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은 정부는 일정한 작명 원칙과 기준에 따라 각 도시의 거의 모든 거리 이름이 베트남의 영웅들이나 애국선열들의 이름으로 되어 있으며 따라서 각 도시마다 서로 같은 거리 이름들이 많이 있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와 역사적인 사실들을 요약 조명하여 1군을 시작으로 다루어본다. 우리나라는 숭배하지 못하여 부럽기까지 하는 베트남의 영웅들을 기억하고 기록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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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나라의 강토는 그 나라의 영웅이 몸을 바쳐서 장엄하게 해 놓은 것이며,
한 나라의 민족은 그 나라의 영웅이 피를 흘려서 보호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정신은 산같이 우뚝 높고, 그 은택은 바다같이 넓은 것이다.
그런데도 그 나라의 영웅을 그 나라 민족이 알지 못하면,
그 나라가 어찌 그 민족의 나라일 수가 있겠는가?
그런 우리나라는 영웅을 숭배하는 심성이 어찌 이리도 박한지!
-을지문덕 전 / 단재 신채호
HEROES AGAINST Mongolians,
Nguyên Dynasty from North | 몽골 침략을 막아낸 베트남 영웅
- 하이바쯩 Hai bà trưng
뛰어난 전략가이자,
타고난 전사였다.
쯩 자매(徵姉妹)는 1세기 후한의 지배 하에 있던 베트남(당시에는 남비엣)의 여왕으로 남비엣의 반란을 주도한 쯩짝(14년~43년)과 쯩니(14년~43년) 자매를 일컫는다. 베트남의 ‘잔 다르크’라고도 불린다. 베트남이 중국의 한(漢)나라에 점령당한 것은 기원 전 (BC) 111년의 일이었다. 그 후 100여 년 동안 중국은 간접통치 방식으로 베트남을 지배했는데, 기원 후부터는 직접통치 방식으로 변화했다. 한나라는 복장에서 예식에 이르기까지 주민들의 풍습과 습관을 강제로 바꾸려 했을 뿐만 아니라, 가혹한 세금을 부과하고 건강한 젊은이들을 노예로 끌고 가기도 했다. 압제가 계속될수록 베트남 민중들의 가슴 속에는 서서히 독립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당시 하노이 서북쪽의 작은 마을 ‘메린’의 토호인 ‘락장’에게는 ‘쯩짝’ (徵側 Trung Trac)과 ‘쯩니’ (徵貳 Trung Nhi)라는 총명한 자매가 있었다. 언니 쯩짝은 뛰어난 전략가였고, 동생 쯩니는 두려움을 모르는 타고난 전사였다.
서기 40년, 한나라 군대에 맞서 베트남 민중들은 봉기하게 된다. 무기도 전술도 중국 군에 뒤떨어졌지만, 결연한 의지 하나로 베트남 군은 중국 군대에 맞섰다. 한나라 군은 이를 진압하고자 쯩 자매가 이끄는 봉기군과 수 차례 교전을 벌이지만, 세를 업고 달려드는 봉기군이었던지라 한나라 군은 족족 격파당하고 베트남에서 쫓겨나고 만다. 게다가 머지않아 쯩 자매의 베트남 군은 당시 베트남에 설치된 한나라의 군(郡)인 교지(交趾)를 점령하고 한나라 세력을 완전히 축출해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기세를 타고 언니 쯩짝은 왕위에 올라 한의 지배에서 벗어난 독립된 왕국을 선포한다.
- 티삿 Thi Sách
티삿은 야오찌군(Giao Chỉ)출신으로 베트남 최초의 독립운동을 이끈 여성전사 쯩짝(Trưng Trắc-하이바쯩 자매중 언니)의 남편으로 한나라에 대항하는 봉기의 기폭제 역할을 한 민족의 영웅이다. AD 30년경 중국의 압제에 시달리는 동족의 비참한 삶을 목격한 후 도탄에 빠진 민족을 구하기 위해 영웅호걸을 찾아 전국을 주요하던 중 20세에 쯩짝과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다.
