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번째 이야기…
소리에 빛을 입힘으로써 ‘음’에 ‘투명성’을 부여한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은 드뷔시로부터 시작된 이후 모리스 라벨에 의해 계승, 심화되었다. 더 나아가 라벨에 의해 펼쳐진 인상주의 음악은 드뷔시의 그것에 비해 좀 더 혁신적이었다고 봐야 한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예술 작업의 핵심은 인간의 예민한 감각과 감정이다.” 아주 짧지만 그의 심미관이 함축되어 있는 문장이다. 더 나아가 그는 “음악은 반드시 아름다워야 할까? 반드시 철학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이어야 할까? 나는 철학자로서 음을 생각하기보다는 음악 전문가로서 음을 다룰 뿐인데…” 라는 솔직한 고민을 토로한 적이 있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일생을 통해 투쟁하고 성취한 그의 작품들을 통해 고스란히 우리 곁에 남아있다.
학교에서 쫓겨난 아들
1875년, 프랑스 바스크 지방의 어촌 ‘시부르’에서 태어난 ‘모리스 라벨’은 아버지의 맹부삼천지교 덕에 14세의 나이에 파리음악원의 학생이 된다. 하지만 부친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십대 시절의 라벨은 학교에서 알아주는 ‘문제아’였다. 왜냐면 작곡과 교수의 수업내용을 깡그리 무시한 채 너무나도 변칙적인 작품들을 제출했기 때문이었다. 하긴 규칙대로만 하는 착실한 천재는 역사 속에 없었다.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화성(화음)에 대한 자기만의 독특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던 라벨은 괴상한 작곡 숙제를 여러 차례 제출하는 바람에 3년 내내 화성학 수업에서 ‘F’를 받게 되었고, 급기야는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제적처리가 된 것이다. 이 때, 열성적인 바짓바람의 소유자였던 라벨의 아버지가 소매를 걷어 부쳤다. 그는 파리음악원장을 위시한 작곡과 교수들을 일일이 찾아가 아들을 구제해 달라고 애원했다. 사실, 라벨이 독특한 자기만의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는 재능있는 친구라는 것을 음악원 교수들은 알고 있었다. 다만, 학교수업이 무시당하는 것 같아 불쾌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끈질긴 아버지의 애원과 평소 라벨의 잠재성을 눈여겨본 ‘앙드레 제달즈’ 교수의 협조로 파리음악원은 라벨의 재입학을 허락해 주었다. 제적생이 재입학한 경우는 당교에서 라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고 한다.
다시 학교에 들어오게 된 라벨은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더 이상 문젯거리를 만들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좋은 학점을 받기 위해 피아노곡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avane pour une infante defunte>를 썼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교수들은 “것 봐, 바로 이런 음악이지. 할 수 있잖아 !!” 라며 한껏 라벨을 칭찬했다. 이 작품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하다. 고전적인 화성과 단아한 구조로 이루어졌는데, 선율이 상당히 세련되고 감각적이면서도 고풍스럽다. 라벨이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즈케즈’의 그림 ‘왕녀 마가레타의 초상’을 보고 영감을 받아 작곡한 곡으로 알려져 있다. 차분하고 우아한 ‘파반느(16-17세기의 느린 궁정 춤곡)’인 이 작품은 피아노와 관현악 버젼이 있다. 1922년 라벨이 직접 연주한 ‘피아노롤’ 녹음을 들어볼 수 있다면 20세기 초반의 투박한 녹음환경과 맞물린 오묘한 노스탤지어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독창적인 ‘음향 감각’
음의 빛깔에 대해 예민하고 날카로운 감각을 가지고 있었던 라벨은 26세가 되던 해에 눈에 띄는 피아노 곡, <물의 유희 Jeux d’eau>를 발표한다. 물의 장난, 또는 물의 희롱이라고 번역되기도 하는 이 작품은 헝가리 음악가 ‘프란츠 리스트’의 피아노곡 <에스테 광장의 분수>에서 따온 제목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사실은 상징주의 시인 ‘앙리 드 레니에’의 시 <물의 도시>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된 것이다. 타이틀에서 알수 있듯 주제가 ‘물’이다. 분수대에서 뿜어져 나오는 물의 모양을 관찰해 88개의 피아노 건반에 형상화 한 작품이다. 분수대 위로 솟구쳐 오르는 물줄기, 사방으로 흩날리는 물보라, 희뿌옇게 펼쳐진 물안개, 공중에서 톡톡 터지는 미세하고 투명한 물방울들…등을 ‘소리화’시킨 셈이다. <물의 유희>는 라벨의 작품 중에서 인상주의 성향이 처음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곡으로서, 불협화음이 많이 출현해서인지 초연 때는 너무 난해하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프랑스 음악계는 음의 색채에 집중하는 인상주의에 빠져들고 있었던 터라, 라벨이 연출하는 신비로운 화성에 매료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유동적인 물의 움직임을 어쩜 이리도 다채롭고 유려한 톤으로 연주할 수 있을까? 1977년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명연
<물의 유희>를 추천하고 싶다.
