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말로는 “안전이 제일이다” 하는 공사 현장 안전 캠페인이다.
베트남어를 배운 사람은 알 수 있겠지만, 이 문장은 아주 간단하고 쉬운 문장이다.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표현 방식이 좀 은유적이다. 이런 은유적 표현을 보면서 이런 문장을 사용할 줄 아는 베트남인에게 존경심이 생겨난다.
An toàn 이란, 안전이라는 한자의 베트남어 표기다. 그리고 trên이란 영어로 on과 같은 표현이다. 그리고 hết이란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라는 한자어 부사 hết(歇)의 베트남식 표기다. 그래서 trên hết이란 우리말로 제일 혹은 최상이 된다.
이런 사전 단어 지식을 근거로 이 베트남 문장을 번역하면 “안전이 제일이다”가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베트남어원을 생각하며 해석한다면, ‘안전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 는 은유적 표현을 느낄 수 있다.
‘안전이 제일이다’ 라는 문장을 베트남어로 한국식 문장으로 그대로 쓴다면, An toan la so mot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 우리에게 익숙한 완전한 한글식 표현이긴 한데, 너무 건조하고 운치도 없어 두 번 다시 눈길조차 가지 않은 문장이다.
이런 두 문장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면 아마 그대는 베트남 사람들의 낭만적 감성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베트남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실용적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문장을 보면 단지 실용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들의 언어를 배우면서 그들은 실용적이면서도 여유롭고 또 은유적 표현을 쓸 줄 아는, 낭만적 감성을 지닌 문화 민족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베트남인은 알면 알수록 매력이 더하는 민족이다. 이런 곳에 나와 밥벌이를 할 수 있으니 이야말로 부정할 수 없는 행운이 분명하다.
그런데 운은 늘 한시적이다. 하긴 한시적이라 살 수 있다. 한번 틀어진 운이 평생을 간다면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운이 한시적이라는 것은 바로 미래의 희망과 같은 의미다. 비록 지금은 코로나의 불운에 눈물을 흘리지만, 이 또한 다 지나가리라 하며 희망의 싹을 가슴 속에 키우며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운이 자신에게 언젠가 다시 돌아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 말대로, 이런 멋진 곳에서의 밥벌이를 하는 행운에 문제가 생겼다.
코로나로 드러난 이 사태는 온 지구촌을 뒤집어 놓고 있다.
지난 4월, 집안 일로 한국에 나갔다가 코로나로 발이 묶였다, 그리고 6개월 이상 한국에 묶여 지내다 지난 10월 8일 베트남에 들어와 보름간 격리를 마치고, 지난 10월 23일 다시 베트남의 일상
밥벌이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4월 1일 출국하고 10월 26일부터 다시 근무했으니 무려 7개월 만의 업무재개다. 대장이 없는 동안에도 열심히 회사를 유지해 준 우리 직원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올해는 정말 거저 보낸다.
밥벌이도 내 팽개치고, 일도 못 하고, 놀지도 못하고, 6개월을 보낸 후, 다시 베트남으로 방향을 바꿔 15일간의 호텔 격리를 마치고 나오니 이미 한 해가 넘어가고 있다.
코로나 덕분에 의도치 않은 안식년을 받은 셈이다. 하지만 미리 준비한 일이 아니라 이 코로나의 사태로 만든 물길이 어떻게 이 세상을 변화시킬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다.
앉아있지만 쉬지 못하고, 누워있지만 잠들지 못하는 반년을 보내고 다시 찾은 베트남, 통고도 없이 떠나다 이제야 돌아오는 연이 섭섭하기도 하련마는 섭함은 가슴에 묻고, 환한 미소로 다시 반겨주는 귀한 인연, 베트남이다.
먼지보다도 작은 <창백한 푸른 점> (명언 칼 세이건), 지구
위 사진은 1989년 나사에서 쏜 우주선이 토성을 지나다 잠시 카메라를 돌려 바라본 지구의 모습인데, 붉은 라인이 은하계이고 그 안에 휴대전화에 붙어있는 먼지보다 작은 푸른점이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사는 지구라는 것이다.
이 시도는 당시 나사에서 근무하던 칼 세이건이라는 과학자가 제의한 것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 한 차례 시도를 미루어졌지만, 결국 나사는 8년 후 다시 온 인류를 위해 인류의 유일한 집인 지구를 촬영하고 그 촬영을 제의한 칼의 의견으로 그 사진 속의 지구의 이름을 <창백한 푸른 점>으로 정하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지구란 우주의 시각으로 보면 그저 그런 먼지와 같은 광물에 지니지 않고, 인간은 아예 존재조차 찾기 힘든 미물에 불과하다.
우리 인류는 그런 의미 없는 창백한 푸른점 안에서 잠시 스치듯이 지나치는 존재로 생겨났다 사라진다. 아마도 억겁의 시간이 지나면 인류라는 종족의 흔적도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존재의 의미를 찾아보기 힘든 작은 미물의 삶에 누가 멋대로 무거운 의미를 부여했는가?
지구를 우주에 나가 바라보며 사고의 폭을 넓히다 보면, 개인은 물론이고 인간이라는 종조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지 않다. 또 사고의 범위를 시간으로 옮겨 가, 언젠가 억겁의 세월이 지나면
그 존재 여부조차 확신할 수 없는 인간이라는 종의 삶에는 진정한 의미가 있기는 한 것인가? 또 그 속에서 찰나의 순간을 살며 이 글을
쓰는 인간은 어디에 그 기록이 남겠는가?
한국인 최초로 유럽과 미국의 철학을 공부하며 고국에 돌아온 둥지의 철학자, 박이문 교수(1930- 2017)는 이런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하여, ‘어떠한 것에도 절대적인 답이 없다’ 는 허무주의적 결론을 내리고, 이런 사고를 하는 자신을 ‘허무주의자’ 로 규정하지만, 현실을 피할 수도 없고, 거부할 용기도 없으니 차라리 적극적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긍정적 허무주의자’ 로 서의 삶을 찾은 철학자다.
그가 사용한 ‘긍정적 허무주의’ 라는 말은 참 많은 위안을 주는 이름이다. 그 이름에는 너무 적극적으로 살지 않아도 죄가 되지 않을 것 같기도 한데, 또 그런다고 삶의 방임을 무작정 허락할 것 같지 않은 양수겸장의 위안이 담겨있다. 인생이란 원래 별다른 의미 없는 삶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맘대로 포기할 수도 있는 삶이 아니니, 자신의 소임을 내버리지 말고, 이왕 태어난 이 세상, 긍정적으로 사고하며 즐겁게 살다 죽는 것이 우리 인생의 몫이라며 대충 열심히 살아보라고 권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아침, 누가 깨우지 않아도 스스로 일어나, 무가치한 자신의 삶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 즉, 사회의 일원으로 해야 할 역할, 밥벌이를 위해 휴대전화와 컴퓨터를 챙겨 들고
거리를 나선다. 그리고 이국의 거리를 헤매며 벌어드린 돈과 그 돈을 소비하는데 자신의 삶을 온전히 바치는 기이한 일상을 반복한다.
모든 시간을 돈을 벌고 또 그것을 소비하는 데 다 사용해버리고
마는 우리 현대인의 삶, 그런 우리의 삶은, 산 정상에 끌어올린 바위가 힘에 부쳐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그 떨어진 바위를 또다시 정상으로 끌어올리는 시지프스의 저주받은 삶과 다른 게 무엇인가?
PS: 골프 이야기인데, 붕어빵에 붕어가 없네요,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