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3,Saturday

임진왜란을 막지못한 당파대결

지난 이야기
만년 야당 사림파가 180년 만에 처음으로 정권을 잡았으나 사림파 내부의 자리 싸움으로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쪼개집니다. 이른바 4색 당파의 시작 입니다.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으로 인해서 국가보다는 당과 가문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따라서 조선의 백성들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힘든 삶을 살아갑니다.
당파대결과 외교정책
사림파가 동인 서인으로 쪼개진 후 두 계파는 서로 정권을 주고 받습니다.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들이 선조의 미움을 받아 동인들이 먼저 정권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을 바꾼 정여립이 역모 사건에 연류되어 동인들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 합니다. 서인 집권 당시 1580년 부터 10여년 중국과 일본은 격동의 시기를 맞이합니다. 중국의 사정을 먼저 살펴보죠. 청 태조 누르하치가 만주족을 통일하고 옛 고구려 영토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만족하지 못하고 중국과 전쟁을 선포하고 중국 영토 전역을 침공 합니다.
그러나 조선의 신하들은 성리학에 의존하여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를 오랑캐 국가라고 멸시하고 한족의 명나라를 섬깁니다. 청과 명 두 나라의 실력이나 향후의 판세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외교 정책을 펼칩니다.
다음은 일본의 사정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을 통치하던 무로마치 막부가 힘을 잃고 지방 영주들이 독립하여 세력 확장을 위해 100년 넘게 전쟁을 하는 전국시대가 도래 합니다. 전국시대 말기 나타난 일본의 걸출한 무장 오다 노부나가는 1860년 부터 22년간 전쟁을 벌여 일본의 모든 영주들을 굴복시키고 일본 영토의 70%를 장악 합니다. 하지만 오다 노부나가는 믿었던 신하 아케치 미쓰히데의 배신으로 1582년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후 농민 출신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의 주군 오다 노부나가의 자리를 강탈하고 1590년 일본을 통일 합니다. 아시가루 (농민 출신의 군인) 출신으로 대권을 잡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신을 도운 측근에게 줄 영토의 부족을 느낍니다.
게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농민 출신의 컴플렉스 때문에 자신을 영웅화 하려는 욕망으로 중국 정벌을 꿈 꿉니다.
이러한 국제정세에 깜깜한 조선은 청과 일본을 야만족이라 깔보고 있었습니다. 당시 사림파의 시각은 중국 한족과 조선을 제외한 모든 민족은 야만족이라는 “소중화 사상” (조선은 중국 한족을 문화민족으로 인정하고 중국은 세상의 중심 국가라는 중화사상을 신봉하고, 또한 조선은 작은 중국 이라 생각합니다. 게다가 한족과 조선 민족은 형제와 같은 민족이라는 뜻)에 물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야만족의 군대도 강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죠. 그러나 중국 정벌을 위해 길을 빌려 달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친서를 받은 조선은 깜짝 놀라 사실 파악을 위해 통신사를 파견합니다. 조선은 여야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정사는 서인의 황윤길, 부사는 동인의 김성일, 서장관 허성을 (허균의 형) 파견합니다. 통신사가 귀국 후 정사 황윤길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 하자는 보고를 하고 부사 김성일은 일본의 침략은 없을 것이니 백성들을 불안하게 하지 말자고 보고 합니다. 선조는 판단이 서질 않아서 마지막으로 서장관 허성의 의견을 묻습니다. 허성 역시 동인이라 김성일의 의견에 동조합니다. 이로써 선조와 동인의 찬성으로 쓸데없는 전쟁 준비로 선량한 백성들을 괴롭히지 말자는 결론을 내립니다. 항상 국민 핑게를 대는 정치권의 고질 병은 조선시대나 현대나 마찬가지 입니다.

개혁을 하면 뺏길 것이 많은 기득권 층은 저항하기 마련인데 자신의 이익을 반대 명분으로 내세우기 어려워서 국민과 국가를 거론 합니다. 요즘 정치인도 항상 국민을 위해서 라고 주장하고 이익은 기득권 층에 돌아가는 경우가 많은 것과 같습니다. 또한 태종 이방원은 즉위 후 조선 건국 당시 자신이 죽인 정몽주를 충절의 표본으로 만듭니다. 이는 태종의 정변 당시 정도전을 죽인 명분 중 하나 이기도 하고, 왕실에 대한 신하들의 충성을 유도하는 측면도 존재 했습니다. 어쨌든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패배한 정치 집단이 되어서 대부분 학자들이 향촌으로 내려가서 후진양성에 전념합니다. 이렇게 신진사대부 온건파는 100년 이라는 긴 세월 기다림 끝에 정치에 등장하게 됩니다.

