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이야기
세조 때 비롯된 지나친 공신권력은 견제 세력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새로 등장한 사림파는 훈구파를 견제하다 결국은 정치생명을 건 당파 싸움으로 번집니다. 중종 치세에는 강력한 권력을 지닌 권신들이 등장하는데, 이는 중종의 간접 정치의 영향 탓도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권력의 화신 문정왕후의 등장은 새로운 피바람을 예고 합니다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인종
조선 제12대 국왕 인종은 보기드문 성군의 자질을 타고난 국왕입니다. 조선 제5대 국왕 문종의 아바타 같은 임금이죠. 8개월 짧은 재위로 승하했으나 그는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고 떠납니다. 인종은 조광조를 신원 하자고 청하는 사림파 요구에 “부왕께서 유독 조광조를 신원하지 않은 이유가 있을 것이니 시간을 두고 생각하자” 라고 답했다가 이듬해 자신의 병세가 위독 했을때 조광조의 신원과 이복동생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는 전교를 동시에 내립니다. 또한 연이은 국상으로 백성들의 피해를 걱정하여 간소한 장례를 유언합니다. 이처럼 인종은 백성, 부왕 중종, 계모 문정왕후를 동시에 배려하는 성품과 정치 문제를 원만하게 처리하는 임금 입니다. 문정왕후는 인종의 착한 성격을 악용하여 자기 아들 경원대군을 임금으로 만듭니다. 인종 승하에 관한 야사 기록을 살펴봅시다. “인종 승하 직전에 문정왕후가 떡과 꿀을 가지고 인종을 방문했는데 평소 차갑게 대하던 계모의 방문이 고마워 문정왕후가 가지고 온 떡을 다 먹고 설사와 고열에 시달리다 3일 후 급서 했다” 라고 연려실 기술 및 여러 야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조선 13대 국왕 명종이 즉위하고 문정왕후는 조선의 두번째 수렴청정을 합니다.
명종의 즉위와 을사사화
문정왕후는 인종 승하 한달 후 동생 윤원형에게 밀지를 내려 윤임 등 대윤파 처벌을 명령 합니다. 무식한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밀지를 가지고 대사헌 민제인, 대사간 김광준을 찾아가서 밀지를 보여주며 협조 요청을 합니다. 사헌부 사간원 양사는 큰 피바람을 막기위해 문정왕후의 요구를 일부 들어주고 윤임과 대윤 일파를 가겹게 처벌하는 중재안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강직한 양사 대간들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합니다. 인종이 세자 시절에 세자 보호를 구실로 세자와 경원대군을 이간질 했다는 죄를 씌우자니 문정왕후와 소윤파는 경원대군을 옹위한 역모죄를 물어야 합니다.
그러나 권력은 문정왕원에게 있으니 대간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죄명도 없이 윤임 일파를 그냥 유배 보냅니다. 이 사건이 을사사화의 시작인데 윤임 일파는 유배 한달 후 사역을 받고 죽습니다. 세명이 죽고 그치면 사화라고 할 수 없겠죠. 윤원형은 계림군을 역모죄로 억지로 엮어서 사건을 확대합니다. 계림군은 성종의 후궁 숙의 하씨의 아들 계성군의 양자입니다. 계림군은 학문을 좋아하고 인품이 좋아서 선비들에게 추앙받는 인물입니다. 이러한 계림군을 윤원형은 평소 시기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계림군을 처벌할때 강직한 선비들을 일망타진 할 계획으로 사건을 확대 했습니다. 드디어 본격적인 을사사화가 진행됩니다. 계림군 주위의 선비 수십명을 잡아서 고문해도 강직한 선비들은 문정왕후가 원하는 자백을 하지 않습니다. 윤원형은 선비들의 노비들을 잡아서 고문하고 마음이 여린 윤임의 사위 이덕응을 고문하고 회유하여 두사람에게서 거짓 자백을 받아 계림군과 강직한 선비 수십명을 처형했습니다. 그러나 수사에 협조하면 보답 하겠다고 약속한 이덕응도 함께 사형 시킵니다. 문정왕후는 비밀을 알고있는 이덕응을 알려주면 후환이 두려웠던 것인데 이러한 사실까지도 역사에 기록되어 있으니 진실을 가리기는 힘드나 봅니다.
