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스피노자
(Baruch de Spinoza (1632.11.24.~1677.2.21))
(참고한 책: ‘에티카’ – 기하학적 질서에 따라 증명된 윤리학 – B. 스피노자 지음,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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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가 파문을 불사하며 지켜내려 했던 건 자신의 신념이었다. 그는 당시 사회적 관념으로 뿌리 박힌 기독교적 신의 존재를 부정했다. 대신 범신론적 신의 존재를 기하학적 방법론을 차용해 논리적으로 증명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매개를 독점하는 교회 권력을 비판했던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은 누구에게나 현현할 수 있다는 공평하고 민주적 신으로 삶의 자리로 내려 앉게 했다. 당시 그러니까 여전히 절대 왕권이 횡행하던 군주제와 왕권신수설이 대중의 평균적인 인식으로 공고하게 자리 잡고 있던 17세기에 서슬 퍼랬던 권력 앞에서 죽음과 파문을 무릅쓰고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한 인간의 용기는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그의 저작 ‘에티카’에서 언급한 코나투스 Conatus 개념에서 우리는 죽음을 이겨내는 인간의 용기에 관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스피노자 ‘에티카’의 핵심은 ‘우리 모두는 우리가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의지가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존재하는 신이 도와줄 것이니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그것이 무엇이든 힘껏 구하라고 말한다. 스피노자의 신은 수동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수동이란 소심한 마음으로 삶의 안전만을 추구하려 드는 삶의 태도다. 소심함은 사회가 강요한 외적 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수동의 삶은 진정한 자신의 삶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다 수동의 삶에 빠져있다. 가기 싫은 직장엘 매일 나가야 하고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야 하며 원하지 않는 음식을 먹어야 할 때가 많다. 이럴 때 우리의 내적 성향은 고통을 받게 되고 코나투스는 감소하게 되어 슬픔이 삶을 지배한다. 스피노자는 이 지점에서 그 삶을 빠져 나오라고 소리치는데 이때 우리를 설득하며 말하는 개념이 바로 코나투스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일맥상통하는 코나투스는 삶에의 의지다. 삶의 의지는 우리가 기쁠 때 증가한다. 우리가 슬플 때 코나투스는 감소한다. 그러므로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들을 욕망하고 자신을 슬프게 하는 것들을 거부하는 해야 한다. 기쁨은 우리를 의지로 충만하게 하고 살고 싶게 하고 높아지게 한다. 슬픔은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낮아지게 하고 작아지게 만들고 불편하게 하는 것이다. Conatus, 우리 삶의 의지 안에는 원래 소심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외적 작용에 일희일비하여 우리 안에 서식하는 ‘신’의 씨앗을 말살하고야 말았으니 그때 우리는 소심함으로 뒤덮여 존재가 멈추게 됐다.
사람의 욕망은 정신의 본질이다. 사람의 정신은 그 사람 안에 있는 신의 코나투스다. 우리의 욕망을 내 안의 신이 노래하는 주술과 리듬에 맞추고 코나투스를 내뿜어 최대치로 끌어올릴 때 영혼은 자유로워진다. 자유로운 영혼은 흔들리지 않는다. 외적 작용의 허접한 꼬임에 넘어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누가 어떤 말을 하든, 어떤 위협을 하든, 어떤 책임감으로 들씌워 눌러 앉히든, 의무를 강요하든 흔들리지 않는다. 자유롭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에 고귀함을 부여한다. 그 누구도 자신을 권위로써 짓누를 수 없는 자유로운 정신 말이다. 한 사내가 세상에 권력과 맞짱 뜰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이것이다.
‘에티카’는 무서운 책이다. 코나투스로 대변되는 인간의 갖가지 감정들을 과학적으로 풀어 내려 애썼으므로 읽기가 어려운 책이지만 한번 읽고 나면 가슴이 따뜻해지며 저 밑에서 끓어오르는 먹먹함을 견디기 어려운 책이다.
그 먹먹함은 삶의 위험으로 인도할 수도 있다. 월급쟁이의 삶에 분노를 느껴 지금이 슬프다고 느끼면 과감하게 자신의 길로 따라 나서게 한다. 더 이상 시대의 억압과 사회적 구속에서 속박되기 싫게 만들어 떨치고 일어나게 만든다. 그것을 실행으로 옮기기에는 우리를 둘러싼 억압의 힘이 만만치가 않다. 스피노자는 이렇게 소심하고 우유 부단한 우리의 마음을 정확하게 간파하여 책의 말미에 우리의 부자유를 조롱하며 써 놓는다.
“무지한 자는 외적 원인에 따라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동요되어 결코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갖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자신과 신과 사물을 거의 의식하지 않고 살며, 작용 받는 것을 멈추자마자 존재하는 것도 멈추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자유로운 자는 현재로서 고찰되는 한에서 거의 영혼이 흔들리지 않고 자신과 신과 사물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의해서 인식하며 존재하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고 언제나 영혼의 참다운 만족을 소유한다. 이제 여기에 이르는 것으로서 내가 제시한 길은 매우 어렵게 보일지라도 발견될 수는 있다. 또한 이처럼 드물게 발견되는 것은 물론 험준한 일임이 분명하다. 만일 행복이 눈 앞에 있다면 그리고 큰 노력 없이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서 등한시되는 일이 도대체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모든 고귀한 것은 힘들 뿐만 아니라 드물다. 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su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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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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