‘아파슈’
도전적인 화성적 색채를 지닌 인상주의 음악으로 파리 클래식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라벨은 프랑스의 진보 예술가들이 만든 단체 ‘아파슈(Les apaches)’의 핵심멤버가 되어 활발하게 활동했다. 1900년에 결성된 이 그룹에는 스스로를 ‘예술적인 부랑자’라고 부른 프랑스의 젊은 예술인들이 속해 있었다. 시인, 화가, 수학자, 음악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던 그들은 정기적으로 모여 토론하고 시를 발표하고 음악회를 열었다. 라벨의 작곡 기법이 어느 한 가지 경향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예술사조가 복합된 경향을 보이는 것은
‘아파슈’가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905년 어느 날, 이 모임에서 셰익스피어의 정치극 <줄리어스 시저>를 읽게 된 라벨은 대사 중에서 “눈은 있는 그대로의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반영된 것, 다른 것에 의해 보이는 것이다.” 를 읽은 후 영감을 받아 피아노 모음곡 <거울>을 작곡, 발표했다. 모음곡 <거울>은 ‘거울’을 통해 반영되는 사물을 표현한 것인데, 보는 시각과 위치, 각도에 따라 사물의 모습이 즉흥적으로 굴절되어 보일 수 있다고 해석한 작품이다.
구성은 1곡: 나방/ 2곡: 슬픈 새들 /3곡: 대양의 조각배 /4곡: 어릿광대의 아침 노래 /5곡: 종의 골짜기.
특히, 다섯 곡 중에서 가장 많이 연주되는 ‘어릿광대의 아침노래’ 는 스페인 색채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곡으로 스페인 춤곡에 등장하는 민속악기 기타, 캐스터네츠 소리들을 모방한 작품이다. 1964년에 녹음된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의 연주를 들어보자. 대부분의 피아니스트들이 이 곡을 연주할 때 페달을 사용하는 반면, 리히터는 건조한 기타소리와 캐스터네츠의 달그락거림을 표현하기 위해서인지 페달 사용에 제한을 두고 있다. 정말 인상적인, 옳게 해석된 연주이다.
심화된 인상주의, ‘라 발스(La Valse)’
“휘감은 구름사이로 왈츠를 추는 여러 남녀들이 보인다. 구름이 차차 걷히고 사라지면 춤을 추던 사람들로 차 있던 커다란 홀이 눈 앞에 모습을 보인다. 샹들리에의 불빛이 포르티시모(ff)로 폭발한다. 1855년 경, 오스트리아의 궁전이다.”
1920년 작품인 <라 발스>의 악보 첫머리에 라벨이 쓴 표제문장이다.
불어로 ‘왈츠’를 의미하는 ‘라 발스’는 우리에게 익숙한 슈트라우스의 ‘빈 왈츠’와 성격적으로 판이하게 다르다. 빈 왈츠가 우아하고 경쾌한 반면, 라벨의 <라 발스>는 좀 기괴하다 못해 난폭한 느낌이다. 왈츠와 난폭함의 만남? 아이러니한 이 조합, 도대체 배경이 무엇일까?
1914년 7월에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프랑스가 전쟁에 가담하자, 라벨은 용감히 조종사에 자원했다. 하지만 심장이 건강치 못하다는 군의관의 소견 때문에 운전병으로 참전을 하게 되었다. 비록 육군으로 참전했지만, 전쟁의 참상은 라벨에게 심각한 트라우마를 안겨주고 말았다. 그는 전쟁이 끝난 한참 후에도 한동안 극심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려야만 했다. 마치 세기말이 온 것처럼 광폭했던 세계전쟁은 작곡가 라벨에게 지우기 힘든 상처가 되어 <라 발스>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던 것이다. 처음 감상하는 분들은 ‘이거 시작한건가? 뭔가 이상한데…?’ 하실 거다. 앞 뒤 흐름을 제대로 따라가기 힘든 혼란스러운 박자에 어지럽고 음산한 화성, 그리고 좀 들을만 하면 사라졌다가 불쑥 다시 출현하는 왈츠 리듬 등으로 인해 ‘절대 이 곡을 틀어놓고 춤을 출 수는 없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라 발스>는 너무나도 아름답지만 아주 난해하고 괴팍한 왈츠이다. 해서, 호기심에 듣기 시작했더라도 1~2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나는 이런 곡들은 몰라도 돼.” 라며 Off 버튼을 눌러버릴 분들 계실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그런 분들에게 조금만 여유를 갖고 기다려 보시라고 강권하고 싶다. 제발 참고 들어보자. 단 두세 번이라도 끝까지 감상해 보자. 시종일관 변화무쌍한 하모니와 리듬, 우아하고 관능적인 선율, 극적이고도 환상적인 음향으로 여러분이 지금까지 클래식 음악에서 쉽게 느껴보지 못했던 ‘폭발적 카타르시스’를 선사할 <라 발스>이다.
(라벨의 두번째 이야기는 다음 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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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지 희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음악교육과 졸업(교육학 학사) / 미국 맨하탄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석사) / 한세대학교 음악 대학원 졸업(연주학 박사) / 국립 강원대학교 실기전담 외래교수(2002~2015) / 2001년 뉴욕 카네기홀 데뷔 이후 이태리, 스페인, 중국, 미국, 캐나다, 불가리아, 캄보디아, 베트남을 중심으로 연주활동 중 / ‘대관령 국제 음악제’, 중국 ‘난닝 국제 관악 페스티발’, 이태리 ‘티볼리 국제 피아노 페스티발’, 스페인 ‘라스 팔마스 피아노 페스티발’ 《초청 피아니스트》 E-mail: pianistkim83@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