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성군의 자질을 지녔던 조선 12대 군주 인종은 재위 8개월 후 의문의 죽음을 맞이 합니다. 그리고 20년 동안
문정왕후는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반대세력을 숙청합니다. 대표적인 을사사화는 조선건국 후 최대의 공작정치로 수백명의 희생자를 양산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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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의 승하와 새로운 정치개혁 요구
문정왕후가 죽고 2년 후 명종도 승하 합니다. 명종시대가 끝나고 이어서 등장하는 선조시대 부터는 정치 주류 세력의 변화가 뚜렷하게 일어납니다. 문정왕후의 폭정에 따른 반발과 부패로 얼룩진 정치를 바꾸려는 열망이 폭발하여 부패한 기득권 층 훈구파는 사라지고 사림파가 집권을 합니다. 현대 정치에서 자주 표현하는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 입니다. 축적된 변화의 욕구가 문정왕후의 폭정으로 분출된 것 같습니다.
위화도 회군 후 성리학은 급진 개혁파와 온건 개혁파로 갈라지고 조선이 건국되자 온건파는 몰락 후 중앙정계를 떠나 지방으로 낙향하여 후진들을 양성합니다. 이렇게 100년 동안 양성한 후진들이 성종시절 사림파를 형성하여 중앙정계에 다시 진출하게 됩니다. 승리한 급진개혁파는 (역성혁명파, 관학파 훈구파 등 여러가지 명칭으로 불리기도 함) 180년 동안 조선의 주류 세력을 형성 하였으나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하고 소멸됩니다. 그러면 이러한 정치세력의 변화는 왜 일어나고 백성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봅시다.
첫 정치개혁은 신진사대부 등장
우리나라의 첫번째 정치개혁은 14세기 중반 (1300년대 중반) 일어났습니다. 권문세족들의 횡포가 극심했던 고려시대 말기에 성리학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당시 공민왕은 개혁정책을 추진하고자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 사대부를 대거 등용하여 개혁의 축으로 삼고 부패한 권문세족을 견제하는 역할을 맡깁니다. 신진 사대부는 거의 이색을 종주로 삼는 “이색학당” 출신들이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의 요구가 일어난 이유는 당시 기득권 층 권문세족의 부패 때문입니다. 당시 전국 개인 토지의 90% 정도 권문세족이 소유하고 있었는데요, 대부분이 권력을 이용한 불법 약탈입니다. 전국의 농민이 농노로 전락하여 백성들은 수확량의 70~80%를 권문세족에게 강탈 당합니다. 백성들은 하루종일 일을 해도 배고픔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개혁의 여건이 조성될 때 한 사건이 터집니다. 백성들의 토지를 다 빼앗은 권문세족들은 끝 없는 탐욕을 부려서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장이 소유한 토지를 약탈 합니다. 이 사건은 신진사대부와 신흥 무장이 연합하여 권문세족과 목숨을 건 투쟁을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화도 회군으로 권문세족은 몰락하고 개혁세력은 과전법을 시행하여 백성들은 춤을 추며 기뻐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은 신진사대부 역성혁명파가 승리하고 권력을 잡았고 백성들은 수확량의 10% 전세만 (토지세) 납세하는 좋은 세상을 만납니다. 백성들의 입장에서는 누가 권력을 가져 가든지 관심이 없고 자신들 삶의 질이 개선되는 것이 좋은 정부입니다. 아마도 현재 국민들의 생각도 같을 듯 합니다. 이렇게 우리나라 최초의 개혁은 백성들 입장에서는 좋은 개혁이 되었습니다.
과전법의 시행과 공신의 나라로 변질
신분제도 역시 양민과 천민 두 계급으로 단순화 됩니다. 신라의 신분제도인 골품제는 8등급 이므로 차별의 종류가 너무 많았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불만이 팽배 해져서 멸망의 원인이 됩니다. 즉 신분제도는 단순화 될수록 문명사회로 인정됩니다. 당시의 양민은 우리가 알고있는 양반, 중인, 평민 세 계급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니 가히 혁명적인 사건입니다. 양민은 (양인) 조세 군역, 부역 등 3대 의무를 지는 대신에 국가는 양민에게 과거 응시권, 정치 참여권을 부여합니다. 권리와 의무를 같이 부여한 합리적인 신분제도입니다. 600년 전 신분제도인 것을 감안하면 대단한 사건 입니다.
과전법 시행으로 백성들은 경제적 혜택을 받았고, 신분제도의 개혁으로 백성들은 자신의 아들이 공부하여 과거에 응시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또한 과거에 합격하면 관직에 진출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질 수 있으니 미래의 희망을 가질 수 있는 백성들은 행복합니다. 현대 역시 국민들에게 경제적 안정과 미래의 꿈을 가질 수 있게 해주면 좋은 국가이겠죠. 정도전이 설계한 유교적 이상국가는 이렇게 백성을 위한 국가를 지향했습니다. 조선건국 후 80년 동안 백성들은 좋은 시대를 살았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사회가 변해갑니다. 수양대군의 왕권 찬탈 후 조선은 공신들의 나라로 변질되기 시작했고 연산군 중종 명종 시대를 거치면서 기득권을 지닌 양반들 세상이 됩니다.
