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다르다. 취향, 행동, 언어, 습관까지 모두 같은 게 하나도 없지만, 직장에서 그리고 삶의 현장 곳곳에서 밥벌이 정체성이 삶을 지배하는 한 우리는 의도치 않게 같아진다. 밥 벌어 먹는 곳에선 일말의 인간적 감각을 요구하지 않는다. 파란 하늘, 흰 눈, 들판의 냄새, 산정 풍경 등에 관한 개인의 서정은 철저하게 배척된다. 물론이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런 것들은 회사에서 또는 사업장에서 요구되지 않고 요청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모든 대리, 과장, 부장을 달고 있는 사람들은 각자의 이름만 다를 뿐 같은 사람이 된다. 이 사회는 개인성과 다양성, 인간적 욕망이 용인되는 곳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회사와 직장, 사회와 국가는 어떤가. 우리는 스스로 자발적인 욕망으로 다양한 개성을 표현한다고 생각하지만, 그 욕망이 누구의 욕망인지 우리는 모른다. TV광고의 욕망인가, 기업의 욕망인가, 부모의 욕망인가, 사회의 욕망인가, 욕망의 욕망인가? 기후변화의 속도로 우리는 같아지고 있다.
취업이 일생일대의 꿈이었던 사람조차 일하기 시작하면 행복하지 않다. 그토록 바랐던 꿈이 이루어진 순간인데 그들은 왜 행복하지 않은가. 우리가 월급과 한 달 매출에 목이 매이면 매일수록 행복이 빠져나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월급날 왜 어깨를 축 늘어뜨려야 하는지, 허탈한 뒷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지, 터덜터덜 걸어가는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털렸고 어디서 기진하고 무엇 때문에 맥진했는지 알 수 없다.
자기 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취업해서 번듯한 어른으로 거듭나는 건 남들이 원하는 욕망이었기 때문이다. 부모의 욕망이었고, 선생님의 욕망이었고 이 사회의 욕망이었다. 우리는 육감적으로 안다. 남들이 원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노예다. 그러나 수많은 경쟁을 물리치고 들어온 회사를 나갈 수 없다. 어떻게든 붙잡고 있어야 한다. 꿈이니 딴짓이니 개소리를 해대도 남 일처럼 귀를 닫고 야만적인 일상에 자신을 구겨 넣는다. 우리의 고민, 혼자 늦은 밤 테레비조차 꺼야 하는 시간, 밀려오는 삶의 공허함, 자기도 모르게 떠밀려온 삶이 측은하다. 개돼지와 다를 바 없는 나 자신이 초라하다. 밥 벌어 먹는 일이 나를 오롯이 설명할 수 없다는 명징한 사실로부터 아일랜드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은 시작된다. 바로 이 지점이 ‘젊은 예술가의 초상’의 스피릿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한 사내가 유년시절과 사춘기, 청년의 시기를 거치며 한 사회가 개인을 어떻게 말 잘 듣는 ‘전체 중에 하나’로 길러내는지 잘 보여준다. 주인공 스티븐은 강력한 억압과 제약을 꿋꿋하게 견뎌내며 세상과 맞짱 뜬다. 제임스 조이스의 예민한 촉수가 주인공 스티븐에게 그대로 겹쳐진다.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때 그물이 그것을 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 한다고. 너는 나에게 국적이니 국어니 종교니 말하지만, 나는 그 그물을 빠져 도망치려고 노력할 거야.”
