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역이란, 글자 그대로 周(주)나라 (BC 1111~256) 시대의 易(역)이라는 말이다. 이때 역은 변한다는 뜻인데 천지만물이 변화하는 궁극의 원리를 밝힌다는 의미다. 사람도 그 원리에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기술된 책이 바로 역서易書이며 그 중 하나가 주역周易인 것이다. 주역은 영어로 ‘The book of change’다. 변화에 관해 쓰여진 인류의 가장 오래된 책이다. 모든 고전의 관심사는 인간이다. 인간, 모든 살아있는 것의 본질은 변화다. 주역은 변화하는 세계와 인간의 본질에 관해 쓰여진 고전 중에 고전이다.
주역이 편찬된 시기, 춘추전국시대 550년은 기존의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모든 국가들은 부국강병이라는 유일한 국정목표를 위하여 사활을 건 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는 신 자유주의 시기였다. 이때 주역은 힘을 발휘한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마치 눈 앞에 보이는 것처럼 군주에게 오늘날 인구에 회자되는 비전을 말했기 때문이다. 주역이라는 text의 힘은 상당했다. 공자는 지금으로 치면 당시의 주역전문가였다. 공자의 죽간 책이 세 번 끊어질 때까지 읽었다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의 고사는 주역을 두고 회자된 말이다. 훗날 장재, 주희가 주창한 신유학의 육경六經, 사서삼경四書三經에도 주역은 주인공 자리를 차지한다. 현인이라 불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주역을 닳도록 읽어 댔다. 故신영복 선생은 ‘강의’ 말한다.
‘판단 형식 또는 사고의 기본 틀이란 쉽게 이야기한다면 물을 긷는 그릇입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바다로부터 물을 긷는 것입니다. 주역에 담겨 있는 사상이란 말하자면 손때 묻은 오래된 그릇입니다. 주역은 오랜 경험의 축적을 바탕으로 구성된 지혜이고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를 기초로 미래를 판단하는 준거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역은 귀납지이면서 동시에 연역지 입니다.’
사회발전 단계 상 혼란스럽던 사회에 질서가 생기고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의 구분이 생겼지만 통치 행위의 기준으로 삼을 만한 도덕적인 지침이나 가르침은 아직 없었던 시기에 최초의 주역이 있었던 셈이다. 멈춘 것 같으면서도 변화하고 혼돈 속에 있는 것 같으면서도 일정한 원리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세상이고 우리네 인생임을 가장 먼저 간파해낸 책이다.
그렇다. 한마디로 주역은 변화에 대한 법칙적 인식이 절실하게 요청되던 시기의 시대적 산물이다. 그때도 세상은 변했고 지금도 세상은 변한다. 변화하는 속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오늘날 눈부신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역이 사람들의 손에서 떠나지 않는 이유고 변화를 주제로 한 텍스트의 윗자리에 여전히 앉아 있는 이유라 하겠다. 주역은 어느 한 곳에 치우치지 않는다. 주역은 변화의 책이다. 변화는 실패와 미완성이 미덕이다. 주역은 실패가 있는 미완성은 반성이며 새로운 출발이며 가능성이며 꿈이라 말한다. 마찬가지로 미완성이 보편적 상황이라면 완성이나 달성이란 개념은 관념적으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완성이나 목표가 관념적인 것이라면 남는 것은 결국 과정이며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그렇다. 우리는 과정이다. 눈물 겹지만 결국 과정이다. 그러니 우열이 없다. 좋고 나쁨이 없다. 잘하고 못함이 없다. 우리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과정은 결과의 언어가 아니다. 과정은 완결, 완전함, 성공, 완성 같은 언어를 쓰지 않는다. 그것은 변화하지 않는 것 즉 죽은 것들에만 쓰는 언어다. 과정의 언어는 그저 최선이다. 주역은 완전함으로 가는 모든 것들을 경계한다. 조건 지어진 인간이 모든 조건이 사라진 완전함으로 달려가는 것은 위험함을 경고한다. 그것은 인간의 본질이 아님을 이미 3천년 전에 알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므로 주역 64괘 중 마지막으로 화수미제火水未濟를 배치한 것은 놀랍다. 주역의 모든 괘를 설명할 수 없다. 획으로 구성되는 효爻와 6개의 효로 구성된 1괘가 64가지의 괘로 구성되어 있는데 마지막 괘는 인간애의 극치다. 화수미제의 괘는 비록 모든 효가 득위하지 못했으나 음양 상응을 이루고 있다고 보고 있다. ‘바람이든 강물이든 생명이든 밤낮이든 무엇 하나 끝나는 것이 있을 리 없다. 마칠 수 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 완성이란 것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64괘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이 미완성의 괘를 배치하지 않았을까 한다.’ 역자는 책의 말미에 미제未濟의 괘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생이 아름다운 건 가진 것이 이미 많아서가 아니다. 누리고 즐길 것이 많아서가 아니다. 없는 것을 부지런히 만들어내고 가지지 못한 것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그 과정 속에 인생의 참다운 아름다움이 숨어 있는 것이다. 주역이 이제까지 말해온 것이 바로 그것이다.’
첨언하면 한국의 주역 사랑은 유난하다. 건곤감리의 효爻로 구성된 주역의 괘가 한 나라의 국기에 표현된 유일한 나라다. 경복궁 교태전交泰殿은 왕후 중전의 거처다. 흔히 왕에 대한 아내의 교태嬌態로 오해되지만 주역 11괘 지천태地天泰 에서 따온 이름으로 천과 지가 서로 교통하여 태평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한국 불사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의 손을 자세히 보면 대부분 중지와 엄지를 지긋이 마주치는 부처의 감중련한 손이다. 천지를 하나로 연결한다는 주역의 감괘를 표현한 것이다. 이외에도 지역의 이름, 산의 이름, 강의 이름도 주역에서 빌려온 것들이 많다.
역자에 관해 말해야 할 것 같다. 초아 서대원, 그는 변방의 사람이다. 24세에 아버지 유언이 발단이 되어 역학의 길에 접어든다. 부산의 한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중에 어느 날 문득 깨달은 바가 있어 운명의 길로 걸어 들어간다. 역학으로 선회한 그의 인생 길은 주역이 변화를 갈구하는 사람들의 것임을 항변하듯 변화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에게 학자적 타이틀이나 미끈한 가방 끈은 없다. 그러나 30년 이상 주역 하나로 입신한 사람으로 국내에서 손 꼽히는 인물이 되었다. 주역을 배우는 동안 그의 손에서 주역이 떠난 날은 없었다. 주역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루지 못할 일이다. 개인적으로 ‘주역’이라는 책은 주역을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잉태된 것으로 읽어 보고 싶었다. 적어도 그에겐 학자적으로 젠체하거나 의무적인 비판은 걷혀있고 고루한 학문적 우위를 설하지 않는다. 재야 학자 특유의 유연성이 그 책 속에 오롯이 담겨져 있음을 그의 삶이 대변해 준다. 나는 15년 전 그의 주역서를 읽고 무작정 그의 부산 자택을 찾아갔다. 그렇게 초아 서대원 선생과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와 나눈 주옥 같은 선문답은 오로지 나의 행운이었다. 그는 필자의 호를 지었고 내 큰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명’은 이름이기도 목숨이기도 하거니와 그는 나와 내 가족을 명명함으로써 명운을 보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