- 쩐꽝 카이 Trần Quang Khải (1241 ~ 1294)
쩐 왕조의 초대 황제인 쩐타이똥(1226 ~1258)의 3째 아들이다. 쩐흥다오와 더블어 용맹했던 왕자로 쿠빌라이 칸의 몽골 제국(원나라)의 베트남 원정을 막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 리트응끼엣 Ly Thuong Kiet (1019 ~ 1105)
최초로 중국본토 공략!
크메르 왕조와 중국 송황조의 침략을 차례대로 물리쳐 베트남의 국민적 영웅이 된 인물이다. 그의 본명은 응오뚜언(Ngo Tuan)으로 하노이 출신이며 나라에 큰 공을 세운 후, Ly황제의 성을 사하 받아 Ly Thuong Kiet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는 베트남 남진 역사상 가장 공이 큰 인물로 뛰어난 전략가이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군사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법을 아는 훌륭한 정치인이기도 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베트남 최초로 중국본토를 과감하게 공격함으로써 송나라 왕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이 승리로 인해 국가권력의 안정화가 200년이 도래되는 평화기를 만들었다.
- 쩐흥다오 Trần Hưng Đạo (1288 ~ 1300)
베트남 제 1의 영웅!
라뜨응끼엣 사후 200년 만에 또 다시 베트남에 인물이 태어났다. 그가 바로 쩐흥다오이다. 그는 남딘(Nam Dinh)성 출신으로 본명은 쩐꾸억뚜언(Tran Quoc Tuan) 으로 쩐(Tran)왕조(1225~1400)시대의 제일의 공신이자 장군이다. 그는 쩐 태종의 손자로서 원나라가 남방으로 팽창정책을 펼치면서 3차례에 걸쳐 베트남을 침략했을 당시 백성의 단결력에 호소해 원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것으로 유명하다.
베트남 사가들은 쩐흥다오 장군이야말로 베트남 제1의 민족 영웅으로, 베트남을 징기스칸이 세운 몽골족의 원나라에 대항해 굴복하지 않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립을 지킨 유일한 나라로 만든 인물이다. 특히, 베트남 해군은 오늘날에도 밧당(Bach Dang)강 전투를 기려 찐흥다오 장군을 ‘베트남 해군의 아버지’로 기리고 있다.
- 팜응우라오 Phạm Ngũ Lão (1255 ~ 1320)
팜응우라오 장군은 1255년출생이다. 베트남 찐 왕조시절, 1320년 65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제2차 몽고전(1285년)과 제3차 몽고전(1288년)에서 위기에 처한 쩐흥다오 장군의 지원군으로 나서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당시 재덕을 겸비하고 용감무쌍한 면모를 높이 산 쩐흥다오 장군은 그를 친아들처럼 아끼며 자신의 양녀를 그에게 흔쾌히 내어주기도 한다. 또한 왕에게 그의 즉위에 추천하기도 했는데 훗날 왕 또한 팜응우라오 장군이 사망 후 5일 내내 슬퍼하는 등 애통한 마음을 표하기도 할 만큼 백전불패, 임전무퇴의 명장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는 사람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다.
- 레탄톤 Lê Thánh Tôn (1442 ~ 1497)
레탄톤은 타이똥(Thai Ton) 왕의 세 번째이자 막내아들로 1442년 7월 20일 출생했으며 본명은 뜨탄(Tu Thanh) 다른 이름은 하오(Hao)이다. 무예와 학문에 능했던 그는 56년을 사는 동안 여러 사람을 통해 슬하에 많은 자식을 두었다. 그의 많은 업적 중에 영토에 대한 애착심이 각별해 베트남의 지도를 만들기도 하였다.
