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6일 전임 아베총리가 사임의사를 밝힌 후, 9월15일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당 총재로 당선되면서 일본총리가 된 스가 요시히데 수상. 그의 취임 후 관례와 다른 일정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는 전통적으로 일본의 총리는 수상이 되고 난 후 이례적으로 첫방문지로서 동남아시아 그것도 아세안의 주역인 베트남을 선정했다. 스가총리의 방문은 일본에게 베트남이 중요한 국가로 부상하였음을 알리는 상징으로 보인다. 스가의 당선은 예정되어서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10월경 취임 후 첫 해외순방으로 중국, 한국, 미국이 아닌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를 선택했다. 과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본 공공외교의 상징, 동남아시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일본의 외교를 진단한다면 미-일 동맹이 일본 외교의 척추라면. 대한, 대중외교는 일본의 손과 발이고 동남아외교는 일본의 얼굴 일 정도로 전후 일본 외교의 성장과 성공을 상징하는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
전후 일본은, 과거의 극복을 위하여 과거의 실패를 의식한 변화된 대 아시아정책을 추진해 왔고, 최근까지는 상당한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으로 알려져있다.
독립국으로써 면모를 갖추기 위한 아시아 외교
1952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국제사회에 복귀한 일본의 아시아 외교는 얼마되지 않아 바로 시작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이후 일본 국내에서도 미국의 점령체제에서 벗어나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본격적으로 아시아외교의 시작은 1954년 요시다 시게루 내각이 사퇴하면서 시작하게 된다. 요시다 내각을 계승한 같은 자민당의 하토야마 내각은 1956년 10월 일소 공동선언 및 아시아 제국과의 관계개선 추구 등을 통해 일본 외교의 독자적인 노선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55년체제’의 성립과 사회당 등의 혁신에의 신장으로 헌법개정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내각기의 일본외교는 압도적인 영향력 속에서 같은 당이지만, 다른 파벌이었던 요시다(吉田茂) 노선의 부정하는 자주외교를 모색하였다. 즉, 독립국가로서 미국으로부터 정치, 안보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아시에서의 지역 경제
협력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하토야마에 이어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내각이 출범하자 19 56년에 유엔 가맹이 실현되었고, 이듬해에 기시 내각이 펴낸 것이 ‘일본외교의 3원칙’(1957년)이다. 기시 내각이 펴낸 외교청서 제1호는 전후의 일본 외교에 세 가지 원칙을 천명했다. 다시말해 ‘국제연합 중심주의’,‘자유주의 제국과의 협조’,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 견지’라고 하는 3원칙이며, 이 기시내각의 3원칙은 전후 일본외교의 기본 뼈대를 이루는 첫
독트린* 중 하나다.
*잠깐용어 : 정치용어로써의 의미는 국가의 수반이 향후 국가의 외교정책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국제 사회에 표방하는 정책상의 원칙이나 교리를 뜻한다. 독트린은 다른 나라와의 협상이 아니라 자국의 외교방침을 일방적으로 선언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제 사회에서 그 나라의 국력을 인정받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시장개척과 전후배상
기시 정권은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의 확립에 힘을 기울였다. 1958년 1월 평화조약과 함께 2억2천3백만 달러를 12년동안 지불한다는 배상협정이 성립되었고 . 옛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3개국 가운데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일본은 이 두 나라와 1958년과 이듬해에 각각 10억엔과 15억 엔의 경제기술협력협정을 맺었다. 베트남은 전쟁 기간 중의 전쟁 행위와 식량 결핍에 의한 사상자가 많았던 점 등으로 계속 배상을 요구했다. 이에 1959년 당시 남부정권과 3천9백만 달러를 5년간 지불하는 데 배상협정이 성립되었다. 이 같은 일본의 배상은 모두 생산물과 서비스 제공이라는 형태로 행해졌다.