백년 동안 수천명의 공신을 양산한 조선은 전 국토의 30%를 공신들에게 지급합니다. 공신전은 개인 사유지 입니다. 따라서 국가의 토지를 경작하던 백성들은 공신들의 사유지를 경작하면 세금 10% 대신 소작료 50%를 지주에게 납부해야 합니다. 공신들은 자꾸 늘어나서 농민들의 소작화는 가속됩니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들면 자식 교육도 소홀해집니다. 자연히 과거 시험에 응시하는 농부의 자녀는 계속 감소합니다. 그래도 뛰어난 수재의 아들이 태어난 집안은 악조건 속에서도 관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공신들과 관리들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백성들의 토지를 수탈 합니다. 또한 정경유착, 세금 포탈 등 관직을 무기로 부패가 생깁니다. 이러한 부패는 국가 재정을 악화시키고 이는 백성들의 부담으로 전가 됩니다. 정경유착과 관리들의 부패는 “대동법” 시간에 상세히 설명하겠습니다.
훈구파 VS 사림파
이렇듯 훈구파 공신의 부패 초기에 성종은 사림파를 등용하여 훈구파 공신들을 견제 합니다. 이때부터 시대의 흐름은 사림파로 넘어가기 시작합니다. 사림파는 고려말 신진사대부 온건파의 후예들입니다. 그들은 고려가 망하고 향촌으로 내려가서 교육을 장려하면서 지방 토호 세력을 누르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습니다. 조선 초 지방세력을 장악하지 못한 조정은 중앙에서 파견한 지방관과 토착 세력의 충돌이 잦았는데 이때 사림파는 지방관을 지원하여 향촌 세력으로 뿌리를 내립니다. 또한 향교와 서원을 통해 수 만명의 사림파 학자를 양성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100년 기다림 끝에 기회가 찾아옵니다. 부패한 훈구파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일어나고 유교 군주 성종의 요청으로 사림파는 중앙 정계로 진출합니다. 그들은 훈구파의 부패를 통열히 비판하고 왕권 강화에 일조합니다. 사림파는 인내심과 처세술이 뛰어난 세력들입니다.
훈구파 공신들의 부패 정치에 대항하는 사림파는 유교적 도덕성과 성리학적 이념으로 무장하고 훈구파와 정치 투쟁을 합니다. 사림파는 백성들의 고충보다 이념과 도덕성을 강조한 군자 정치를 주장합니다. 이는 조선 초 급진개혁파 하고는 상당히 다릅니다. 조선을 설계한 정도전이나 조준 등은 사림파 보다 성리학적 이념이 훨씬 약합니다. 즉 조선의 성리학은 사림파에 의해 완성 됩니다. 따라서 조선 초 유교는 성리학이 아닌 실용적인 유교입니다. 이념보다 현실 정치의 목표를 설정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 시키는 정책을 폅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훈구파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수구 세력으로 변하면서 소멸되었죠. 즉 시대의 흐름과 변화의 물결을 거스르는 정치로 자멸합니다. 조선건국 세력이 초심을 유지 했으면 500년 동안 조선은 많은 발전을 했을 것 입니다. 부패는 증거도 남고 정적들이 공격하기 좋은 약점을 지니고 있어서 훈구파는 소멸되고 사림파가 주류 세력이 됩니다. 성종시절 김종직은 성리학자 이며, 중종 때 조광조는 도학정치 즉 군자가 정치하는 이상국가 건설이 목표 입니다. 조광조는 백성의 삶을 개선하는 정책은 없고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신분제도는 하늘이 정한 이치라는 생각을 합니다.
성종과 중종은 100년 동안 성리학 이론을 연구한 사림파 학자들의 논리적인 주장에 매료됩니다. 그러나 백성을 위한 현실 정치에 대해서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사림파는 야당이니까
여당인 훈구파의 부패와 실정을 공격하는 것으로 임금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습니다. 이렇게 도덕적인 사림파가 집권하면 백성들의 삶이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는데 훈구파에서 사림파로 권력이동 후에도 백성들의 삶은 변화가 없습니다. 사림파 역시 기득권 층으로 변하고 우리가 알고있는 4색당파로 사림파는 쪼개 집니다. 독자들이 알고있는 4색당파는 사림파가 서로 이해관계에 의해 흩어지고 뭉쳐서 만들어진 붕당정치입니다.
다음 이야기
양반들의 권력투쟁과 탐관오리들의 수탈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은 점점 힘든 삶을 살아 갑니다. 다음 시간에는 조선 초 백성들의 삶을 좀 더 살펴보고 선조 치세를 설명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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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종 길
영남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前 (주)대은영상 대표,
現 아마추어 사학가 활동,(주)하나로 축산 대표
Kakao talk ID : jeonjongkil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