서로를 존중하며 올바른 사회 유지를 위한 24조를 새로 창안해 아이들이 점차 덕성을 갖추게 되고 마을 사람들은 관혼상제 시, 서로 돕는 등 ‘기반이 단단해야 나라가 부흥할 수 있다’ 는 그의 신념에 따른 행보는 유교적인 전통을 확고히 다졌다. 또한 주변국가(참파 왕국과 란쌍왕국, 오늘날의 라오스)를 정벌하며 영토를 확장하여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 지방까지 진출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문묘(공자사당)를 전국적으로 건설하였으며, 과거제도를 실시해 관리를 등용하기도 했다.
HEROES AGAINST
Ming, Thanh Dynasty | 중국(명,청)의 침략을 막아낸 베트남 영웅
- 레러이 황제 Lê Lợi king (1428~1433)
중국 명나라의 지배를 물리친 대범한 왕 레러이. 시호는 고황제, 레이이또 라고도 지칭한다. 천년 이상 중국으로부터 지배를 받은 베트남은 이후에도 계속 침입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명나라 제 3대 황제 영락제에 의해 베트남이 재정복되자 베트남인들 사이에서 저항 운동이 일어나지만 내분으로 인해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한때 명나라 군대와 타협하면서 적절한 때를 도모하던 그는 지형을 이용한 게릴라 활동으로 1424년부터 게안, 탄호아를 해방시킨 다음 북상하여 명군을 격파, 명군의 본토 철수를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베트남의 독립을 회복시키는 쾌거를 이룬다. 결국 1427년 하노이에서 즉위하면서 국호를 대월이라 정하면서 레왕조를 이룩한다. 농민들의 생활 안정 목적을 통해 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토지대장과 호적을 재정비 베트남 최초의 군전제를 실시하는 대범함을 보이기도 한다. 한편 이전의 역대왕조의 불교 숭상 문화와 달리 유학을 국가의 지배이념으로 삼았고 이 정책은 후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 윙 후에 Nguyễn Huệ King (1735 ~ 1792)
청의 30만 대군을
하루만에 무찌르다!
윙 후에는 유명한 꽝쭝황제(Quang Trung Hoang De)의 이름이다. 그는 근대 베트남사에서 외적을 물리친 민족의 영웅이자, 신출귀몰한 용병술로 적을 섬멸한 백전백승의 용장이다.
7남매의 막내였던 그는 1771년 형들과 남부 일대를 지배하던 윙씨의 횡포에 맞서 봉기하고 권문세가의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일약 민중의 영웅이 되었다. 또한 1782년에는 윙가와 연합세력이 태국군 20만을 섬멸하고 또 다시 북부 찐씨의 세력을 몰아내 북부 일대를 장악하기도 한다. 1788년 탕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100여 마리 코끼리 부대를 앞세워 청군을 공격하여 30만을 하루 만에 섬멸한 위대한 장군이다.
- 윙짜이 Nguyễn Trãi (1380 ~ 1442)
베트남이 중국 명나라의 지배를 받던 시절 레러이(레타이또)를 도와 독립을 이끈 군사전략가이다. 유학자이자 정치가이긴 레 왕조의 조정에서 재상의 관직까지 올랐다. 레러이(레타이또)가 승하한 다음에는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머물며 시를 쓰며 여생을 보냈다.
- 레라이 Lê Lai (1355 ~ 1418)
목숨도 불사한 호위장군
한몸 바쳐 황제를 지켜낸 용맹무쌍 무사 레라이(Le Lai)는 탄호아성 지역 므응족 출신으로 레러이 황제를 보필한 용맹한 전사다. 부하사령관 레라이는 호위 장군으로 일생 황제의 안위를 지켰다. 1421년경만 해도 레러이 부대가 명나라 군과 맞설 정도로 강하지 않았을 무렵이다. 이는 탄호아 북쪽 찌린산 꼭대기에서 일어난 일로 명군에 포위되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때 레라이가 명군을 가로 막고 목숨을 바쳐 왕의 부대를 탈출시켰는데 당시 그는 레러이 왕의 복장을 하고 명군의 눈을 속인 뒤 죽음을 각오하고 소수 자살특공대와 함께 결사항전 한다. 그의 결단이 아니었더라면 황제는 물론, 휘하 군사 모두 전멸했을 것이다. 후일 민중들은 이 두 영웅의 업적을 기리기위해 매년 8월 21일과 22일 제사를 올린다.