일본 정부가 배상액에 상당하는 생산물 혹은 서비스를 일본 기업에서 조달하여 그것을 해당국에 제공하는 식이었다. 즉, 일본의 동남아시아 국에 대한 배상은 배상과 동시에 행해진 유상의 자금 협력과 더불어 정부에 의한 민간 수요 창출과 수출의 길잡이라는 성격이 있었다. 따라서 그것은 일본의 경제부흥을 촉진시키는 수단이기도 했다. 또한 동남아시아에 대한 배상은 일본 경제를 동남아시아와 결부시켜 부흥을 이루자는, 미·일 양국 정부의 기대에도 어긋나지 않았다. 일본 정부나 미국 정부나, 전후로 넘어오면서 아시아 대륙과의 밀접한 연계가 끊어진 일본 경제가 자원과 시장을 얻는 장소로서 동남아시아를 중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시는 동남아시아와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하는 가운데 일본의 외교적 찬스를 포착했다. 1957년 미국의 거액의 자금지출을 전제로 한 ‘동남아시아 개발기금 구상’을 내놓았다. 이 구상은
미국이 자금을 내고, 일본은 기술과 노하우를 제공하여 동남아시아의 노동력과 자원을 이용하자는 것이었다. 동남아시아 개발에 일본이 리더의 역할을 한다면 그만큼 일본은 미국과의 관계를 보다 대등하게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처럼 동남아시아는 일본이 ‘아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입장’이라는 원칙의 시험장이었다. 물론 이러한 일본의 대 아시아 외교의 최정점은 한국과, 중국간의 외교관계 정상화를 염두에 두고 추구한 행위였다. 2020년 현재 이스라엘의 아랍에미레이트, 바레인 같은 아랍국가와의 수교가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관계 정상화라는 정책목표로 가는 중간단계인 것처럼, 일본의 동남아 정책은 초기에는 한국과 중국과의 외교관계 정상화라는 목표를 위한 중단 단계이자, 일본기업 해외진출의 교두보였던 것이다.
경제대국 외교의 원형
독립국가로써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1950년대 일본의 동남아 외교는 60년대국내외 상황이 안정되고, 경제대국으로 등극하게 되면서 60년대 일본외교는 안정된 국내상황에 기반하여 안전보장 체제에서는 주로 미국의 요구에 수동적으로 응하면서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경제적인 국익의 추진에는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전후 일본 외교의 특징이 확립된 시대이기도 했다. 특히 일본의 경제력이 향상함에 따라 이번에는 경제를 외교정책의 수단으로 국제사회에서의 일본의 지위향상을 꾀하려는 움직임도 커졌다.
일본은 천연자원이 한정된 국토에 수많은 인구를 거느리고 있다. 따라서 식량이나 에너지를 수입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수출 시장을 확보하여 수입을 위한 외화를 버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경제외교는 전적으로 일본의 독자적 판단에 의한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전략적 필요와 일본의 경제적 이익이 복합되어 경제외교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1955년부터 1977년까지 이어진 일본의 배상은 총액으로 15억 달러라는 당시 일본으로서는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배상이 일본 제품의 수출 시장을 개척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일본의 동남아시아 원조는 주로 자본재 제공이나 인프라 정비에 중점을 두어 현지의 경제적인 이익에 공헌했다. 또한 동시에 일본의 수출시장 개척과 일본 산업정책의 일부로서의 의미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남아시아는 수출시장으로서뿐 아니라, 천연자원의 공급자로서도 일본으로서는 중요한 경제적 파트너로 여겨지고 있었다. 따라서 현지 경제 발전에 공헌함과 동시에 천연자원의 확보를 꾀한다는 목적도 포함되어 있었다.
1962년에 이케다는 확대되어 가는 일본의 경제력을 근거로 아시아
지도자들에게 인프라에 대한 투자와 수출품의 품질 향상을 강조함으로써 경제부흥의 성공자로서 자신 있는 자세를 과시하고 있었다. 일본은 아시아 개발 은행 설립(1966년)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와 더불어 동남아시아 개발 각료회의를 도쿄에서 주최하여 동남아시아 경제 개발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다짐을 내외에 천명했다.
한편 베트남전쟁의 격화와 국제수지 문제가 심각해진 영향을 받아, 미국의 대외 원조는 의회로부터 철저하게 감약되었다. 이에 미국은 일본의 원조에 상당한 기대를 걸게 되었다. 미국에 의한 안전보장의 확보와 요시다 노선, 이케다 내각의 소득배증계획을 기조로 한 일본의 경제성장은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회원국이 됨으로써 일본의 국제적 지위가 급상승하게 되었고, 정부개발원조(ODA) 등을 통한 일본의 대외경제 원조를 가능하게 하였다.