그물은 억압이고 도망은 욕망이다. 프랑스 철학자 라깡은 자신의 욕망에 접속한 그 순간 즉 내 이상과 꿈이 실제계와 맞닥뜨린 그 찰나를 ‘쥬이상스’ Jouissance라 했다. 자신의 욕망을 찾아낸 열반 같은 쾌락의 순간을 위해서라면 주인공 스티븐은 언제든지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언제나 내면은 갈등한다. 떠나지 못하게 하는 두려움이 늘 발목을 잡는다. 그럴 때마다 주인공은
“나는 내가 두렵다고 한 것들의 이면에 악의에 찬 현실이 있을 거라 생각해. 더 두려운 것은 2천 년이라는 세월에 걸쳐 뭉쳐진 권위와 존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한 상징에 대해 내가 거짓된 경의를 표할 때 내 영혼 속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화학작용”이라 외치며 두려움과 싸운다. 그는 마침내 마지막 글을 남기고 “4월 26일, 다가오라, 삶이여! 나는 체험의 현실을 몇 백만 번이고 부닥쳐보기 위해, 그리고 내 영혼의 대장간 속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내 민족의 양심을 벼리어내기 위해 떠난다. 4월 27일, 그 옛날의 아버지여, 그 옛날의 장인 匠人 이여, 지금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나에게 큰 도움이 되어주소서. 더블린 1904년. 트리에스테, 1914년” 세상에 길들여지지 않은 한 사내는 예술가의 길로 떠난다.
‘옛날의 장인’은 다이달로스다. 제임스 조이스는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라는 이름에 ‘다이달로스’를 심어 놓았다. 그는 결국 떠난다. 떠난 뒤 어떻게 되는 지는 모른다. 소설은 떠나는 장면에서 끝이 난다. 떠난 주인공은 멋진 예술가가 되어 다시 돌아올 수도 있고 불행이 그의 인생을 덮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늘 찾아 헤매던 불행이다. 불행은 자유를 찾게 해 준다. 소설은 자전적이다. 1904년 조이스는 그의 나이 22살에 더블린을 떠나 사실상의 자기유배의 길에 나선다. 그는 떠나며 10년 후 기필코 화제가 될 만한 책을 쓰겠다고 선언한다. 1914년에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서 결국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완성하여 잡지 연재를 시작한다. 떠난 뒤 10년, 그 땀의 계곡을 행진했던 10년이 조이스를 인류 앞에 데려다 놓았던 것은 바로 떠남, 불행을 찾아 떠나는 이른바 불행의 정신이다.
꿈을 이루기로 마음먹는 순간은 세상이 달라 보인다. 스스로 떠나는 것, 그 자유로운 결정의 순간에는 일종의 쾌감 같은 게 있어서 주위를 온통 감싸는 희열이 느껴진다. 그것은 시간을 지배하는 무시간적 공간에 있는 것도 같고, 앞으로 닥칠 일들을 장악하며 이끌어가는 주체적 자아가 된 느낌, 두려움이 순간 사라지고 사위가 자신감으로 둘러싸이는 느낌과도 같다. 지구를 통째로 들고 흔들고 있다는 착각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단지 나 자신이 하고 싶다는 이유로 자신의 발 밑으로 내 욕망이 아닌 모든 욕망들을 밟아버린 적이 있는가? 한계가 명확한 유한자임을 자각하는 순간 무한을 인식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직장에 몸담을 수밖에 없고 밥벌이를 떠나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연약한 유한자이므로 삶 너머의 삶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욕망하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 그 욕망에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는 길 말고는 방법이 없다.
떠나기로 마음 먹었을 때 명심해야 할 게 있다. 느닷없이 기회라는 것이 찾아오면 그때 가서 뒷걸음질 치지 않기를 바란다. 슬그머니 발을 빼며 안온한 삶에, 노예적 당위를 장황하게 떠벌리지 않기를 바란다. 전환의 기회는 메시아처럼 출현해서 그걸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서는 수동적 전환이어선 안 된다. 그렇게 안 되려면 전환을 넋 놓고 기다릴 게 아니라 찾아 나서야 하는 게 맞다. 지겨울 때까지, 토가 나올 때까지, 마누라 자식새끼들 내팽개칠 만큼 그대를 욕망하는 그 무엇을 말이다. 삶의 파괴력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는 일이 없도록 눈을 뜨고 그 펀치를 맞아야 한다. 펀치 한 방에 나가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비록 그것이 불행을 자초할지라도 그 불행을 견디는 것, 그대 스스로를 견디고 말겠노라, 나는 나 자신을 견딜 수 있다는 불행의 정신으로. 서서히, 신중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가차 없이. 제임스 조이스에게서 나는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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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용E-mail: dauac9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