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November 23,Saturday

‘극단의 시대’ – 에릭 홉스봄

역사의 웅덩이
인간의 역사에 관해 말해 온 사람들은 많다. 인간이 기록을 하게 된 후 모든 인간의 이야기들은 역사라 말할 수 있으니 인류 전체와 개별 인간의 삶이 곧 역사라 말해도 무방하다. 그 중 사람들은 역사를 말할 때 특정 사건에 초점을 맞추거나 (사건史) 또는 시대 전환적 상황에 집중해서 말하거나 (국면史) 더러는 사회와 그 사회의 인물 (인물史)을 연구하며 역사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역사라고 일컫는 인간의 기록은 기록하는 인간의 개입이 불가피하므로 기록하는 행위의 독립성, 사실의 객관성 여부가 역사의 첨예한 이슈가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누구에 의해 쓰여졌는지, 기록하는 사람은 그 사실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실제로 그는 그 시대를 살았는지, 자신의 주관적 개입에 얼마나 자유로운 인간이었는지가 역사성(또는 진실성)을 대변하게 되는 것이다.

에릭 홉스봄은 20세기를 온전히 살았고 21세기에 죽었다. 그는 우리 시대 저명한 역사학자였지만 나는 그가 저술한 역사 관련 저작의 객관성에 관해 논하기를 멈추기로 한다. 누군가 그에 대해 주관적이라 주장한다면 ‘그는 객관적이다’는 근거를 명석 판명하게 들이댈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지만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 공부하는 사람의 저작에 대해 창의력은 중요하지 않다. 창의력이 뛰어난 사람은 인문학 공부를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창의력 뛰어난 사람은 돈 되는 일을 한다. 인문학은 보 잘 것 없더라도 온전히 자기 것을 갖고자 하는 이들이 몸으로 때워가며 공부하는 거다. 그러니 창조적인 메시지는 불필요하다. 진짜로 무서운 메시지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서술했는데 그 서술을 읽고 난 독자가 폭풍을 맞은 것처럼 떨게 되는 그런 것이다.’ 극단의 시대는 그런 책이다. 읽기 전과 읽고 난 뒤의 독자는 이미 다른 사람이 되어 있는 그런 책이다.

그는 이집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영국인이고 그의 어머니는 오스트리아 사람이다. 오스트리아, 독일, 영국에서 살았다. 그가 서구 유럽대륙을 이러 저리 돌아다니며 거처를 옮겨 다닐 때는 2차 세계 대전 전후의 전쟁 시대였다. 그는 난삽한 상황들을 직접 목도했을 테다. 객관을 추구하는 역사학자에게 정서의 변화는 그리 달가운 손님이 아닐 테지만 그는 전쟁의 참상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을 테고 인간의 슬픔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의 저작에는 그런 감정선이 부끄럽지 않게 들어가 있다. 그의 견해를 넣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는 진보 역사학적 관점에서 ‘극단의 시대’를 썼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의 저작 중 가장 눈에 띄는 책 또한 극단의 시대다. 자신이 살던 시대를 서술하기 때문에 애정과 불화와 저항의 농도가 다른 어떤 저작보다 짙다.

그는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에 이르는 3부작으로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를 썼다. 1962년에 출판된 <혁명의 시대>는 1789년부터 1848년까지 19세기의 첫 번째 국면인 산업 자본주의의 등장을 다루고 있다. 유럽에서 시작되어 세계적인 규모로 형성된 지금의 세계는 이중 혁명, 즉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가능했다는 것이 책의 근본적인 주제이다. 1975년에 출판된 <자본의 시대>는 1848년부터 1875녀까지 19세기의 두 번째 국면, 불안정했던 유럽 사회가 발전했던 과정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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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 출판된 <제국의 시대>는 1875년부터 1914년까지 19세기의 최종 국면,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파국에 처하게 된 세계를 다루고 있다. 1994년에 소개한 <극단의 시대 : 단기 20세기사(1914~1991)>를 출판했다. ‘극단의 시대’는 20세기 세계사를 총망라하고 있다. 정치사가 중심이 되었던 기존의 저작들과 달리 경제‧사회‧문화를 골고루 다루고 있다. 그의 말년에 출판된 <세상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를 제외하면 ‘극단의 시대’는 그가 역사학자로서 내놓은 마지막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홉스봄은 2012년 10월 1일 폐렴으로 인해 95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그가 만약 지금 이 시대를 살았다면 지구 전체를 공포로 몰아 넣는 전염병 사태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궁금해진다. 그의 저작을 살펴본 바 그에게 몰입해서 어느 정도 그의 성대모사가 가능해졌다고 보면 그는 묵직한 음성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인간과 자연이라는 말을 겁 없이 쓰며 자연과 인간을 등가적 관계로 인식했던 인간의 오만이다. 21세기 인간은 우주에까지 눈을 돌려 정복이니 점령이니 운운했지만, 눈에 보이지도 않는 바이러스조차 이기지 못하며 체면을 구겼다. 그 오만함의 발로는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바이러스보다 무서운 게 아닐까 한다. 코로나로 공포에 빠진 인간들이 서로를 의심하고 멀리하고 구분하고 차별하는 모습을 창공에서 보고 있는 박쥐들은 얼마나 배꼽을 빼고 웃을 것인가. 웃지 못할 난리는 코로나 때문이 아니라 무지와 공포가 인간들을 덮친 것이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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