HEROES
Communist Patriot | 베트남 공산당 애국열사
- 똔득탕 Tôn Đức Thắng (1888~1980)
1888년 8월 19일 안장 성 앙호아에서 태어났다. 1912년 프랑스로 건너가 그곳에서 징집되어 프랑스군 병사 근무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본 그는 베트남 민중이 단결하여 프랑스 식민지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1919년 그는 프랑스 내 노동조합 단체에서 노동운동에 참여했으며, 1920년 베트남으로 돌아온 그는 베트남 내에서도 노동운동을 이어갔다. 1926년 그는 호찌민 계열의 독립운동 정당인 신월혁명당(또는 베트남 청년 혁명당)에서 활동하다가 1929년 프랑스 경찰에 의해 구속당하여 강제노동 30년형을 선고 받고 1945년까지 감옥살이를 하였다. 1945년 혁명 당시 감옥을 탈출한 그는, 1946년 하노이 정부의 중앙위원회 위원이되었고 1949년 북베트남 국회 상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1960년에는 베트남의 국가 부주석을 맡아 일을 수행했다.
- 응우엔티민카이 Nguyễn Thị Minh Khai (1910 ~ 1941)
베트남의 대표적인 여성 혁명가이다. 1927년에는 베트남 공산당의 모태가 되었던 신월혁명단의 공동 창당 대표로 참여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대표위원을 지냈다. 호찌민과 같은 응에안 출신으로 홍콩에 있던 코민테른 아시아지부에서 호찌민과 함께 일하기도 했다. 1936년부터 사이공으로 건너와 공산당원들을 이끌었으나 1940년 프랑스 식민정부에 체포되어 1941년 사형에 처해졌다.
- 리뜨쫑 Lý Tự Trọng(1913 ~ 1931)
1923년 10세의 어린 나이에 중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공부하며 혁명동지들과 교류한다. 1926년 귀국 후에는 청년공산당 연맹을 만들어 베트남공산당과 긴밀히 연락을 주고 받았으며 1931년 사이공 Yen Bai 봉기에 참가하던 중 당시 Laren Sai Gon 광장에서 연설하던 팡보이(Phan Boi)를 보호하기 위해 Le Grand를 사살한 혐의로 1931년 11월 17세의 어린 나이에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는다. 그가 현장에서 “비록 나는 미성년자이나 내 앞에는 혁명의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고 전한 말이 동포들의 마음을 뜨겁게 만든 베트남의 혁명 열사이다.
- 보티사우 Võ Thị Sáu (1935 ~ 1952)
19세기 프랑스 식민 지배에 항거한 소녀 보티사우는 베트남 무장세력의 영웅이다. 붕따우성 덧더현 출신으로 1949년 14살때부터 덧더(DAT DO) 공안팀에 가입해 식량공급과 연락 임무를 맡았다.
1951년 시장에서 폭탄을 던져 관료 1명을 폭사 시키고 20명의 군인들을 부상시킨 혐의로 프랑스 식민당국에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는다. 1952년 꼰다오 섬에서 19살의 어린 나이에 사형당한다. 사형 당하는 순간 마지막 하고 싶은 말을 물었을 때 ‘눈 가리개를 풀어달라, 조국을 보고 죽고 싶다’ 라고 했다는 그녀는 베트남 최연소 여성 애국열사이다.
- 레주언 Lê Duẩn (1907 ~ 1986)
베트남 공산당의 대표적인 인물로 호찌민과 함께 베트남 전쟁을 이끌었다.
