟁의 당당한 위풍(Pomp Circumstance)도 다 마지막이다.” 에서 따온 것이다.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사망한 후 즉위한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을 위해 엘가가 만든 행진곡인데, 에드워드 7세가 이 작품을 상당히 맘에 들어했다고 한다. 국왕 프리미엄이 있어서 였을까? ‘위풍당당 행진곡’ 은 영국의 각종 국가 행사에 제 1순위로 사용되게 되면서 대중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했다. 게다가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 인기가 절정에 달하게 되었는데, 이유는 영국 국민들이 이 곡을 들을 때마다 뜨거운 애국심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현재 ‘위풍당당 행진곡’은 제2의 영국 국가로 불리고 있으며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첼로 협주곡
1919년 여름, 편도선 절제 수술을 받고 막 깨어난 엘가가 오선보와 연필부터 가져달라고 해 허겁지겁 음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것을 본 앨리스는 당황스러웠다. “마취가 덜 깬 섬망증상일까? 아님, 의식이 없는 수술대 위에서 어떤 영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일까?” 놀랍게도 후자가 맞았던 모양이다. 엘가는 수술을 받고 있던 무의식의 상태에서도 어떤 멜로디와 씨름을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마취에서 덜깬 채 그려나갔던 그 멜로디는 얼마 후 장중하고 드라마틱한 ‘첼로 협주곡(Cello Concerto in E minor, op. 85)’으로 탄생했다. 수술을 받기 전 한동안 활동의 공백기를 보내고 있었던 엘가는 자신이 점점 대중들에게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 앨리스의 건강이 위태로왔으며, 이제 막 끝난 세계대전은 그에게 심한 전쟁 트라우마를 남겼기 때문이다. 엘가의 심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서인지 ‘첼로 협주곡’은 처절하고 암울한 느낌이 전곡을 지배한다. 그의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비통하며 절절한
사연처럼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