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180년 동안 성리학을 공부한 사림파는 정권 획득 후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에 동서로 갈라집니다. 조선의 우수한 전랑 제도 역시 권력 투쟁에 악용됩니다. 이때부터 300년 사림파 내부의 권력 투쟁은 이전의 훈구파보다 더 심하게 진행됩니다. 초심을 잃어버린 속도가 훈구파보다 빠릅니다.
붕당을 예언한 영의정
“만년야당” 많이 들어본 말 입니다. 현대 정치에도 50년 만년 야당이 존재했고, 조선 초 등장한 사림파도 80년 야당 생활을 했습니다. 사림파는 수천명의 희생자를 댓가로 치르면서 얻은 정권인데 생각대로 잘 되지 않습니다. 훈구파의 부패한 정치 때문에 어부지리로 정권을 잡은 사림파는 10년 남짓 유지하다가 분열됩니다. 이러한 붕당을 예언한 사람이 있었는데 영의정 이준경 입니다. 이준경은 사림파의 지나친 원칙주의와 이론주의 때문에 분열을 예언 합니다. 또한 자신들이 속한 집단과 다른 주장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이러한 현실을 꿰뚫어 본 이준경은 죽기 직전에 선조에게 유언 상소를 보냈는데 “당여가 생기면 장차 조선이 위험에 처할 수 있습니다. 초기에 잘 다스려 우환을 제거 하십시요”
이는 정확한 예측이지만 모든 신하들은 이간질 시키는 상소라고 반발 합니다. 대간들은 죽은 이준경의 관직을 삭탈하고 재산을 적몰하라고 탄핵 합니다. 사림파의 선생님으로 추앙받는 율곡 이이 조차 이준경을 비판 했습니다.
모든 신하들이 이준경 비판에 나서자 서해 유성룡 혼자서 이준경을 변호합니다. 유성룡은”죽는 순간까지도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고 소신있는 발언을 한 이준경을 벌까지 주는 것은 도리가 아닙니다. 선비의 의견이 마땅치 않으면 채택하지 않고 버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죄를 묻는 것은 선비의 언로를 가로 막는 행위 입니다. 과연 이준경이 죽고 다음해 이조정랑 자리 싸움을 하다가 이준경이 죽은 4년 후 사림파는 동인 서인으로 갈라집니다. 이준경의 예측이 적중하자 선조는 이준경을 탄핵하던 신하들을 질타합니다. 그러나 모든 신하들이 반성과 사과없이 침묵하고 있을때 율곡 이이 혼자서 죽은 이준경에게 사과하고 자신의 어리석음을 반성합니다. 현대 정치인들 역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 건 마찬가지입니다.
동인과 서인의 정치 성향 차이점
동인과 서인의 이념과 정치 성향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동인은 서인보다 젊은 소장파 관료들이 많았고 사상적으로는 퇴계 이황의 “주리론”에 (정신세계)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따라서 퇴계 이황은 동인들의 정신적 지주 입니다. 반면에 서인들은 경륜이 많은 중년 정치인들이 많습니다. 사상은 율곡 이이의 “주기론”에 (현실세계)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훈구파라는 공동 적을 상대할 때는 단합했으나 훈구파가 사라지자 동 서 두 정파의 이념적 분화가 일어납니다. 동인은 서인과 훈구파를 비슷하게 인식하고 명분보다 권력만 추구하는 집단으로 인식합니다. 서인들은 동인을 현실을 무시한 환상가로 인식 합니다. 이런 차이로 이준경은 사림파의 분당은 필연적인 것으로 예측합니다. 하지만 이준경의 예상 보다 더 심하게 동인과 서인은 영원히 합칠 수 없는 길을 갑니다.
게다가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갈라지고 서인은 “노론” “소론”으로 갈라져서 우리가 알고 있는 4색당파 [남인, 북인, 노론, 소론]이 탄생 합니다. 일제 강점기 교육 흔적이 강하게 남아서 4색 당파는 나쁜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당파 싸움은 나쁜 것 일까요? 현대에도 정당끼리 정권을 잡기 위해서 대결 하는데 이는 민주주의의 근본 입니다. 조선의 붕당 정치는 현대의 정당 정치와 같은 개념 입니다. 630년 전 시작되어 400년 간 이어온 우리의 붕당 정치는 세계 수준에 뒤처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당정치가 다른 나라보다 발달한 국가 입니다. 다만 230년 전 18세기 유럽의 르네상스 처럼 시대의 흐름을 타고 사상의 변화가 일어나지 못해서 세계 수준에 뒤처지게 됩니다. 이는 성리학적 사고의 경직성 때문입니다.