확신이 되어버린 현실성 없는 희망
일본의 침략은 없다 하면서 대비를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약칭 전라 좌수사) 이순신을 임명하고 동래 부사에 송상현을 파견합니다. 그래도 불안한 마음이 남아서 성곽의 보수와 군적 검사 등 형식적인 대비는 했습니다. 참으로 답답한 사실은 일본은 공식적인 외교 문서를 보내 조선 침략을 노골화 했으며, 대마도 도주와 고니시 유키나카 등 여러 경로에서 침략을 감지 했습니다. 하지만 선조와 조정 대신들은 전쟁이 두려워서 전쟁이 없다는 소수 의견을 믿고 싶었습니다. 현실성 없는 희망은 확신으로 변해가고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가서 당파 싸움으로 시간을 보냅니다.
전쟁 준비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병력을 나고야에 집결 시킵니다. 침략군의 규모와 무기 등의 정보는 일본 사신을 통해 접수했으나 마지막 통보까지 무시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사전에 간자를 보내 조선의 성곽과 군수기지 파악 등 준비를 철저히 합니다. 그리고 일본군은 백년 넘게 전쟁을 경험한 정예군 입니다. 조선과 일본의 준비 과정을 보면 조선은 도지히 이길 수 없는 전쟁으로 느껴집니다. 1592년 4월 13일 아침 부산 앞 바다를 가득 메운 일본 함선을 보고 조선은 전쟁을 실감 합니다. 경상 좌수사 박홍은 수백척 일본 군함을 보고 겁이나서 도망가고 경상 우수사 원균도 역시 도망 갑니다. 더욱 답답한 노릇은 조선 수군의 자랑거리 판옥선을 전부 불태우고 도망간 사실 입니다.
당시 조선 장수들은 도망 가면서 모든 장비나 군수품 등을 불태우고 가는 습관이 있는데 이는 적군의 수중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생각 입니다. 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전투를 할때 군수 장비가 없어 전투 불능 상태로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부산 첨사 정발은 천명의 군사로 일본 선발대 고니시 유키나까의 2만 대군을 맞이하여 전원 몰살 당 합니다. 이튿날 동래에 도착한 고니시 유키나까는 길을 비켜 달라는 서신을 보내자 동래 부사 송상헌은 “싸우다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비켜 주기는 어렵다” 라는 답서를 보내 조선 장수의 기백을 보입니다. 물론 동래성은 하루를 못 버티고 3천명의 군사와 7천명의 성민 중 여자와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죽습니다.
수군에 이어 육군도 도망 갑니다. 경상도 순변사 이일은 상주에서 전투다운 전투도 하지 않고 도망가서 충주 탄금대 신립 장군의 본진과 만납니다. 4월 28일 신립 장군의 기마 부대는 고니시 유키나카의 조총 부대와 충주 탄금대 벌판에서 만납니다. 8천 조선 기마병은 일본의 조총 부대에게 전멸을 당하고 일본군은 진격합니다. 선조는 신립 장군의 패전 소식을 듣고 몽진 준비를 합니다. 하지만 신하들은 국왕이 한양을 버리고 도망가면 백성들이 힘써 싸우지 않는다고 만류 했지만 겁이나서 도망가는 선조를 막을 길은 없습니다.

도망가는 국왕과, 불타는 궁궐
나중에 전쟁사 설명할 때 임진왜란에 대해 자세히 설명 하겠지만 우선 이해를 돕기위해 간략하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임진왜란 초반에는 대비 없이 기습을 당해서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신립 장군은 준비를 하고 출전을 했는데 3시간 전투 끝에 8천 조선의 정예 기마병은 전멸합니다.
전투 3일 전부터 비가 내려서 충주 벌판은 땅이 질척거려서 기마병 전투는 불리 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간파한 김여물 장군은 천명의 군사를 주면 문경 새재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립은 부하 장수의 건의를 묵살 합니다. 김여물 장군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전투에서 부하 장수들의 합리적 건의를 무시하고 사령관이 독단적으로 결정하면 국가는 망한다고 강하게 주장하자 김여물에게 곤장을 칩니다. 나중에 탄금대 전투에서 김여물 장군은 곤장 맞은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채로 전투하다 전사 합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카는 문경 새재에 조선의 복병이 있을것 이라고 예상하여 며칠간 수색대들 보냅니다. 복병이 없다는 보고를 받은 고니시 유키나카는 “이런 천혜의 요새를 활용할 줄 모르는 조선의 장수들은 바보다 또한 이런 바보들을 장수로 임명한 조선 국왕도 바보다” 우리에게는 치욕스런 말을 합니다만 맞는 말 입니다. 하지만 이순신 장군의 해상 보급로 차단과 의병의 활동으로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합니다.
한편 도망가는 선조는 경복궁이 불타는 것을 보고 화재의 원인을 파악하라고 지시합니다. 궁궐 화재사건은 일본군이 아니고 분노한 조선 백성들의 방화라고 보고 받자 선조는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어찌 백성들이 자기 임금의 대궐에 불을 지를 수 있는가 한양으로 돌아가면 엄중히 죄를 묻겠다” 일국의 군주가 자신이 백성들을 잘 돌보지 못한 반성은 없고 백성들을 괘씸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임진강을 건너 도망갈 때 임진강 어부들의 배를 징발하여 강을 건넌 후 일본군의 추격이 무서워서 어부들의 재산인 배와 집을 전부 불살라 버립니다.

user image

다음 이야기
임진왜란 중 있었던 내용과 임진왜란 끝난 후 선조의 행동에 대해서 알아봅시다. 임진왜란 직전 동인은 당이 쪼개져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졌는데 임진왜란 후 서인 정권은 북인으로 교체 됩니다.

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This site uses Akismet to reduce spam. Learn how your comment data is processed.

Copy Protected by Chetan's WP-Copyprot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