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캠벨- Joseph Campbell (1904-1987)
(참고한 책: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The hero with a thousand Faces – Joseph Campbell 저, 이윤기 옮김, 민음사, 1995.05.20)
오랜 세월 살았던 한국을 떠나오던 날을 기억한다. 하늘은 파랬고 구름은 세제로 빤 듯 하얬다. 늦여름과 초가을의 바람이 뺨을 스쳤다. 날씨는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이 날씨까지 가져가고 싶다고 중얼거리는데 비로소 떠난다는 마음이 느닷없이 내 가슴을 관통했다. 공항에서, 지금이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를 1초 동안 생각했었다. 지난날의 아쉬움, 앞으로의 두려움과 흥분이 내 속에서 뒤엉키던 그 날을 나는 잊지 못한다. 간밤, 짐을 싸며 무게와 공항 검색대를 생각했고 나에게 진짜 필요한 것들만 간추렸다. 살아가는데 필요한 건 실로 많지 않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됐다. 짐을 비워냈고 다시 비워냈다. 마지막까지 손에 쥐고 후루룩 페이지를 넘기며 아쉬움에 내려놓지 못했던 책은 그렇게 살아남아 지금 내 오른손에 조용히 들려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이다.
조지프 캠벨이라는 작가에 푹 빠졌던 때였다. 그가 “여러분의 꿈을 글로 적어 보라. 그것이 바로 여러분의 신화다.” 라고 말했을 때 나는 망설임 없이 내 꿈을 글로 적었었다. 그의 명령으로 두서없이 적었던 꿈이 수년이 지나 실제로 이루어지는 장면을 스스로 목격한 뒤 나는 놀랐다. 소스라치며 그의 책을 모조리 읽기 시작했다. 꿈을 놓고 돈벌이하는 사람을 많이 봐왔다. 진짜배기였던 그에겐 두려움을 이긴 인간의 마법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가 도대체 어떤 인간인지 궁금했기로 전작주의를 마다하지 않았다.
조지프 캠벨 (1904-1987) 그는 비교신화학자다. 그는 인류가 숭배했던 영웅을 관찰하고 인간이 만들어낸 신화를 연구했던 사람이다. 그 길 끝에 그 자신이 영웅의 길로 들어선 사람이기도 했다. 그 일면은 이렇다. 1929년 대공황의 시절, 그는 유럽에서 오랜 유학길을 마치고 돌아와 미국 컬럼비아 대학 교수로 임용될 예정이었던 전도유망한 인재였다. 그러나 임용 직전에 자신의 연구 방향과 대학 당국의 입장은 달랐다. 가르치려는 학문을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는 과감히 교수직을 포기한다. 그 길로 조용한 시골 마을 우드스톡으로 홀로 들어간다. 이후 5년간, 대공황의 핍진이 휩쓸던 시절에 1달러를 책상 서랍에 넣어놓고 ‘나는 결코 가난하지 않다’ 자조하며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모조리 읽는다. 칼 융, 제임스 조이스, 토마스 만, 니체, 쇼펜하우어, 칸트, 슈펭글러 등을 읽어 내리며 인류의 보고인 철학과 고전들을 섭렵한다. 하고 싶은 공부를 했던 자득의 힘은 곧바로 증명됐다. 1934년 캠벨은 마침내 사라 로렌즈 대학 Sarah Lawrence College 교수가 된 직후 신의 가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신화의 힘 등 수많은 역작을 쏟아낸다. 신화라는 주제 하나로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당대 최고의 비교신화학자로 자리매김하는데 ‘우울한 우드스톡’ 의 그늘 경험이 없었다면 그의 열매는 탐스럽지 않았을 테다. 이제 책으로 들어가자.
캠벨의 ‘영웅’ 은 떠난다.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떠나게 되어있다. 떠난 뒤엔 반드시 고난을 겪게 된다. 그러나 그 고난은 고난이 아니다. 운명이 부여하는 일종의 영웅 시험이다. 고난은 삶이 벼랑에 세워진다는 말이다. 삶의 벼랑에 세워진다는 것은 영웅 실험의 표적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람이 스스로를 죽일 수 있는 인간인지, 이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진짜 영웅인지, ‘운명이 마련한 구렁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 용기, 지식, 능력이 있는지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누군가 예비해 놓은 관문’이다. 벼랑에서 떨어지면 훨훨 날게 되거나 머리가 터져 죽는다. 그러나 영웅이 죽는 일은 없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도 죽지 않는다는 걸 영웅은 보여준다. 운명은 벼랑 아래에 안전 펜스를 설치해 놓고 ‘자기 살해’ 의 용기를 지녔는지에 대해 우리의 간댕이를 실험할 뿐이다. ‘단지 떠날 수 있느냐, 해낼 수 있느냐, 선택한 위험으로 스스로 갈 수 있느냐를 묻는 것’이라 그는 말한다. 선택해서 위험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위험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눈치 빠른 독자는 캠벨의 영웅은 이미 우리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걸 알았을 테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에서 캠벨의 표적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그는 ‘우리는 이 실험에 조차 참여하지 않으려 애쓴다’ 고 안타까워한다. 벼랑에 서는 건 두렵다. 우리는 늘 두렵다. 자영업자는 돈 못 벌까 두렵고 월급쟁이는 성과를 내지 못할까 두렵고 쏟아지는 일에 두렵고 비난을 받을까 두렵고 떨릴까 두렵고 거절당할까 두렵다. 손님 떨어지거나 직장을 그만두면 먹고 살길이 막막하여 두렵고 가족이 천대받으면 사람들의 시선이 두렵다. 너도 두렵고 나도 두렵다. 이때 조지프 캠벨의 해법은 이렇다. ‘존재를 그만두지 않고는 어떤 생명도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를 획득할 수 없다.’ 자신은 원래 고난을 극복하도록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영웅’ 이었음 자각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끝으로 자신을 밀고 나가버리는 것, 두려움은 두려움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끝으로 끝까지 밀고 가면 두려움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내가 두려워한 실체가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용기가 생기고 그때 생긴 용기는 삶을 추동한다. 두려울 때 한 발 내 딛는 것이 용기고 믿을 수 없을 때 믿는 것이 믿음이다. 이렇게 고난 극복한 영웅은 떠났던 자리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이다. 책 속엔 전 세계의 신화를 수집하여 소개한다. 신화 속에 살아있는 수많은 영웅의 모습을 일반화시키고 그 상사성(相似性)을 설명한다. 결국, 영웅은 모험을 떠나고, 어려움에 봉착하여 고통을 당하지만 이를 극복하고 결국에는 공동체, 즉 사회구성원들을 구할 선지자적 능력을 갖추고 나타나는 인물이다. 정확하게는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것에 대한 감상에 현혹되지 않고 과감하게 자기 본성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자’ 라고 캠벨은 정의했다.
우리 같은 필부필부 (匹夫匹婦)는 매번 차선을 선택한다. 차선을 선택한 삶이란 인화성 짙은 일들을 애써 피해왔다는 말과 같다. 환희로 가득 찬 욕망을 차가운 이성으로 절제했다. 알고 보면 넘쳐나는 욕망을 모조리 자르고 베어낸 결과가 지금이 아닌가. 캠벨은 말한다. 삶의 욕망이 그대를 덮칠 때 두려워하지 말고 떠나라, 내면의 북소리에 자신의 맥박을 맞추고 절제와 이성으로 베어낸 자리를 심장으로 메꾸어라, 조그마한 벽도 오르지 마라 막아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조언을 듣지 마라, 알고 보면 그 벽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으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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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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