동서 분당 사건 후 율곡 이이는 이준경을 비난한 죄값을 치르기 위해서 동인과 서인의 화합을 위해 노력합니다. 시시비비 토론을 좋아하는 사림파 특성상 동인과 서인은 서로 누구의 말이 맞는지 따져 보는 것을 원 했습니다. 이때 율곡 이이는 유명한 “양시론”과 (둘다 옳은 경우) “양비론”을 (둘다 그른 경우)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현재 동인과 서인의 논쟁은 국가를 위하고 백성을 돌보기 위해 서로 다른 주장을 하므로 둘다 옳은 경우이다” 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림파 선비들은 “도대체 서로 다른 주장을 펴는 사람이 둘다 옳고, 둘다 나쁜 경우가 어디에 있단 말이요?” 라고 반문하자 율곡 이이는 말 하기기를 “둘다 옳은 경우나 둘다 나쁜 경우가 가끔 있는데 예컨데 은나라 폭군 주왕을 폐위시킨 주 무왕도 옳고, 무왕의 이신벌군을 비판한 백이 숙제 형제 또한 옳습니다. 그러나 춘추 전국시대 명분없는 전쟁을 한 군주들은 욕심 때문에 일으킨 전쟁이라 모두 나쁜 경우 입니다” 라고 답 합니다. 하지만 이권 쟁탈에 눈 먼 사림파는 율곡 이이의 중재를 거부해버리고 율곡의 노력은 무산 됩니다. 사실 율곡 이이는 당시 동인과 서인을 모두 선의의 토론을 한다고 믿은 것 같습니다. 물론 다수의 역사 학자들은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사건은 사림파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현대적 정권 이양 같은 동인 서인의 정치
하지만 선조 재위 때에는 정치적 사건에 따라 동인과 서인이 서로 권력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현대 정치의 선거에 의한 정권 이양 같은 느낌이 듭니다. 민주주의가 잘 발달한 국가는 10년 주기로 여당과 야당이 서로 바뀝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선거제도가 없었으므로 상대편의 잘못이 있을때 임금이 권력교체를 합니다.
첫번째 권력은 세자책봉 사건으로 동인이 차지 합니다. 당시 선조는 신성군을 세자로 책봉 하고자 했으나 서인의 송강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주장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고 서인들은 요직에서 배제 됩니다. 당시 광해군의 세자책봉 문제는 동인과 서인 양당의 합의사항 입니다. 그러나 손익 계산을 따져본 동인 영수 이산해는 병을 빙자하여 어전 회의에 불참했고 서인 대표 송강 정철 혼자서 여야 합의 사항을 전달 하다가 선조의 분노를 산 경우 입니다. 당시 동인 이산해는 서인과 합의사항을 묻는 선조의 질문을 받고 답할때 합의사항은 없었다고 부정합니다.
두번째 권력 교체는 “정여립의 모반사건” 입니다
정여립은 서인에서 동인으로 당적을 옮겨서 서인들에게 “철새 정치인” 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이러한 정여립에게 역모 고변이 접수 됩니다. 고변자는 “송익필”인데 당시 신분은 천민 입니다. 사건 접수 초기부터 정여립의 역모는 조작 의혹이 있어서 집권당 동인은 원만한 처리를 계획하고 사건을 확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집권당 동인의 처리를 서인들은 “봐주기 수사” 라고 맹공을 펼칩니다. 430년 전 사건 이지만 현대정치와 비슷한 용어와 내용이 많이 나옵니다. 서인들의 상소가 잇달아 제출되자 선조는 추국관을 (수사책임자) 서인 영수 송강 정철로 교체합니다. 드디어 사건은 확대되고 선조, 서인, 송익필 3인방의 의도대로 진행되어 수십명이 희생 됩니다. 이 사건을 “기축옥사”라고 하는데 수사기관의 의도대로 사건을 동인 전체로 확대시켜 서인들이 권력을 장악한 사건 입니다.
“정여립 역모사건”은 조작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송익필은 양반가 서출인데 집안이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천민으로 추락합니다. 송익필의 고변이 서인들 입장에서는 나쁠게 없습니다. 성공하면 좋고 실패해도 자신들과 관계가 없다고 하면 됩니다. 송익필은 방계로 왕위 계승한 선조의 약점과 서인의 권력욕을 이용한 승부수가 성공 합니다. 드디어 송익필은 꿈에 그리던 면천을 하고 양반 신분을 획득합니다. 선조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컴플렉스를 지니고 있어 모반 사건을 계기로 신하들에게 경고성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서인들은 동인에게 복수하고 권력을 획득 합니다. 430년 전에는 선거제도가 없으므로 이처럼 조작된 사건으로 권력을 잡는 방법이 많이 등장 합니다.
다음 이야기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진 사림파는 일본의 침략을 눈앞에 두고도 국가보다 당과 가문의 이익을 위해 임금과 백성을 속이는 내용에 대해 살펴보고 [남인 북인 노론 소론]으로 갈라지는 조선시대의 정당에 대해서 살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