동남아시아 외교의 완성, 후쿠다 독트린
동남아시아 외교의 완성,
후쿠다 독트린
60년대가 지나가고, 혼란과 혼돈이 가득했던70년대가 시작되었다, 1973년 오일쇼크는 일본의 고도성장에 제동을 걸었고, 닉슨의 중국방문은 일본에 통보도 없이 이루어지면서, 일본에 엄청난 쇼크를 안겨준다. 이러한 1970년대 변화의 영향으로 일본의 외교는 60년대 경제대국 외교를 넘어 새로운 길을 찾기 시작했다. 70년대 중반에는 이런 변화의 방향이 아직 명백하지 않았으나 나중에 돌이켜 보니 냉전의 틀에서 일단 자립한 아시아 태평양이라는 지역적인 국제관계의 틀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기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일본과 동남아시아의 관계는 이 시기에 재조정이 필요해졌다. 그것은 중국의 위협이 닉슨의 방문과 내정강화를 이유로 사라지게 되었고 아울러 베트남전쟁이 종결하면서 국제정치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경제성장과 엔고(円高)에 의해 일본이 동남아시아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존재감이 거대해졌다는 경제적 요인이 복합된 결과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존재감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반일감정을 자극시켰고. 1974년 다나카 카쿠에이(田中角栄)수상이 처음으로 동남아 5개국을 순방했던 당시 방문한 국가에서 대규모의 반일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일본정부는 동아시아지역에서 자국이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고, 이때 다나카 수상을 동남아 국가들에게 나중에 후쿠다 독트린으로 바뀌는
다나카 5원칙을 발표한다.
❶ 동남아 국가들과의 평화와 번영을 공동으로
이루기 위하여 우호친선 관계를 증진하며,
❷ 동남아시아 각국의 독립을 존중한다.
❸ 동남아시아 국가와 상호이해를 증진한다.
❹동남아시아 국가의 경제적인 독립성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이들 국가의 경제발전에 공헌한다.
❺ 동남아시아 국가 영내 자발적인 협력을 존중한다.
이러한 다나카 5원칙에도 불구하고, 당시는 베트남전쟁으로 인하여 세계정세가 바뀌는 상황이었고, 역내 국가내의 민족주의도 증가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일본과 아세안의 관계를 강화시키는 데 있어서 어떠한 진전이 보이지 않았지만, 1977년 발표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수상이 동남아 순방중 마닐라에서 후쿠다 독트린을 발표하면서 확고한 진전이 발생하게 된다. 후쿠다 독트린은 다음과 같다
❶ 일본은 군사 대국이 아니라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공헌한다.
❷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 (ASEAN) 각국과
마음과 마음이 서로 접하는 신뢰 관계를 구축한다.
❸ 일본과 ASEAN은 대등 한 파트너이며,
일본은 ASEAN 국가의 평화와 번영에 기여한다.
아울러 1972년 다나카 수상의 동남아 순방과 후쿠다 독트린 발표 후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등 아세안의 여러 국가들은 경제발전 모델을 일본에서 찾고자 하는 정책적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특히 싱가포르 수상 리콴유는 1979년 방일 당시 일본연구를 위한 지원을 요청하였고 말레이시아는 1981년 집권한 마하티르 수상의 동방정책에 힘입어 일본의 지원하에 일본어학교와 일본관련 학과를 신설하는 등 아세안의 일본배우기 열풍은 1980-90년대에 절정을 이루고, 이러한 문화적 지원에 힘입어 아세안 지역은 일본 외교의 꽃으로 불리게 된다. 즉 1970년때까지 일본에 의구심을 가지고 접근했던 동남아 국가들이 일본을 친숙한 이웃나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냉전해체와 중국의 부상
미국과의 무역마찰이 주요 외교사항이었던 1980년대를 지나면서 일본의 외교는 동남아시아에서는 대규모의 인프라 투자 및 문화외교를 통하여 많은 환영을 받았고 특히 일본의 막대한 무역흑자는 ODA(공적개발원조)의 급속한 확대를 가능하게 하면서, 일본은 ASEAN에 대한 ODA 공여를 증대시켜 동남아시아의 최대 지원국이 되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기존의 ODA 공여가 양자관계를 축으로 수여국의 경제지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후쿠다 독트린 이후 전개된 ODA는 다자간 협력체제 구축과 평화외교의 일환으로 실행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동남아시아 외교는 본래 일본이 설계하였던 이상과 같이 일본은 아시아 태평양 국가에 경제 발전의 모델을 제공하고, 그 거대한 시장이 완성이 되면서 일본이 투자하고 아시아가 혜택을 보는 결실이 맺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공공레벨에서의 신뢰는 민간으로도 이어져 일본금융기관의 자본이 본격적으로 동남아시아 특히 태국을 중심으로 투자되면서 지역 경제 협력에 공헌하게 된다. 그러나 1990년대 냉전이 해체되고 중국이 부상하면서, 일본의 동남아시아 전략은 서서히 경제적인 역할을 넘어서 경제 이외의 정치, 안보적 역할증대를 포함한 광범위한 정책전환을 1990년대 초반 냉전종식 이후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그러한 변화의 상징이 2013년 발표된 아베 독트린이다.
