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함브라 궁전, 투우, 고야, 피카소, 축구, 스무 고개에 닿기도 전에 ‘스페인’이 떠오른다. 그럼, 초점을 클래식 음악으로 돌려 알베니즈, 그라나도스, 파야를 아냐고 누군가 물어온다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처럼 당당히 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까? 클래식 애호가가 아닌 분들에겐 생소한 이름들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16세기 경의 스페인은 정치와 문화의 번영에 힘입어 국제적 영향력이 있는 뛰어난 음악가들을 배출했던 ‘음악 강국’이었다. 하지만 기독교 세력에 의해 통일이 된 이후의 스페인은 수많은 전쟁과 페스트 발발, 식민지 개척의 실패 등을 이유로 졸지에 유럽의 후진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은 ‘예술’보다는 ‘빵’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 결과 17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의 스페인은 단 한 명의 명망있는 음악가도 배출하지 못한 음악의 변방국이 되었던 것이다. 19세기 말경 시작된 ‘국민(민족)주의 운동’이 스페인을 흔들기 시작할 즈음 혜성같이 등장한 3인방 ‘알베니즈, 그라나도스, 파야’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19세기 ‘스페인 국민주의 음악’의 부흥을 이끈 세 작곡가를 만나보자. 투우사나 플라멩코만 연상되었던 스페인을 좀 더 깊은 눈으로 바라볼 계기가 되지 않을까.
알베니즈 <이베리아>
‘이삭 알베니즈(Isaac Albeniz,1860~1909)’는 스페인 북동부 카탈루냐 출신이다. 마드리드 음악원의 천재소년이었던 그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심했던 열두 살 무렵 가출해 몰래 외항선을 탔을 정도로 간이 큰 아이였다. 꽤 오랫동안 아르헨티나, 쿠바, 푸에르토리코 등지를 떠돌아 다니던 알베니즈는 결국 아버지에게 발각되었고, 이후 어머니의 도움으로 독일과 벨기에 헝가리 등지의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음악이론, 작곡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당시 알베니즈는 운명의 스승 ‘펠리페 페드렐(Felipe Pedrell,1841~1922)’을 만나게 되었는데, ‘스페인 국민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던 페드렐은 알베니즈에게 언제까지 베토벤, 모짜르트, 바하의 음악만을 답습할 것이냐며 후세들을 위해서라도 스페인 전통음악을 발굴해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페드렐의 가르침이 제대로 전수되었는지 서유럽 음악 베끼기를 접은 알베니즈는 야심차게 피아노 모음곡 <이베리아 Iberia>를 발표했고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다. 이 작품은 알베니즈의 대표곡이다. 제 1곡과 제 9곡을 제외한 나머지 10곡 모두 스페인 남부 안달루시아 지방의 인상과 풍경을 담아내고 있다. 플라멩코 춤과 스패니쉬 기타, 다양한 집시의 민요 등이 어쩜 이렇게 리드미컬하고 섬세한 피아노곡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을까. 토속적이면서도 다양한 스페인 지방색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이베리아>를 듣다 보면 일생동안 갈대처럼 흔들렸던 그의 방랑벽도 결국엔 쓸모가 있었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12곡의 제목은 스페인 냄새 폴폴 나도록 본토 발음을 흉내내본다.
1곡 에보까씨온 (Evocacion): 초혼(망자의 혼을 부르는 노래)
2곡 엘 뿌에르또 (El Puerto): 카디스의 항구
3곡 엘 꼬르뿌스 크리스띠 엔 쎄비야 (El Corpus Christi en Sevilla): 세비야의 크리스트 축제 행렬
4곡 론데냐(Rondena) : 론도 지방의 노래와 춤곡
5곡 알메리아(Almeria) : 알메리아의 항구
6곡 뜨리아나(Triana) : 세비야 지방의 투우 장면
7곡 엘 알바이씬(El Albaicin): 그라나다의 집시촌
8곡 엘 뽈로 (El Polo): 안달루시아 어느 동네의 춤곡
9곡 라바삐에스 (Lavapies):마드리드의 교회
10곡 말라가(Malaga):말라가 지방의 춤곡
11곡 헤레쓰(Jerez):헤레쓰 지역의 춤곡
12곡 에리따냐(Eritana):세비야의 한 선술집
그라나도스 <고예스카스>
알베니즈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엔리케 그라나도스(Enrique Granados,1867~1916)’ 역시 카탈루냐 출신으로 육군 대령의 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았던 음악가다. 페드렐의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그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스페인 국민주의 음악을 대표할 만한 걸작 <고예스카스 Goyescas>를 완성했다. ‘고예스카스’는 ‘Goya-esque’ 또는 ‘Goya-Like’로 해석될 수 있는데,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의 전람회를 보고 받은 영감을 피아노에 옮겨놓은 것이다. 고야의 그림 속에서 발견한 스페인 감수성, 사랑, 열정 등이 다채롭게 그려져 있다. 6곡의 제목을 살펴보자.
제 1곡 Los requiebros (사랑의 속삭임)
제 2곡 Coloquio en la reja (창가의 대화)
제 3곡 El fandango de candil
(등불 옆의 판당고)
제 4곡 Quejas, o la maja y el ruisenor
(비탄, 또는 처녀, 그리고 나이팅게일)
제 5곡 El amor y la muerte- Balade
(사랑과 죽음- 발라드)
제 6곡 Epilogo, Serenata del espectro
(에필로그, 유령의 세레나데)
파야 <스페인 정원에서의 밤>
카디스 태생의 ‘마누엘 데 파야(Manuel de Falla,1876~1946)’는 부유한 상인의 자제였다. 마드리드 음악원을 단기 졸업한 그는 당시 음악도들의 필수 코스였던 파리 유학을 떠나게 되었고, 거기서 드뷔시, 라벨 등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가들과 친분을 쌓으며 자연스레 인상주의 음악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스페인의 민속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프랑스 인상주의 색채가 농후하게 깔려 있다. 파야…하면, 무조건 <스페인 정원에서의 밤 Noche en los jardines de Espana>부터 들어봐야 한다. 마치 ‘밤의 정경’이 한 폭의 회화처럼 눈 앞에 펼쳐진 것 같다. 신비하고 몽환적이면서도 비르투오소적인 카리스마가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이 곡은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적 인상’ 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총 3부 구성이고 역시 제목들이 있다.
제1부: 헤네랄리페에서(En el Generalife)알함브라 궁전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정원이다. 물을 뿜는 분수대,
계단식 샘물, 테라스, 모스크, 성벽을 묘사했다.
제2부: 먼 옛날의 무곡(Danza lejana)
멀리서 들려오는 집시풍의 ‘레하나’ 춤
제3부: 코르도바의 시에라 정원에서
(En los jardines de la Sierra de Cordoba)
집시들의 전형적인 춤 ‘잠브라(Zambra)’
에서 영감을 받은 곡
알베니즈, 그라나도스, 파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동일한 음악적 뿌리를 가졌지만, 각기 다른 개성을 확립해 음악의 변방국이었던 자국 스페인의 음악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린 주인공들이다. 지금 당장 아무 생각없이 너튜브 검색창에 이들의 이름을 입력해 보자. 스페인의 전설적인 피아니스트 ‘알리시아 데 라로차(Alicia de Larrocha)’ 여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 고민말고 그녀의 연주를 클릭하자. 감상하자. 그리고 19세기 스페인 국민주의 음악의 이국적인 매력에 빠져 보자.
감동과 공감은 경험한 자의 몫!
그럼, 이만 Hasta Lueg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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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