암닭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양재역 벽서사건
사림의 추앙을 받는 계림군과 강직한 사림 수십명을 역모죄로 처형시킨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조정에 남은 강직한 대간들을 제거 하려고 다음 계획을 세웁니다. 을사사화 발생 2년 후 1547년 9월 18일 문정왕후의 측근 부제학 정언각은 괴서 한장을 가지고 입궐해서 문정왕후에게 전달 하면서 보고 합니다. “신의 딸이 전라도로 시집갈 때 신이 양재역까지 배웅을 했는데 벽에 괴서가 붙어 있어서 가지고 왔습니다” 또한 동행한 이노가 거들며 소인도 벽에 붙은 괴서를 보았습니다. 라고 진술하니 문정왕후는 “두사람의 증언이 일치하니 신빙성이 매우 높다 의금부에서 철저히 조사하라” 라고 말합니다. 이른바 양재역 벽서사건의 시작입니다. 사람의 출입이 많은 양재역에 붙은 괴서를 문정왕후의 측근 두 사람만 본 것도 이해되지 않지만 그 후 의금부에서 아무리 조사를 해도 벽서를 본 사람이 없습니다. 괴서의 내용은 “암닭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 즉 여왕 문정왕후와 간신 윤원형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살생부에 등록된 사람들을 체포합니다. 2년 전 사헌부 사간원 양사의 강직한 대간들 그리고 문정왕후를 비판하는 사대부 수십명이 연류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죽습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폭군 연산군 시절에 무오사화 갑자사화 두번의 사화가 있었는데 그때 두번의 사화로 죽은 사람들 보다 문정왕후는 더 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사림파가 주류가 되어버린 조선
문정왕후에 대해 좀 자세히 살펴볼까요? 인종이 20살 세자시절에 낳은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려는 말도 않되는 목표를 달성하였고 인조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자 (야사 기록은 독살설) 인종 서거 두달 후 10년 정적 대윤 일파를 단숨에 제거 합니다. 또한 자신을 비판하던 강직한 사림파 선비들 수십명을 몰살 시키기 위해서 덕망 높은 종친 계림군을 역모죄로 몰아서 선비들과 함께 죽이는 극단적인 방법을 무 표정하게 집행합니다. 마지막 양재역 벽서사건을 조작하여 마지막 남은 3사 대간들과 동조하는 선비들을 몰살 시키니 연산군이 죽인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수백명의 사람을 문정왕후가 죽입니다. 정치보다 음모론이 탁월하여 과거 조선 왕실의 역사를 전부 외워서 사례를 비교 하면서 대신들을 억누르고 자신의 뜻대로 합니다. 당시의 대신들은 문정왕후의 눈 밖에 나면 죽어야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문정왕후를 잔인한 악녀라고 부르는 이유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윤원형 등 소윤파들은 위사공신에 책봉되어 조선의 공신들은 계속 증가하여 공신의 나라로 전락합니다. 그래도 사림파들 중 기개있는 학자들이 많았는데 그들은 소멸하고 부패와 기득권으로 표현되는 공신들이 지배하는 조선이 되어 역사는 후퇴합니다. 이렇게 다시 한번 훈구파의 반격으로 강직한 사림파 학자 수백명이 희생 됩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역사의 흐름은 도도히 흘러 훈구파는 소멸의 길로 가고 곧 사림파가 조선의 주류를 형성하게 됩니다.
다음 이야기
4대 사화가 발생한 16세기 (1500년대) 백성들은 배고픔과 차별을 견디며 열심히 살고 있을때 사대부는 권력 투쟁에 몰두하고 사림파는 성리학적 통치이념과 신분제도 확립을 연구합니다. 수천명의 희생을 극복한 사림파는 결국 권력을 장악 하지만 자신들을 위한 정치일 뿐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16세기 변화하는 조선사회를 살펴 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