베트남 공산당의 전신인 신원혁명당의 당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의 창당 멤버로 참여 했다. 베트남 전쟁 중에는 베트남 노동당을 이끌며 호찌민 다음 서열 2번째 자리에 올랐다. 1975년 사회주의로 베트남이 통일된 이후 첫 번째 베트남 공산당 서기장으로 취임했다.
- 보반끼엣 Võ Văn Kiệt (1922 -2008)
1991년부터 1997년까지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 수상을 지낸 보반끼엣은 본명은 Phan Van Hoa이고 예명은 Sau Dau(싸우연), Chin Dung(찐융) 이었다. 그의 업적 중 하나는 1986년부터 ‘도이 머이(Doi Moi)’라는 사업 및 정책개혁을 주도적으로 추진한 것이다. 도이 머이는 베트남어로 ‘새롭게하다’, ‘쇄신’을 의미하며 베트남의 경제 우선 개방, 개혁정책을 일컷는 말이다. 이 정책의 일환으로 그가 베트남 북쪽에서 500KV 고압선 전력망을 개발한 덕분에 호찌민시 및 주변지역까지 전기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베트남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 윙반쪼이 Nguyễn Văn Trỗi (1940~1964)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를 겨냥한 폭탄 의거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후 남베트남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사망직전 “내 말을 기억하시오. 미국제국주의 타도! 응웬칸 정권 타도! 호찌민 만세! 베트남 만세!” 라며 남긴 발언이 1964년 10월 15일 미아미신문에 그의 말을 보도해,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베트남 사회공화국은 남베트남해방군이자 베트남 전쟁영웅으로 그를 추대했다.
- 팜반동 Phạm Văn Đồng (1906 – 2000)
팜반동은 1906년 꽝응아이 성 마을에서 태어났다. 1925년 18세의 나이 때,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판쭈찐 (Phan Chu Trinh)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학생 농성 운동에 학생 중 하나로 참여하였다. 1945년 8월 혁명으로 호찌민이 권좌에 오르면서 팜반동은 베트남 민주 공화국 정부의 재정부 부장에 임명되며 1955년에는 제1기 제5회 베트남 국회에서 호찌민이 겸하고 있던 수상직을 계승하였다. 미국과의 전투에서 베트남의 재정 지원하는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는 또 린든 존슨, 리처드 닉슨 행정부 시기, 전쟁을 종결 짓기 위한 평화 회담에 관련된 사람 중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팜반동은 완고한 공산주의 민족주의 지도자 호찌민의 가장 충실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독립과 통일을 위해 싸운 베트남의 전쟁의 주요 인물이었다. 특히 팜반동은 1975년 베트남 통일 이후, 당내 다양한 투쟁에서 중립적 입장을 유지하려고 하는 정치인으로 알려졌다.
- 막티브이 Mạc Thị Bưởi (1927 ~ 1951)
막티브이는 1927년 하이증성 출신으로 1955년 8월 30일 베트남민주공화국 정부로부터 베트남인민 무장병력 영웅 칭호를 받은 여성 혁명가이자 애국 여전사이다. 무장 유격대를 조직하여 군의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온갖 수고로움을 감내한다. 한 대사가들의 평가에 의하면 8월 혁명시 구국 여성회를 만들어 프랑스군에 항거하고, 직접 지원해 땅굴을 파는 등 강제노동, 정찰병 활동을 마다하지 않는다. 1949년 극심한 프랑스군의 탄압으로 당간부들은 이 지역을 탈출하지만 그녀는 혹독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곳을 떠나지 않고 3개의 여성 유격대와 35개의 활동지부를 설립하고 프랑스의 납세거부 운동을 벌였다. 1951년 군에 비상 식량과 무기를 준비해 장기교전에 대비하려다 프랑스군에 잡혀 혹독한 고문속에서 꽃다운 24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베트남 정부는 호찌민시 1군에 그녀 이름을 딴 길을 만들어 추모의 뜻을 기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