해상을 통한 적극적인 역할 아베 독트린
일본은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이후 저성장이 이어지면서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동남아시아 전략을 유지할 수 없게 되자 90년대에는 소극적 태도를 취하였다. 그동안 ASEAN(동남아시아 국가연합)은 1997 아시아금융위기를 계기로 ASEAN 역내 경제협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지역공동체로서의 ASEAN의 역할을 확대해왔고, 아울러 중국의 부상으로 인하여 일본은 그 동안 소극적이고 경제분야에 집중했던 ASEAN 전략을 전환하기에 이른다. 2013년 아베 정권은 후쿠다 독트린을 대체하는 아베 독트린을 발표했다. 아베 독트린은 다음 다섯 가지 원칙을 기조로 하는 새로운 전략이다. 아베 독트린은 2015년 출범한 AEC(아세안 경제 공동체)와 일본의 경제 회생과, “자유롭게 열린 해양”을 강하게 의식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후쿠다 독트린과는 다르다. AFTA(아세한 자유무역 협정)이 실현되자 일본은 AJCEP(종합경제파트너쉽 헙정)을 체결을 추진하여 2016년 현재 태국, 싱가포르,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필리핀 10개국 간에 발효하였고 아울러 미국이 탈퇴했지만 베트남, 브루나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칠레 등이 참가하여 일본을 중심으로 동아시아, 동남아시아,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지역을 연결하는 CPTTP(환태평양 경제 동반자협정)을 체결하여, 90년대부터 추진해온 경제공동체 건설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아베 독트린 발표 이후 비 경제적 분야의 역할이 확대되는 추세도 계속되고 있다. 2014년 일본의 무기수출 3원칙이 사실상 무력화 되면서, 아세안 국가와의 군사협력도 강화되고 있으며 방위기술 이전협정을 필리핀, 말레이시아와 체결하였고 또한 2020년까지 2조엔 규모의 ODA 지원을 계획하고 있다. ODA 지원 계획은 일본의 국익 실현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베 독트린이 후쿠다 독트린과 어떻게 다른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❶ ASEAN과 함께 보편적 가치 의 정착 및 확대를 위해 노력한다.
❷ ‘힘’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자유롭고 열린 해양은 ‘공공재’로 ASEAN과 함께 전력을 다해 지키며 미국의 아시아 중시를 환영한다.
❸ 다양한 경제연계네트워크를 통해 상품, 자본, 사람, 서비스 등 무역 및 투자의 흐름을 한층 심화시켜 일본 경제의 재생으로 이어지게 하며 ASEAN과 함께 번영한다 .
❹ 아시아의 다양한 문화·전통을 지키고 육성한다.
❺ 미래를 짊어질 젊은 세대의 교류를 증진시키고 상호 이해를 촉진한다.
일본과 베트남 관계 현황
1973년 7월 일본정부가 베트남민주공화국에 대해 국교수립을 제안하면서 새로운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교섭이 신속하게 진행되면서 현재 베트남과 일본과의 관계는 시작된다. 동년 9월 파리에 소재한 베트남민주공화국 대표부에서 양국 정부를 대표하여 양국 대사가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정식 수교국이 되었고. 이어 10월에 라오스 주재 일본대사가 베트남 대사를 겸직하는 형태로 외교관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1975년 4월 베트남이 통일되자 그해 10월 하노이에 일본 대사관을 설치됐다. 이후 베트남이 전쟁 후 미국의 제재를 받으면서 관계는 소강상태에 이르렀지만, 베트남이 86년 이후 개혁개방과 캄보디아 사태의 해결, 그리고 냉전의 해체가 이루어진 1990년대 이후 양국간의 관계는 혁신적으로 바뀌면서 2020년을 기준으로 베트남은 경제 분야에서 일본의 주요 파트너가 되었다. 일본의 베트남에 대한 직접투자액은 2018년엔 83억4,300만달러로
1위였고 2019년엔 28억 9,100만달러로 4위를 기록했으며, 베트남에 투자된 일본 자본은 총 581억달러(약 66조 6,400억원)로 일본의 외국에 대한 직접투자액의 15.5%에 이르고 있다.
