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3,Saturday

‘율리시즈 Ulysses’ – 제임스 조이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은 6월 16일이다. 나에게 매년 이날은 한 사내를 떠올리게 한다. 아일랜드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다. 1922년 발표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소설 율리시즈 Ulysses (‘율리시즈’는 ‘오디세우스’의 로마식 이름이다) 의 시간적 배경이 된 날이 1904년의 6월 16일이다. 1,2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자랑하는 이 소설이 출간된 날은 1922년 6월 16일이다. 제임스 조이스에게 이 날은 의도적이었으니 그가 사랑했던 아내 노라 바네클 Nora Barnacle과 첫 데이트 했던 날을 기억하기 위해 6월 16일을 그의 소설에 남겨둔 것이다.

소설의 구성 자체가 그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 되는 소설이 있다. 김동인의 배따라기는 액자 구성의 전형을 보이고 있고 이 소설, 율리시스와 유사한 구성인 박태원의 소설 ‘구보씨의 하루’는 구성 프레임이 소설의 주제를 결정 지을 만큼 특징적이다. 구성상 ‘율리시즈’는 18개의 에피소드가 확연하게 끊어져 독립된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는 ‘의식의 흐름’이라는 고차원적인 기법으로 주인공 Leopold bloom이라는 유태계 광고업자가 겪는 하루 동안의 일을 따라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오디세우스의 행보와도 연결시켜 읽으면 흥미롭다. 다만 읽어 내리는 동안 일종의 인내가 필요한데 책의 역자는 50년 간 이 소설을 연구했다고 한다. 위안이다. 연구가 필요한 소설을 한번에 읽고 뜻을 곧바로 이해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므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읽으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하나의 지적 모험이며 정신적 고통과 괴로움을 감수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같다. 텍스트를 읽고 행간의 의미를 찾아가며 재미있으면 그만이고 재미없으면 안 읽으면 됐었던 ‘소설’에 대한 생각은 ‘율리시즈’ 앞에서 여지 없이 무너진다. 그 난해함과 함축, 함의, 생략, 은유, 간접 언급 등은 머리를 쥐어 뜯게 만들고 언어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유희 수준의 글, 외설과 은유예술을 오가는 줄타기, 부도덕과 비관, 퇴폐적 이야기 속의 함의를 읽어내야 하는 의무는 책을 읽다가도 밀쳐내게 만든다. 제임스 조이스는 이를 알았는지 비아냥거리며 독자들에게 하는 말이 기가 막히다.

‘나는 율리시스 속에 굉장히 많은 수수께끼와 퀴즈를 감추어 두었기에 앞으로 수 세기 동안 대학교수들은 내가 뜻하는 바를 거론하기에 분주할 것이다. 이것이 자신의 불멸을 보장하는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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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나에게 그의 다른 소설 ‘젊은 날의 초상’에 나오는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데,

”예술가는 창조의 신처럼 자기가 만드는 작품의 내면이나 이면 혹은 그 위나 초월적인 곳에 남아서 남의 눈에 띄지 않은 채 스스로를 순화하여 사라지게 한 후 초연히 손톱이나 깎고 있는 거야. 손톱까지도 순화해서 없어지게 하고 있겠지.”

예술가의 욕망은 거대해서 자기세계를 통해 현실세계를 집어 삼키려는 조이스의 예술적 욕망을 읽곤 한다. 나를 한번 알아맞혀 보라며 세상에게 던지는 가장 난해한 퀴즈다. 그래, 예술은 이래야 한다. 아일랜드인들은 지구를 통째로 줘도 그와 바꾸지 않는다고 말한다.
16일 수도 더블린에서 소설 속 주인공 레오폴드 블룸의 하루를 따라 해보는 블룸스 데이 blooms day 축제를 만들어 그를 기린다. 마치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10년의 여정을 하루 만에 겪은 주인공처럼 꼭 그와 같이 그날은 모두가 오디세우스가 되어 의상을 갖춰 입고 블룸이 걸었던 거리를 걷거나 소설을 낭독하는 페스티벌을 열며 제임스 조이스를 추억한다.

율리시즈를 소개하고 있지만 실은 개인적으로 그의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좋아한다. 그 중에서 좋아하는 글은 주인공 스티븐이 마침내 자기의 길을 떠나며 세상에 일갈하며 말하는 구절이다.

‘그것은 더디고 어두운 탄생이며 육체의 탄생에 비해 더 신비한 거야. 이 나라에서는 한 사람의 영혼이 탄생할 때 그물이 그것을 뒤집어 씌워 날지 못하게 한다고. 너는 나에게 국적이니 국어니 종교니 말하지만, 나는 그 그물을 빠져 도망치려고 노력할 거야’

라고 말하며 세상이 얽어 메고 있는 두려움의 실체들을 하나씩 벗겨낸다. 나는 이곳 베트남에서, 지독한 외로움에 몸서리치던 때 이 글을 읽고 마음을 다잡은 적이 있다. 그리고 거짓말같이 what a small world, 아일랜드에서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베트남에 O’Briens 라는 아일랜드 식당을 발견했고 그곳에서 oh my god, 제임스 조이스 초상화 밑에서 하염없이 그를 바라본 기억이 새롭다. 그렇게 어두운 터널을 그와 함께 뚫어냈던 것이다.

장재용
E-mail: dauac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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