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mberto Eco, 1932~2016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 – 움베르토 에코 (Umberto Eco, 1932~2016)
참고한 책: ‘장미의 이름’ Il nome della rosa
–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009.11.15
책, 웃음, 진리. 이탈리아 기호학자인 움베르토 에코(2016년 2월에 작고했다)의 소설 ‘장미의 이름’ 을 관통하는 세 가지 세계다. 책과 세계, ‘웃는 인간’, 진리담론의 역사. 소설이라고 하지만 중세 유럽 수도원의 일상과 가톨릭 종파와 정치가 얽히고 엮인 역사적 대립, 초월론적 형이상학과 철학적 담론의 각축이 어우러진다. 소설의 형식을 빌린 철학, 사건사(史)의 실제적 기록 같은 소설이다. 그도 그럴 것이 움베르토 에코는 대학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를 전공했고 중세미학에 관한 연구를 출발점으로 본격적인 학문세계에 들어섰던 중세학자이기도 해서 총체적인 지식을 버무리는 것이 가능했던 것 같다. 읽고 나면 지식의 지평이 한껏 넓어져 있을 테다.
책은 갖가지 기호들과 기호들이 만들어내는 복선으로 넘쳐난다. 한번 펼친 책은 다시 덮지 못한다. 벌건 눈을 한 채 시간을 잊고 읽어 나간다. 도무지 풀리지 않을 것 같던 사건과 수수께끼들이 풀려나가는 과정이 놀랍기만 하다. 놀라움이 가시지 않았지만, 책을 덮어야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아니나 다를까 다 읽은 뒤에도 소설을 더 깊게 그리고 제대로 이해하려는 독자들이 꽤 많았던 모양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장미의 이름을 출간한 직후 책의 이해를 넓히고 오독을 피하기 위해 ‘나는 장미의 이름을 이렇게 썼다’ 라는 책을 펴내며 소설의 역사적 배경과 기호학적 원리에 관해 친절하게 설명한다. 자신이 직접 쓴 창작노트를 써서 ‘장미의 이름’ 깊게 읽기에 도전하는 독자들에게 ‘아리아드네의 실’을 건네준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철학자 강유원 선생이 출간한 ‘장미의 이름 읽기’ 에서 중세시대의 철학적 맥락까지 자세히 짚어주고 있다. 일독을 권한다.
소설은 1327년 11월로 우리를 데려 놓는다. 스포일러를 말해선 안 된다. 소설은 아직 읽지 않은 사람들에게 줄거리가 전부로 오인된다. 다만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웃음과 진리에 관해서다. 소설의 내용은 책의 미궁(중세 수도원의 장서관)에서 책이 만들어낸 또 다른 미궁(텍스트의 독해)이 다시 인간의 살인사건과 연결된 알리바이의 미궁(컨텍스트의 텍스트)에 빠뜨린다. 소설에서 문제가 되는 서책은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다. “공허한 말, 웃음을 유발하는 언사를 입에 올리지 말지어다” 로 첫 등장을 알리는 호르헤 수사는 자신이 진리의 수호자라 여긴다. 그는 자기가 옳다고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들을 절멸시키는 파시스트적 사고를 가진 자다. 그는 웃음을 경멸한다. “악한 것을 보고 웃는다는 것은 악한 것과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요, 선한 것을 보고 웃는다는 것은 선으로 말미암아 스스로를 드러내는 선의 권능을 부인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자였으므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근거 삼아 “권위를 무화시키는 데 웃음은 아주 좋은 무기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수도원의 수사들을 모조리 죽인다. 그리고는 시학 제2권을 철저하게 숨긴다. 그렇다면 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이 그에게 문제가 되는 걸까?
그 이유에 대해 철학자 강유원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중세 철학에 있어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중세 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써 초월적인 신을 논증하고자 하였지만 신을 논증하기에 마땅한 이성적 도구가 없었다. 12세기가 되자 아랍 세계에서 보존되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들이 서양에 유입되면서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훌륭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의 자연철학은 성서에서 도출되는 것들을 보충했다. 그것은 또한 비판적 추론에 필요한 도구와 개념적 원천을 제공하면서도 동시에 굳이 신을 개입시키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만으로도 세계를 설명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의심들을 불러일으키기 시작하였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세 철학을 유지시켜 주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중세 철학체계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경지식을 가지고 다시 소설 속으로 들어가 보자.
호르헤 수사의 근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지식의 역사에는 발전이나 진보가 있을 리 없습니다. 오로지 연속적이고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요점약설(要點略說)이 있을 뿐입니다.” 그가 보기엔 새로운 지식의 탐구는 불필요했던 것이다. 계속되는 지식의 진보는 자신이 수성하고 있는 진리(라는 게 있다면)를 붕괴시키는 계기가 될 테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라는 것은 오직 자신만이 알고 있으며 그 진리를 지켜야 하는 진리 담지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었던 셈이다. 호르헤 수사와 대척점에 서 있는 소설 속 인물, 윌리엄 수사의 말은 그러므로 의미심장하다. “삶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우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좇아야 할 진리가 아니겠는가.”
진리를 삶으로 바꾸어도 같은 말이겠다. 우리는 삶에서 도망갈 수 없다. 삶을 넘어설 수도 없다. 이를테면 삶은 부처님 손바닥 같은 것이다. 삶으로부터 아무리 멀리 떠나도 여전히 삶이다. 삶에 달라붙어 있어도 삶이고 삶과 떨어져도 삶이다. 삶은 오직 죽는다는 사실만 알고 있는 긴 역사(歷史)와도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명멸할 과정이며 몰락이다. 만약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우리는 웃을 것인가,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릴 것인가. 더는 호르헤 수사와 같은 삶과 진리에 대한 경직과 심각함이 우리 삶을 갉아먹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지 않던가, 삶을 돌이켜 보면 별달리 기대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지 않던가. 삶은 때로 자신의 의도대로 순항하는가 싶다가도 알 수 없는 운명의 폭풍 속에 내던져지기도 한다. 주먹을 불끈 쥐고 모든 걸 박차고 떠나는가 하면, 어디서 왔는지 모를 환희가 온몸을 지배하기도 한다. 시간과 장소에 쑤셔 넣으면 시들 것 같지 않던 의지는 수많은 형태로 무너지기도 하고, 알 수 없는 당황으로 온몸의 피가 솟구치는 삶의 의욕에 달아오르기도 하지만 속수무책의 허탈함으로 온몸에 피가 다시 빠져나가는 무참함을 경험하기도 한다. 삶이 진화한다거나 진보, 발전한다 말할 수 없는 건 이 때문이다. 그것은 나이가 많고 적고의 문제가 아니다. 오래 산 사람을 구분하여 고난이 우회한다거나, 시간이 비켜 가진 않는다. 움베르토 에코가 장미의 이름으로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던진 세 가지, 책, 웃음, 진리의 세계는 어쩌면 삶을 경직되지 않고 여유와 반어와 풍자가 가득한 풍요로움으로 살기를 바랐던 게 아닌가 한다. 분명 이와 같을 것이다. 호찌민, 보름달이 유난히 빛나는 목요일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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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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