스가는 왜 왔는가?
베트남 방역의 승리와 안보협력 증진
10월 18일부터 10월 20일까지 베트남을 취임 후, 첫 해외방문국으로 선택한 스가 총리, 사실 이번 방문이 특이한 점은 일본총리의 취임 후 첫 방문지는 항상 워싱턴, 베이징, 혹은 서울 3군데 중에 한곳이었지만. 이번에는 아베 2기에 이어서 베트남이 선정되었다는 점이다.
스가가 사실 동남아시아를 첫 방문지로 택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재팬타임즈에 따르면 워싱턴은 현재 대선으로 인하여 복잡한 상황이며, 중국과 한국과는 역사 문제와 방역으로 인하여 방문이 어려운 형편이기 때문에 방역에 상대적으로 성공하였고 일본과의 이해관계 마찰이 없는 동남아시아 지역이 현재 상황에서 최적이며, 양국간의 국방분야에서의 협력을 위하여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를 방문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고 미야케 쿠니 ‘캐논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소장의 이름을 빌려 설명했다.
특히 미야케 연구소장의 지적대로 이번에 주목해야 하는 점은 국방분야다. 19일 정상회담후 발표된 재팬타임즈의 스가 수상의 방문의 목적이 잘 들어 나는 부분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 재팬타임즈와 교도통신에 따르면 이번 방문에 베트남과 방위기술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고 발표하였고 이를 통하여 일본에서 생산한 방위장비를 베트남에 수출할 수 있는 법적인 틀이 마련되면서 베트남에 비경제적인 첫 협력이 가능해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알려졌다.
스가의 방문과 일본의 동남아 관계
이번에 이루어진 스가 총리의 방문은 기존의 경제협력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비경제분야로의 협력확대로 이루어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 방문을 통하여 일본은 기존 우방국인 동남아시아 국가와의 협력이 코로나로 인하여 제한받지 않을 것이라는 싸인을 제시하였고 또한 아베 독트린의 2번 원칙인 “ ‘힘’ 이 아니라 ‘법’이 지배하는 자유롭고 열린 해양은 ‘공공재’로 ASEAN과 함께 전력을 다해 지키며 미국의 아시아 중시를 환영한다”부분을 계승하여 아세안 국가 방위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전세계가 팬데믹으로 인하여 정상적인 외교활동조차도 제약을 받는 상황에서 열린 이번 정상회담. 그로 인하여 전세계의 많은 주목 받았다. 한국도 베트남과의 관계개선에서 열심이지만 스가 총리 이 부분에 우리 한국이 배워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외교는 장기 전략이며, 정책의 일관성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지 추후에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점이다. 모든 국가는 각자의 제약을 지니고 있다. 한국은 자본 동원력이 부족하다는 점이고. 일본은 헌법 9조로 인하여 비 경제 분야 협력에 제한이 가해진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항은 종속변수가 아니다. 일본의 대 동남아 외교는 1950년대부터 시작되어, 정책의 일관성을 가지고 기시-다나카-후쿠다-아베등 장장 60년의 일정한 원칙과 메세지를 가지고 접근한 외교의 상징이다. 한국 같은 경우 이러한 정책의 틀에서 외교를 접근하는 부분이 대미 외교를 제외하면 부족하기에, 이번 스가 총리의 방문을 통하여, 동남아 지역 외교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에 대한 노력과 연구가 진행되기를
바라면서 이번 글을 마친다. 글. 한성훈 kosdaq6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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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須藤李夫 (1997) 変動期の日本外交と東南アジア | 유남희 (2020) ‘전후 일본외교와 동아시아 인식’ |
오세경 (2018) ‘일본·중국의 소프트파워 정책과 신남방정책에 대한 시사점’ | 이지영 (2018) “일본의 대 ASEAN 전략의 변화” | Nikkei Asia Review (2020) ‘In Indo-Pacific push, Japan to export arms to Vietnam’ | Japan Times (2020) ‘Suga and Vietnamese PM meet, with focus on economic and defense cooperation’ | Japan Times (2020) ‘Why did Suga choose Vietnam and Indonesia for his first official trip as prime minister?’ | Ministry of Foreign Affairs of Japan (2020) ‘Speech by Prime Minister Suga at the Vietnam-Japan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